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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368화 (368/1,329)

제8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1)

한 시간 뒤, 모든 과정이 마무리됐다.

끝까지 모든 수술을 집도한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으며 수술 팀의 어깨를 차례차례 두드렸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백 교수, 우리 정말 잘했지? 백 교수 덕이야. 치프야, 고생했다. 지훈아, 나쁜 놈들아, 수고했다. 환자가 너무 좋아하겠지? 그럼, 좋아해야지.”

“끄으응!”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수술실을 나가던 송재덕 과장이 힐끗 돌아보았다.

“지훈아, 자 좋다. 자 말이야. 그렇게 간단한 걸 왜 생각을 못했지? 역시 넌 대장이야, 대장. 지훈아, 대장 하자. 나쁜 놈들, 니들은 오늘 뭐 느낀 거 없어? 이게 대장이야, 대장.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까 다시 생각해. 다시.”

정말 끊임없는 압박이었다. 이제는 귀에서 대장 소리가 윙윙 울릴 지경이었다. 백무용 교수조차 고개를 흔들며 웃고 말았다. 환자와 수술의 중대성 때문인지 회복실까지 따라온 백무용 교수가 환자를 보다 말고 묘한 말을 했다.

“지훈아, 너 논문 잘 쓰고 있어?”

“예? 예.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

“나도 지켜보고 있으니까 잘 써라.”

설마 이혁민 교수가 전화라도 한 걸까?

흠칫 놀란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선생님, 이혁민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이혁민 선생님? 논문을 주셨어도 위장관이시잖아. 니 논문은 이혁민 선생님이 평가하질 않아.”

“그럼 누가 하나요? 설마 서울 병원 과장님이 하시나요?”

“글쎄다. 누가 할까? 곧 알게 되겠지.”

백무용 교수도 잘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갔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 말이다. 김지훈은 물론 손일석과 신현수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어째 눈치가 좀 이상하다. 금경태 과장님을 빼면 백무용 선생님인데 서울에서 받은 논문이잖아. 도대체 누가 평가를 하신다는 거야?”

“그러게. 어후! 되게 궁금하네. 설마 간담도에 새로 오시는 분이 계신 걸까?”

김지훈의 말에 손일석이 신현수를 보았다. 신현수도 금시초문인지 고개만 저었다.

그 순간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스승님! 혹시 스승님께서 정식으로 외과 진료를 하시는 걸까? 새로운 교수님이 오시는 게 아니라면 그것밖에 없잖아. 우와! 정말 그런 일이 생기는 걸까? 아니지. 그럼 저번에 큰 스승님을 뵀을 때 말씀을 하셨을 텐데.’

추측이 맞는다면 이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백무용 교수가 그런 일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의 얼굴이 오락가락했다.

그때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들 일제히 일어났다.

“지훈아, 호치키스 찍기 정말 힘들다. 그치? 그렇지? 나쁜 놈. 넌 양방인데 여기서 뭐 하니? 빨리 계란하고 우유 하나 먹고 다음 수술 들어와라. 어이구! 힘들다. 힘들어. 대장 할 놈이 있어야 하는데 큰일이네. 지훈아, 어떻게 생각하니.”

아직도 스테이플러를 호치키스란다. 어쩌면 긴장과 압박을 이겨 내는 송재덕 과장만의 방식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피식 웃다 말고 나직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렇게 힘들게 수술을 하고도 다음 수술에 들어가는 송재덕 과장이 웃고 있었다. 스승 역시 아무리 힘들어도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이 바로 김지훈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써전의 모습이었다.

8시간 만에 엄상훈이 수술 방에서 나왔다. 수술 방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힘들어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며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여보!”

부인은 그저 남편만 불렀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부모는 그저 자식이 안쓰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환자의 손을 꼭 잡은 채 병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안정을 취하게 하자, 얼마 후 환자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제야 부인과 늙은 부모가 김지훈을 보았다.

“수술은 잘 끝난 거죠?”

“과장님께 말씀 못 들으셨어요?”

