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우리는 왜 발전해야 하는가 Ⅰ (2)
어쨌든 홍재순은 스스로 변하고 있었고, 변화의 중심에 서고 있었다. 그 덕에 2년차들의 생활은 더욱 빡빡해졌다. 자체 집담회 준비를 소홀히 하면 2년차 시절의 홍재순을 만나야 했다. 특히 김지훈에게는 일말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마치 구미에서의 일은 까마득하게 잊은 사람 같았다.
“김지훈, 너 똑바로 안 해? 이럴 거면 앞으로 들어오지 마. 현수나 일석이도 응급실에 수술까지 다 들어가지만 준비해 오잖아. 그리고 졸지 마. 나도 졸린 거 참아 가면서 집담회 준비하고 있어.”
일주일 내내 수술을 들어가는 홍재순이었다. 항문 파트에 관한 공부도 따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응급 수술까지 하면 치프들 중 가장 힘들게 일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으휴! 팡팡 놀기라도 하면 욕이라도 하지. 이건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고생에도 끝이 있는 법이다. 드디어 라파로와 의료용 스테이플러에 대한 발표가 모두 끝났다.
발표한 보람이 있었다. 적어도 머릿속에서만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손일석과 신현수의 눈에도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였다. 누군가 조용하고도 냉정한 표정으로 폭탄을 꺼냈다. 눈빛과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가슴을 활활 태우는 승부욕에 사로잡힌 신현수였다. 건강한 투지였다.
“지훈아, 일석아, 니들 논문 어떻게 할 거야? 최소한 초안은 잡고 서울에 올라가야 하지 않겠어?”
“아이고! 논문도 있었구나. 어째 하나 끝나면 바로 또 하나가 불쑥 나타나냐. 죽어라 죽어라 하네.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써야지, 뭐. 일단 이삼 주는 집담회만 하고 좀 쉬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손일석이 손을 휘휘 저으며 픽 쓰러졌다.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김지훈도 내심 논문이 걱정됐지만 일단 며칠 쉬고 싶었다. 하필이면 마지막 날까지 발표를 했고, 정말 화끈하게 탔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현수가 꺼내 든 폭탄을 냅다 던졌다.
“지훈아, 홍재순 선생님에게 우리 논문까지 봐달라고 부탁 좀 하자. 지난 한 달 동안 보니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배울 게 아직도 많이 남은 것 같아.”
여기서 동의를 한다면 이건 한마디로 자폭이었다.
김지훈이 이마를 비비며 눈가를 찌푸렸다.
“부탁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안 힘들어?”
“나도 힘들어. 하지만 남은 시간이 한 달 반밖에 안 되잖아. 바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니 말대로 지금 힘들다고 미루면 언제 기회가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흐느적거리던 손일석이 벌떡 일어났다.
“신현수,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우리도 사람이야. 기계가 아니라구. 좀 쉬어 줘야 돌아가지. 너 내 머리가 터져서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럼 넌 빠져.”
이럴 땐 정말 냉정한 놈이다. 지금까지 같이 고생을 했는데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빠지란다. 손일석이 애타는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아, 현수 좀 말려 봐. 저 자식이 드디어 맛이 간 거야. 우리 일단 숨부터 돌리고 생각하자.”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눈빛이 번쩍거리는 것이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실로 대단한 압박이었다. 신현수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정말 혼자라도 할 생각이 분명해. 제길! 내가 하자고 할 때는 힘들지도 않더니, 입장이 바뀌니까 가슴이 다 서늘해지네. 역시 넌 내 평생의 라이벌이야.’
지금처럼 쭉 산다고 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조용히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일석이 너는?”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김지훈을 노려보던 손일석이 머리까지 쥐어뜯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손일석의 손이 조용히 머리 위로 올라갔다.
“씨펄! 3년차 때는 니들하고 안 만났으면 좋겠다. 이 웬수 같은 놈들아. 아니, 웬수다, 웬수. 에휴! 근데 홍재순 선생님이 동의를 하겠어? 집담회에 논문까지 하면 일주일에 5일이야, 5일. 게다가 요새 제일 힘들게 일하시잖아.”
손일석의 기대일 뿐이었다.
김지훈의 말을 들은 홍재순이 잠깐 고민을 하는 척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뻘건 채로 말이다.
“규칙은 똑같다. 니들 논문이니까 준비가 제대로 안 되면 바로 아웃이야. 확실히 하자. 일주일에 두 번 할래, 아니면 세 번 할래?”
