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소중한 사람들 (2)
차창 밖을 보던 고경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올 때와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인사드릴 곳이 또 있어요.”
고향에 오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고재현의 집이었다.
마치 친자식이라도 온 것처럼 난리가 났다. 오래간만에 왔다는 타박은 하지도 않았다. 김지훈보다 누군가에게 더 눈길을 주고 있었다.
“춥다. 추워. 빨리 들어와. 여보! 지훈이 왔어. 온다는 사람과 같이 왔네. 뭐 해? 빨리 과일이라도 내와요.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안녕하세요. 고경아예요.”
“어이구! 고경아. 이름도 예쁘네. 재현아, 너도 좀 지훈이한테 배워. 이놈아! 얼마나 좋아. 어서 앉아요.”
곧 고향 친구들까지 떼거리로 몰려왔다. 모두 모여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궁금한 게 많았고, 친구 놈들은 부럽다는 표정만 지었다.
술 한잔하며 반가움을 나누고 싶었지만 5시까지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더구나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고재현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일어났다.
“부모님께 인사는 드렸어?”
“예. 같이 들렀다 왔습니다.”
“잘했다. 이젠 마음을 푹 놓으시겠네. 지훈아! 자주 좀 와. 이러다 다음에는 애 데리고 오겠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짧은 시간이었기에 더욱 아쉬웠다. 친구들의 서운한 눈길을 뒤로하고 수원에서 제일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고경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 씨, 빨리 가야 되잖아요. 갑자기 커피는 왜요?”
“경아 씨,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집에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항상 상황이 허락하질 않네요.”
김지훈이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난 3년 동안 잘해 준 것이 없었다. 항상 기다리게 하고, 살갑게 대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말없이 자신만을 바라봐 준 고경아였다. 마지막 숨을 쉬는 그날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어설프고 어색하다고 해도 꼭 표현을 하고 싶었다. 마음이 담긴 상자를 꺼냈다.
“경아 씨, 사랑합니다. 평생 함께해 줄래요?”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연 김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탁자 위에 놓인 조그만 상자를 본 고경아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반짝이는 큐빅이 박힌 금반지.
고경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예쁘지 않아도 좋았다.
비싸지 않아도 좋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남자의 마음이 담긴 반지였다. 평생 함께해 달라는 말이 귓가에서 감돌았다. 밤마다 혼자 상상했던 멋진 청혼은 아니었지만 행복했다.
한동안 반지를 바라보던 고경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지를 꼈다. 어떻게 알았는지 손가락에 딱 맞았다.
“지훈 씨, 나 정말 행복해요.”
“내 마음을 받아 줘서 고마워요.”
이름 모를 커피 향이 진하게 퍼졌다. 하늘도 축하를 해 주는지 나풀나풀 눈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행복하면서도 먹먹한 가슴을 안고 함께 창밖을 보았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체온은 따스했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눈가루가 굵어지며 함박눈으로 변했다. 길거리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물끄러미 흩날리는 눈을 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경아의 손을 잡고는 급히 차로 달려갔다.
“으아아! 큰일 났다. 경아 씨, 빨리 갑시다.”
“아직 3시 반이에요.”
“눈 오잖아요.”
“어머! 그 생각을 못했네.”
평소라면 휴일인 것을 감안해도 한 시간 반이면 올라가고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눈이 쌓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김지훈이 열심히 눈발을 가르며 액셀을 밟았다.
점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눈발은 여전히 온 하늘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째깍! 째깍!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고경아도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고경아는 왜 초조해할까?
이준영 과장은 김지훈만이 아니라 고경아도 무척이나 예뻐했다. 가끔 수술 방에서 만나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잘 지냈느냐고 한마디 할 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김지훈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고경아도 그런 이준영 과장을 무척 존경하고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으아아아!
4시 55분이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응급실 앞으로 달려갔다. 김지훈이 손을 꽉 잡고 있는 탓에 고경아도 덩달아 달려야 했다. 이준영 과장의 차가 보였다. 헉헉거리며 잠시 숨을 고른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뭐가? 딱 맞춰 왔네. 그런데 경아야, 아직 못 들어갔어?”
고경아가 밝게 인사를 하자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이준영과장이 시계를 보았다. 눈이 오는 탓에 스승의 집에 갈 시간이 빠듯했다. 그때 우연히 고경아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가 보였다. 어째 모양새가 패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 오늘 돌아가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고 하더니 혹시 반지까지 선물을 했나? 녀석! 그럴 나이도 됐지.’
“경아야, 반지 예쁘다. 혹시 지훈이한테 받았어?”
목소리가 부들부들했다. 김지훈에게 하는 말투와는 완전히 달랐고, 얼굴도 천사가 따로 없었다. 물론 이준영 과장의 외모에 완전히 적응이 된 김지훈 눈에만 그렇게 보일 것이다.
고경아가 얼굴을 붉히자 이준영 과장이 씨익 웃었다.
아예 대놓고 활짝 웃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차별이었다.
“경아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네.”
“그럼요, 선생님. 앞으로도 쭉 경아라고 불러 주세요.”
“고맙다. 나도 경아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죽이 척척 맞는다. 이준영 과장이 한술 더 떴다.
“눈도 오는데 집에 혼자 갈 수는 없지. 타. 집에 데려다줄게. 대신 오늘은 지훈이 좀 양보해 줘.”
“고맙습니다, 선생님.”