“말씀은 똑똑히 들었는데 믿겨지지가 않네요.”

너무나 원했던 일이기 때문일까?

김지훈이 미소를 지으며 배에 둘렀던 복대를 살짝 풀었다. 수술 절개창과 드레인을 감싼 거즈만이 보였다.

“확실하게 연결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부터는 환자 회복에만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치료는 이제 시작입니다.”

엄상훈이 다시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후 항암 치료만 잘 이겨 낸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 낸 이상, 앞으로의 삶은 엄상훈 자신과 가족들에게 달렸다. 재발의 위험성은 언제나 상존하지만, 암 환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감수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김지훈이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부인과 늙은 부모의 눈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엄상훈이 순조로운 회복을 보였다. 가족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암에 대한 공포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만, 인공 항문을 만들었다면 지금도 여러 가지 문제로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복도를 따라 운동을 하고 있는 엄상훈을 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엄상훈의 입가에 걸린 미소에 왠지 뿌듯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 저 미소가 바로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는 이유였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환자를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해야 돼.’

“지훈아, 환자 어떠니? 어때? 물 잘 먹니?”

난데없이 들려온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에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이젠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예. 스케줄대로 식사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역시 호치키스가 좋네. 그렇지? 호치키스 아니었으면 고생 무지하게 했겠지? 그러니까 너 대장 해야 한다, 대장.”

“아! 과장님, 벌써 여섯 시가 넘었습니다. 회진 도셔야죠. 일석아, 과장님 오셨어. 뭐 해?”

이젠 김지훈도 집요한 공세를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그때마다 송재덕 과장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어쨌든 나쁜 놈 소리를 일찍 들어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환자들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바쁜 것 이외에는 신경 쓸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무용 교수는 물론 김지훈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드물기만 한 스테이플러를 적용할 수 있는 직장암 환자의 수술을 했다. 그런데 정작 서울에서는 한 주에 예닐곱 개 정도 하는 라파로 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슬슬 분위기가 가라앉을 무렵,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소식이 들렸다. 내과에서 담석증 환자의 수술을 의뢰한 것이다. 그것도 환자가 수술을 해야 한다면 꼭 복강경으로 받고 싶어 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파트 전원이 입가에 환한 미소를 달았다. 컨설트를 보고 수술 날짜까지 잡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김지훈이 부산을 떨자 홍재순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넌 집도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퍼스트를 서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신 나서 난리야?”

“에이! 선생님, 꼭 퍼스트를 서야 맛인가요? 그동안 준비한 것도 있고, 마침 논문도 라파로에 대한 거잖아요. 그리고 사실 간담도가 제일 재밌네요.”

“세부 전공으로 간담도 하고 싶어?”

김지훈이 웃으면서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 2년차 말인데 너무 섣부르고, 한편으로는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도리어 되묻고 있었다.

“선생님은 항문 쪽 하실 거예요?”

“내가 하고 싶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야?”

“선생님,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솔직히 선생님보다 열심히 하는 선생님도 안 계시잖아요. 그렇다고 실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요.”

홍재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은 이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최근에 와서 치질 수술은 물론 백무용 교수와의 수술까지 무리 없이 퍼스트를 서고 있었다. 이젠 교수들도 예전의 홍재순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건 생각 문제가 아니죠. 현실이 그렇잖아요. 야! 선생님이 항문을 하시고, 재수가 좋아서 나도 병원에 남으면 딱이겠는데요. 그림이 쫙 그려집니다.”

“실없는 놈.”

홍재순이 코웃음을 치다 말고 냅다 김지훈의 등을 쳤다. 김지훈이 오만상을 쓰며 괴로워했다. 잠시 엄살을 부리는 김지훈을 보던 홍재순이 말없이 의국을 나갔다.

그날 저녁, 홍재순이 회진을 돈 후 백무용 교수와 독대를 했다. 한 시간도 넘은 후에야 대화를 끝내고 스테이션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재순이하고 충분히 상의했다. 앞으로 복강경 수술은 니가 퍼스트를 서는 것으로 결정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수술 잘 준비해.”