거의 죽어 가는 얼굴을 한 손일석이 애타는 눈빛으로 김지훈과 신현수를 보았다.
‘지훈아, 현수야, 제발 하루라도 쉬자.’
세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중 한 명은 원래부터 독한 놈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보다 더 독해지려 마음을 먹은 놈이었다. 답은 빤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세 번이요.”
그것으로 2년차들에게 새로운 고생길이 열렸다. 그나마 어차피 써야 할 논문이라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솔직히 이혁민 교수에게까지 탈 수는 없었다.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타는 것을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문득 스승은 물론 송재덕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에 신기동 교수까지 태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한 스승 밑에서 배웠으니 그럴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애정이 있어서 그러시겠지? 아니었으면 벌써 화부터 나고 짜증만 솟구쳤을 거야.’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과 애정이 없다면 태우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변하지 않는 일상이 이어졌다. 2년차나 1년차나 몰골이 점점 비슷해져 갔다. 사실 김지훈이나 손일석은 평소에도 단정함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넥타이는 아예 맬 생각을 안 했고, 머리에 떡이 지는 것 정도는 예사였다. 그런데 이젠 신현수마저 점점 흡사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백 교수, 얘들 상태가 왜 이래? 2년차 맞아? 나 몰래 따로 공부라도 하는 거야?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음! 그런데 저놈들 다 1년차랑 구분이 안 돼. 수술도 별로 안 들어오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대장도 안 하면서 말이야. 나쁜 놈들. 에이! 나쁜 놈들. 지훈이 저놈은 대장 하겠지? 그치?”
그러면서도 송재덕 과장의 입은 웃고 있었다. 일반 외과 역사상 가장 열심히 일을 하는 놈들이 눈앞에 있었다. 뿌듯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백무용 교수도 웃기만 했다.
“근데 라파로는 언제 시작할 거야? 언제? 외래에 적당한 환자 없나? 없어? 내과에서는 뭐래?”
“내과와 협의 중에 있습니다. 병원과도 비용 문제를 해결해야 확실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이! 그놈의 돈. 거, 왜 보험이 안 되는 거야? 의료보험료는 매달 꼬박꼬박 가져가면서 말이야. 점점 올라요, 점점. 그것도 해마다 말이야. 에이! 나쁜 놈들.”
정작 이론 문제는 모두 끝났는데 수술을 할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라파로는 비용 문제가 걸렸고, 스테이플러 사용은 돈도 돈이지만 적용할 수 있는 환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일석이 두툼한 차트와 엑스레이 봉투를 들고 들어오며 김지훈을 찾았다.
“일석아, 무슨 일이야?”
“과장님이 오더를 하나 내리셨어. 우리보고 이 환자 검토한 후 발표를 하라고 하시네. 조금 있다가 바로 양방 벌어져서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뭔 일거리가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몰라. 지훈아, 현수도 수술 들어가야 한다니까 니가 먼저 환자 파악 좀 하고 있어.”
“바로 해야 되겠지?”
“언제 물어보실지 누구도 모르는데 당연한 소리지, 인마. 어쩌면 오후 수술 끝나자마자 물어보실지도 모르니까 확실하게 준비하고 있어. 이런 거 빵꾸 내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인 거 알면서 왜 이래?”
김지훈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다 우리가 저지른 일인데 누구를 탓하겠어.’
손일석의 말대로 일이 너무 많았다. 과중할 정도로 많은 수술부터 자체 집담회에 논문 준비까지, 평일 오프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송재덕 과장은 이상하게도 이런 일에는 확실한 시한을 주지 않았다. 마치 생각나는 대로 확인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미흡하면 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사를 제치고 가장 먼저 끝내 놓는 것이 살길이었다.
두툼한 차트를 앞에 놓고 한숨을 내쉬던 김지훈이 환자 파악을 시작했다. 예전에 입원한 경력은 많았지만 의외로 특별히 주의해서 볼 점은 없었다.
‘차트만 두꺼웠지, 별 내용이 없네. 도대체 뭐 파악하라고 하신 거야? 단순한 환자일 리가 없는데.’
그럴수록 차근차근 확인을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외래 차트와 입원 차트를 확인하던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예감이 맞았다.
직장암을 진단받은 45세 남자 환자.
순간 번뜩이는 생각에 부랴부랴 엑스레이 봉투를 뒤져 복부 CT와 대장 조영술 사진을 찾았다. 김지훈이 눈가에 주름까지 만들며 신중하게 사진을 확인했다. 직장에 직경 2센티미터에 달하는 덩어리가 관찰됐다.