셋이 한 차를 타고 고경아의 집으로 향했다. 불과 10분 남짓 동안 이준영 과장이 대여섯 번은 웃은 것 같았다. 한 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완전히 소외된 김지훈이 힘없이 고경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평생 동안 단 한 번밖에 없는 날, 멋진 말도 없이 헤어지다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고경아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 다행이었다.
예정보다 늦게 허경발 명예 교수의 집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늦지 않았을까요?”
“괜찮아. 그리고 둘이 있을 때는 호칭 좀 통일해. 헷갈려.”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도 무뚝뚝하기만 했다.
‘야! 경아 씨하고 날 이렇게 차별을 하시나? 너무하시네.’
슬쩍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찢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서울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보았을 때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 간간이 마음만 내비쳤던 스승이었다.
그런데 호칭을 통일하라니 무슨 말일까?
‘혹시 스승님이라고 부르라는 말씀이신가? 맞지? 설마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아닐 거 아냐.’
갑자기 말문이 막힌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간담도 도니까 어때? 지금도 하고 싶어?”
얼마 전까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면 활활 태우던 스승이 간담도까지 묻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길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진정시킨 김지훈이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예. 요새 라파로까지 공부하고 있는데 정말 대단한 매력이 있는 분야인 것 같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해. 어느 파트건 다 어렵지만 특히 어려운 분야야. 전에 말한 것처럼 기본이 안 돼 있으면 못한다. 다른 파트 수술을 볼 기회가 있으면 확실히 배워 둬. 그래야 나도 널…….”
이준영 과장이 말을 얼버무렸다. 결코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들을 말은 다 들었다. ‘나도 널’이라는 말에 확 꽂힌 김지훈의 입가에 웃음이 쫙 퍼졌다.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이제 김지훈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이준영 과장의 제자였다.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는 당당히 스승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머릿속에 품고 있던 의문도 마음 놓고 물어볼 수 있었다.
“예,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기본을 계속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다른 파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지훈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며 반응을 살폈다. 이준영 과장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걸렸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드디어 스승님께 확실히 인정을 받은 건가?’
“간단하게 말해 주마. 간이나 담도를 건드리면 많은 경우에서 장을 잘라 담도에 이어 주어야 해. 장과 장을 잇는 것보다 샐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건 너도 잘 알지? 결국 간담도를 하는 사람은 장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김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담도를 전공한 스승이 이혁민 교수와 함께 다른 의사들이 고개를 젓던 위암 환자의 수술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 이유가 바로 스승의 말속에 있었다.
힐끗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말을 이었다.
“대장암이 어디로 전이가 제일 잘 돼?”
“간입니다.”
“그럼 간으로 퍼진 대장암은 누가 수술을 해야 해?”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간담도 전문의나 대장 파트 전문의 중 한 명이라고 대답을 할 뻔했다. 이준영 과장은 그런 빤한 답을 가진 질문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외과와 관련된 질문에는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담겨 있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느끼고 깨달은 대로 대답할 일이었다. 정답이 아니라면 새로운 사실을 배우는 것이고, 맞는다면 그 길을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
“간담도와 대장을 세부 전공으로 택한 의사들이 함께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준영 과장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생각이 더 깊어졌구나. 고맙다. 누가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 깨닫는다면 언젠가는 스승님을 뛰어넘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다. 올해가 아니더라도 내년에는 네게 간담도가 어떤 분야인지 꼭 가르치고 싶구나. 금경태가 용인을 할까?’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식으로 외과 진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김지훈은 물론 아들인 이혁원에게도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둘뿐일까?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 유석재 등등.
이번 전공의들 중에는 유난히도 인재가 많았다.
그러나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혁민 교수의 노력과 신동석 이사장의 승인만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교수 협의회와 이사회라는 더 완강하고 두꺼운 벽이 있었다.
음성에서 보낸 10년이라는 시간은 김지훈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주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다. 일반 외과로의 정식 복귀는 다른 교수들의 눈에 파격이자 특혜로 보일 수도 있었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졌던 이준영 과장이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김지훈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이제 일반 외과를 이해하기 시작했구나. 난 자신의 파트에서 최고인 의사들이 힘과 마음을 합친다면 불가능한 수술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고생했다.”
제대로 대답을 했다. 스승의 질문이 아니더라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였다. 그간의 고민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뿌듯한 마음에 기분 좋게 웃던 김지훈이 갑자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콧등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고생했다? 왜 아버지가 생각나지?’
묵묵히 자신의 뒤를 돌봐 주던 아버지.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던 아버지.
밤늦게까지 책을 펴고 있으면 들려왔던 말.
고생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려 했다.
오늘따라 왜 이토록 마음이 약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고경아를 인사시킨 날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이준영 과장의 마음 때문일까?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내 녀석이 갑자기 웬 눈물이야?’
이준영 과장이 의아해하면서도 눈가에 맺힌 한 방울의 눈물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지훈이 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때론 모른 척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난 걸까? 왜 났을까? 지훈아,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세상에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힘내라.’
‘스승님, 갑자기 슬프면서도 행복해집니다. 절 아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정말 힘들었었는데, 생각해 보면 참 복이 많은 놈이네요. 경아 씨와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전 어떻게 살았을까요?’
고경아와 스승과의 첫 만남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연이자 운이 좋았는지 알았는데,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전 두 개와 별처럼 빛나는 눈, 그리고 음성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난 스승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