“예? 제가요?”

백무용 교수의 말에 김지훈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팔짝팔짝 뛰며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일회성이 아니었다. 치프인 홍재순이 있는데 2년차 말에 치프 역할을 계속해서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문제 있어?”

“선생님, 저 2년찹니다. 능력도 부족하고, 홍재순 선생님도 계신데 제가 어떻게 퍼스트를 계속 섭니까?”

백무용 교수가 김지훈과 홍재순을 번갈아 보다 말고 피식 웃었다.

“재순이가 너 때문에 죽겠단다. 자체 집담회도 모자라서 논문 준비까지 도와달라고 했다며? 그리고 재순이는 앞으로 내 수술에 치질만이 아니라 항문 쪽 수술은 다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없어. 기회를 줄 때 잡아.”

항문과 관련된 수술은 다 들어간다니, 송재덕 과장이 확실하게 인정을 한 모양이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홍재순은 치프고, 김지훈은 2년차다.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김지훈이 머뭇거리자 홍재순이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지훈아, 과장님하고 선생님께 항문 파트 하고 싶다고 정식으로 말씀드렸어. 그래서 지금보다 더 확실하게 집중하고 싶어. 다행히 선생님들도 이해해 주시고 일단 수술에 들어오라고 허락을 해 주셨어. 나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 인생이 걸린 문제라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도 않아.”

홍재순의 말에도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백무용 교수가 혀를 차며 일어났다.

“김지훈, 내 오더야. 넌 하라는 대로 하면 돼. 2년차 자식이 개기고 있어. 재순아, 난 가야겠다. 참! 너 오늘 당직이지? 나도 당직이니까 응급 환자 뜨면 미리 다 준비하고 노티해.”

“예? 수술 준비를 다 하고 연락을 하라고요?”

“그래. 남은 한 달도 지금처럼만 해. 간다.”

미리 수술 준비를 하고 노티를 한다?

환자에 대한 진단과 수술 결정을 맡긴다는 것은 치프인 홍재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웬만해서는 어떤 교수도 이런 결정을 함부로 내리지 않았다. 홍재순은 물론 김지훈도 깜짝 놀랐다.

홍재순이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두근거려 입도 열기 힘들었다.

단 한 사람 덕분이었다.

‘지훈이, 너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정말 고맙다.’

“지훈아, 라파로 수술에서는 퍼스트를 서라는 것이 널 위해서만은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많이 늦었잖아. 일반 수술의 기본도 더 쌓아야 하고, 항문 쪽 공부도 해야 돼. 내게는 그게 가장 큰 득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들어가. 다른 치프들은 걱정 말고.”

홍재순이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섰다.

“아! 그리고 백무용 선생님과 상의를 하다가 느낀 건데, 니가 간담도를 세부 전공으로 택한 것처럼 말씀하시더라. 맞아?”

“예? 저 그런 말씀 드린 적 없는데요?”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느낌은 꼭 그렇던데.”

김지훈이 이마에 잔뜩 주름살을 만들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세부 전공 문제는 스승만이 알고 있다. 그런데 수술실에서 느꼈던 기분과 이번 일까지 생각할 때 정말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퍼스트를 서라는 결정도 그랬다. 홍재순은 예전의 일 때문에 혹시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백무용 교수가 허락을 했다니 내심 의아하기만 했다. 게다가 항문 파트를 하고 싶다는 것과 병원에 남는 문제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설마 스승님께서 언질을 주셨나? 만일 알고 계신다고 해도 라파로에서 퍼스트를 쭉 서라고 하시는 건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네.’

스승의 말이어도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프들이 있는 한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할 일이었다.

부담스러운 표정을 버리지 못하던 김지훈이 한참 만에야 얼굴을 풀었다.

백무용 교수의 말이 정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피식피식 웃음만 나왔다.

좋기는 한데, 기분이 왜 이런지 모를 일이었다.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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