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63화 (363/1,329)

제6화 우리는 왜 발전해야 하는가 Ⅰ (1)

허경발 명예 교수의 집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이준영 과장의 뒤를 따랐다. 신년을 맞은 일반 외과 대가의 집답게 사람들로 바글거릴 줄 알았다. 세계 학회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인사를 온 사람들로 가득해야 했다.

응접실 옆에 붙은 부엌을 보니 손님을 맞았던 흔적이 잔뜩 널려 있었다. 그런데 단둘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긴장이 확 다가왔다.

“스승님, 저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못 받으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절부터 받으십시오.”

“올 사람은 이미 다 다녀갔어. 그런 걱정 말아.”

옷매무새를 고친 이준영 과장이 허경발 교수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김지훈에게 손짓을 했다.

“스승님, 김지훈이 기억하시죠? 인사드리려고 같이 왔습니다. 지훈아, 세배부터 드려.”

허경발 교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세배를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건강하십시오, 선생님.”

“그래요. 고마워요. 올해도 건강하고 복 많이 받아요. 허허! 준영아, 네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구나.”

“괜찮은 놈입니다. 스승님을 뵙고 어떤 의사가 돼야 하는지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지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김지훈이 내심 반색을 했다. 까마득해 보이지도 않는 허경발 명예 교수가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는 것이 정말 불편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은 이준영 과장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몰랐다.

젊은 후배 의사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 허경발 교수였다. 예외가 있다면 스스로 인정한 제자를 만날 때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준영 과장은 유일하게 이름을 부르는 제자였다. 그만큼 각별하면서도 특별하게 여겼다.

결국 이준영 과장의 말은 김지훈도 제자로 여겨 달라는 말이었다. 만일 호칭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내가 줄 것이 있으면 다 줘야지. 김지훈 선생, 앞으로는 이름을 부를 거야.”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덕담이 오고 가는 사이 상이 차려졌다.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제자를 향한 스승의 마음이었다.

연로한 스승과 중년이 넘은 제자가 술 한 잔을 걸치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먹성 좋기로 소문난 김지훈이었지만 젓가락질도 하기 힘든 자리였다. 후딱 한 그릇 해치우고는 조용히 수저를 놓았다.

이준영 과장이 지난 추억을 쏟아 냈다. 누구나 과거를 얘기할 때면 그렇듯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힘든 시절을 보낸 것만은 틀림없었다. 기억 사이사이에 숨은 피나는 노력과 열정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과장의 말이 점점 길어졌다.

“스승님, 그때는 정말 무서우셨습니다. 거의 이틀을 내리 잠도 못 자고 일했는데 아침에 환자 검사 결과 모른다고 얼마나 혼을 내시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등에 땀이 다 납니다.”

“허허! 내가 그랬나?”

“그럼요. 다들 스승님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들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이 아무 때나 화내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더욱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그때가 그립네. 우리 모두 젊었고, 열정이 넘쳤었지. 너희들을 보며 기대도 많이 했어. 다들 훌륭한 의사가 돼서 정말 기쁘구나.”

이준영 과장이 입술을 모았다. 정작 가장 기대를 받았던 자신이 스승에게 심려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무슨 소리야?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그런 일은 아무나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허경발 명예 교수의 말에서 돌연 이혁원과의 일이 생각난 것이다. 의사가 쉽게 이길 수 없는 일이라면 십중팔구는 환자의 생명과 관련된 의료사고일 것이다.

‘휴우! 설마 했는데 의료사고가 정말 있었던 걸까?’

아무리 궁금해도 물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그 일이 무엇인지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화제가 바뀌고 슬슬 술이 사라지며 분위기가 깊어졌다.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김지훈이 화장실도 갈 겸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을 잘못 알았다. 급히 문을 닫으려던 김지훈이 멈칫하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대화에 열중한 탓에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슬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허경발 교수의 서재였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수수한 방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가득 메운 책과 논문에서 노교수가 평생 동안 쌓은 학문적 업적이 느껴졌다.

책상 위에는 아직도 논문이 펼쳐져 있었다. 간담도에 대한 논문이었다.

‘후우! 은퇴를 하시고도 공부를 하시네. 정말 대가가 될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나도 이렇게 끝까지 노력할 수 있을까?’

그때 한쪽에 놓인 액자에 눈길이 갔다.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옆에 제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짝은 사진이 나란히 있었다. 흑백 사진 속의 사람들은 모두들 젊은 나이였다. 낯이 익었다.

‘와! 스승님하고 교수님들이시네. 이렇게 젊으셨을 때가 있었구나. 응? 근데 이 사람은 누구지? 설마?’

환하게 웃고 있는 송재덕 과장의 옆에서 금경태 과장이 함께 웃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까지 제자였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례식장 문제에 전공의 논문까지 표절하는 사람이 어떻게 허경발 선생님의 제자일 수가 있지? 부끄럽지도 않은가?’

금경태 과장 생각에 얼굴을 찡그리던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단순히 욕만 하고는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도 스스로 올바르지 않으면 어떤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준영 과장은 단순히 수술만 가르친 스승이 아니었다. 의사로서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알려 주고, 자신에게 각별한 애정까지 쏟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에 눈물을 보였는지도 몰랐다.

문득 허경발 명예 교수의 서재도 다르게 보였다.

‘스승님, 절 왜 데리고 오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결코 자만하지 않겠습니다. 훗날 스승님 앞에서 떳떳하게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살그머니 자리로 돌아온 김지훈이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준영 과장과 마지막 잔을 비운 허경발 명예 교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큰하게 술이 올라 있었다.

“지훈아, 전에 네게 했던 말 기억하고 있겠지?”