‘이게 어느 레벨이야?’
1센티미터 간격으로 촬영된 복부 CT와 대장 조영술에서 보이는 덩어리의 위치를 비교하며 정확한 위치를 가늠했다. 직장과 항문 경계부에서 7센티미터 상방이었다.
김지훈이 급히 의료용 스테이플러에 대해 정리된 자료들을 찾았다. 차트와 검사 결과를 다시 확인한 후 상당히 흥분된 기색을 보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환자가 온 것이다.
직장암 환자에게 사용되는 의료용 스테이플러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김지훈은 왜 환자를 앞에 두고 흥분까지 한 걸까?
바로 인공 항문 때문이었다.
직장암의 수술 방법은 두 가지다.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암을 제거하고 장을 이어 줄 수 있는 환자가 있는 반면, 항문까지 모조리 제거해 인공 항문을 만들어야 하는 환자도 있다.
이 두 수술의 차이는 대단히 컸다.
일단 대장을 복부 밖으로 연결한 인공 항문으로 변을 봐야 한다는 것 자체로 환자들은 대단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육체적인 문제는 별개였다.
인공 항문으로는 배변 조절을 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복부 근육을 이용해 변이 나오는 출구를 조일 수 있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항상 변이 배 밖으로 새어 나오게 된다.
물론 변을 받아 내기 위해 인공 항문 주위에 비닐 주머니를 부착한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하게 붙여도 대변 냄새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터질 수도 있다. 여기에 피부까지 짓무르고, 감염의 위험에도 지속적으로 노출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한창 일할 나이에 수술을 받은 환자들 중 일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 외부 활동을 극히 제한하게 된다.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삶의 질은 급격히 하락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공 항문은 환자들에게 불편과 불안을 넘어 자신이 암 환자라는 것과는 또 다른 두려움까지 유발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인공 항문을 만드는 것일까?
근치적 절제술을 요하는 모든 환자는 암 덩어리를 포함해 정상 조직까지 제거해야 한다. 직장암의 경우 암이 전이되는 통로 쪽인 에스 결장 방향으로는 7센티미터 이상을, 하부 쪽으로는 3센티미터 정도를 제거한다.
그런데 직장의 대부분은 골반 속에 묻혀 주변 조직과 단단히 붙어 있다.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골반 깊숙한 곳까지 박리를 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항문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부위를 기점으로 상부에 발생한 암은 에스 결장과 직장을 연결할 수 있다. 하지만 하부에 발생한 암은 이어 줄 수가 없다.
순전히 물리적인 한계였다. 손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골반 내의 공간은 수술 기구를 조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좁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연결을 시도하다가는 100퍼센트 연결 부위가 새고 만다. 이로 인해 골반 내에 염증이 광범위하게 퍼진다면 환자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직장암 환자에게는 항문에서 10센티미터 상방이 제2의 생명선이었다. 단, 1~2센티미터에 불과한 조그만 차이도 의사와 환자들에게는 대단한 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바로 대장 문합용 스테이플러다. 암을 제거한 후 남은 대장 양쪽에 각각 특수한 스테이플러를 넣어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장암 수술에 있어서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어 항문에서 7센티미터 하방에서는 연결한 사례가 없었다. 이 선은 스테이플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였다.
김지훈이 대장용 스테이플러 시술 테이프를 틀었다. 모든 사람이 사소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단 1센티미터에 불과한 차이도 수술의 난이도를 크게 좌우한다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경험이 있는 의사들도 그럴진대 송재덕 과장조차 처음 시도하는 방법이었다. 수술 팀을 구성하는 전공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직장암을 진단받은 45세 남자 환자.
엄상훈의 암 덩어리가 정확하게 항문에서 7센티미터 상방에서 발생했다. 8~9센티미터라면 훨씬 수월했을 테고, 성공 확률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확인해도 7센티미터였다.
집도는 송재덕 과장이 하겠지만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련하다고 해도 경험이 많은 부분을 좌우하는 과가 바로 외과이기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감과 완벽한 준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송재덕 과장은 가장 난이도가 높은 상황에서 수술에 성공할 수 있을까?
김지훈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은 파트가 아니기 때문에 수술을 들어갈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환자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암 환자라는 사실을 떠나 평생 인공 항문을 달고 살기에 마흔다섯이라는 나이는 너무 젊었다.
“후우! 7센티미터라.”
김지훈의 한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