“예.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딱 한마디만 더 하고 싶구나. 의사이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 아무리 뛰어나게 보이는 의사라도 됨됨이가 올바르지 못하면 가장 나쁜 의사와 다름이 없어. 명심해.”

대가란 이런 존재일까? 의사로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으로서, 의사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원칙을 말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마음속 깊이 허경발 명예 교수의 말을 새겼다.

이제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허경발 명예 교수가 문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지훈아, 네가 운전을 해야겠다.”

“예, 선생님.”

차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영 과장도 허경발 명예 교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돈독한 관계네. 나도 스승님과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숨소리까지 거칠게 느껴졌다. 이준영 과장이 이렇게 과음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응급실 근무를 하는 한 체력이 따라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놓친 말이 있었나? 고민이 많으신 것 같네.’

공연히 심난해진 김지훈이 묵묵히 운전만 했다.

그때 이준영 과장이 창밖 어딘가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지훈아, 다음부터 스승님을 뵐 때는 큰 스승님이라고 해야 한다. 단 우리하고 있을 때만이지만, 너도 그 의미를 알겠지? 난 네가 스승님과 내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되마.”

설마 술기운일까? 얼굴이 새빨갛기는 했지만 술에 취했다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이준영 과장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운전대를 꼭 잡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이준영 과장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지훈아, 운전 조심해라. 고생했다.”

어느 때보다도 살갑게 들렸다. 스승의 마음이 단 두 마디에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았다.

천안으로 돌아가는 동안 김지훈이 연거푸 숨을 몰아쉬었다.

단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소중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고경아.

이제는 스승이라고 당당히 부를 수 있는 이준영 과장.

허경발 명예 교수가 아닌 큰 스승.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중했다. 그들과의 인연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을 뿐 그들 역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김지훈 또한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외로움을 잊은 지 오래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겨울 하늘이 온통 별빛으로 가득했다. 반짝이는 두 개의 별들 주위로 수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숨 가쁜 하루하루가 지났다.

발표 때마다 새카맣게 탔다. 송재덕 과장은 굳이 ‘야야야’ 소리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동네 아저씨 미소가 진해질수록 2년차들의 어깨가 축축 처졌다.

그런데 홍재순의 얼굴만은 점점 밝아졌다. 스스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목에 벌어지는 백무용 교수의 수술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송재덕 과장이 치질 수술을 할 때면 슬그머니 들어가 참관을 하며 배우고 있었다.

“재순아, 치프야, 이렇게 하면 되겠니? 어때?”

“잘 배웠습니다, 과장님.”

“근데 너 자꾸 왜 내 수술에 기웃거려? 항문 하고 싶니? 항문? 재밌긴 해. 그치? 아버지는 일주일에 몇 개나 하시니?”

송재덕 과장도 이미 홍재순의 아버지가 항문 전문 병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는 모릅니다만, 대충 열다섯 개 이상은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야! 그럼 한 달에 육십 개네? 나보다 더 많이 하시네. 아니지. 훨씬 많이 하는구나. 치프야, 아버지한테 배우면 더 좋겠다. 그렇지? 혼내지도 않을 거 아냐.”

“예. 그렇긴 합니다만, 개인 병원에서는 어려운 케이스를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건수는 많아도 다양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아버님 병원에서 근무를 한다고 해도 지금은 더 많이 보고 다양한 수술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홍재순이 상당히 진지했다. 어쩌면 항문 파트를 세부 전공으로 택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랬다. 그래서 어시스트를 서는 것도 아닌데 빠짐없이 참관을 한 것이다.

자질을 떠나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송재덕 과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치프야, 내일 치질 수술 다섯 개 몰았다. 이번에는 니가 들어와, 니가. 퍼스트 잘 설 수 있지? 우리 치프하고 백 교수한테는 다 말해 놨어. 지훈이한테 발등 밟으라고 할까?”

“아닙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 날, 홍재순과 하루 종일 치질 수술을 하던 송재덕 과장이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 굉장히 놀란 것 같으면서 기대감이 잔뜩 걸려 있었다.

“치프야, 너 항문에 소질이 있다. 응? 정말이야, 정말. 야! 이걸 내가 왜 몰랐을까? 우리 치프하고 상의해서 앞으로 항문 수술은 니가 들어와. 걔는 관심이 없어. 관심이. 백 교수 수술을 더 좋아해. 나쁜 놈! 에이! 나쁜 놈들.”

아무 생각도 없이 마구 말을 내뱉을 송재덕 과장이 아니었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곧 4년차가 되기에 치프들 모두 각자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집중하기 마련이었다. 상황이 된다면 융통성을 가지고 대처해도 될 때였다.

마침 홍재순과 다른 치프들의 관심 분야가 달랐다. 송재덕 과장이 그날로 백무용 교수와 상의를 했다. 자신이 맡은 파트 일을 열심히 하는 한 홍재순이 항문 수술을 들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모두들 홍재순을 보며 수군거렸다.

“너무 열심히 하네. 설마 병원에 남을 생각은 아니겠지?”

“에이! 생각이 있다고 되나? 치프 때 빤짝 열심히 한다고 남을 수 있으면 누가 못 남아?”

“그래서 넌 남을 생각이야?”

“난 로칼 체질이야. 병원에 남아 봐야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월급은 가벼운데 그런 짓을 왜 해? 간단한 수술 하면서 사는 게 마음도 편하잖아.”

저마다 삶의 목표가 달랐다. 병원에 남아 일반 외과 전문의로서 칼바람을 날리고 싶은 사람도 있다. 반면 누구나 전문의가 되는 세상이기에 거쳐 가는 과정으로 일반 외과를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어떤 길을 택했든 나름의 길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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