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61화 (361/1,329)

제5화 소중한 사람들 (1)

치프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나마 가장 여유를 보이던 김지훈마저 한숨을 쉬었다.

자체 집담회 준비도 응급실 환자 때문에 결국 홍재순과 둘이 했다. 손일석과 신현수가 의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복사물까지 완성된 상태였다.

김지훈이 책상에 엎드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손일석이 마구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지훈아, 일어나. 숙소 가서 자, 인마. 이왕 자는 거 편하게 자라. 피로가 더 쌓이겠다.”

흠칫 놀라며 눈을 뜬 김지훈이 멍한 표정으로 손일석을 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상황이 파악된 듯 혼자 중얼거리다 말고 픽 쓰러졌다.

“일석아, 침대가 왜 이렇게 딱딱하지? 베개가 없네. 아우! 머리야! 나 먼저 잔다. 잘 자라.”

“어휴! 가지가지 한다. 이래서 집담회까지는 힘들다니까.”

손일석의 푸념 속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났다.

물끄러미 복사물을 보던 신현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신현수가 마지막까지 남아 자체 집담회는 물론 다음 발표까지 준비를 했다. 버티다 못한 손일석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현수야, 설마 너도 지훈이처럼 변하는 거냐?”

순간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던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김지훈은 주말 내내 발표 준비를 했다.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듣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집중력까지 보였다. 가끔 쉴 때조차 손을 쉬지 않았다.

따르륵! 따가각!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끊임없는 노력 앞에서는 수재가 아니라 천재라고 해도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정도 노력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마지막 남은 페이지를 읽던 신현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1년차들은 차트 정리를 하고 있었고, 김지훈은 엎드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눈 한번 뜨질 않았다. 독한 놈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독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2년차들이 마른 장작으로 변했다.

발표 시간만 되면 돌변하는 송재덕 과장.

이에 질세라 눈을 번뜩이는 백무용 교수.

예리하기 짝이 없는 박경일 교수가 순해 보일 지경이었다.

여기에 홍재순까지 가세했다.

불씨만 보이면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2년차들이 어떤 놈들인가?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은 2년차들의 눈빛에 1년차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할 지경이었다.

혼자서는 단 삼사 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할 수 있는 동기들이 있고, 의사에게 기쁨을 주는 환자가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시원한 방귀를 뀐 다음 날 서정민의 코 줄을 뺐다.

하루가 지났다.

복부 사진은 정상적으로 보였고, 토하지도 않았다.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서정민이 처음으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른 자식을 보는 엄마는 또 눈물이다. 이유식을 먹이기 시작했을 때는 마치 잔치라도 벌일 것처럼 좋아했다. 엄마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이 든 서정민이 천사처럼 보였다.

목요일 오후, 송재덕 과장이 회진을 끝내고는 막 수술 방에서 올라온 백무용 교수를 불렀다.

“백 교수, 정민이 어때? 밥 먹었어? 먹었지?”

“예. 오늘 아침부터 이유식을 시작했습니다. 지훈아, 별일 없었지?”

“예. 세 시간마다 분유와 이유식을 병행했는데, 아직까지는 보채지도 않고 장 소리도 좋았습니다.”

송재덕 과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똥은 쌌니? 아직 안 쌌어?”

이젠 똥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다.

“아직 똥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 쌀 때가 됐는데 왜 소식이 없지? 가 보자. 가 보자.”

두 파트가 모두 소아과 병동으로 향했다.

송재덕 과장이 백무용 교수를 보며 말했다.

“백 교수, 얘들 이래서 되겠어? 응? 확실하게 하자. 확실하게. 제대로 못하면 막 때리자, 막. 현수, 그놈도 나쁜 놈이야. 라파로 준비가 그게 뭐니? 라파로를 말이야. 대장도 안 하는 놈이. 니들은 준비 열심히 하고 있지?”

손일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김지훈에 이어 어제 두 번째 발표에 나선 신현수까지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모기 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대답을 한 손일석이 눈짓을 했다.

김지훈이 불똥이 더 튀길세라 부리나케 앞서 달렸다.

서정민의 병실에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엄마를 보며 까르르 웃던 서정민이 울먹였다. 간호사까지 하얀 가운만 아홉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으며 서정민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이구! 이놈의 자식. 얼굴에 살이 포동포동하네. 엄마, 곧 퇴원하겠어요. 잘됐네. 잘됐어. 음! 걱정이 많았죠? 이거 별거 아냐. 이제 똥만 잘 싸면 됩니다. 똥만.”

울고 있는 서정민을 보면서도 다들 웃었다.

그때 김지훈이 코를 킁킁거렸다. 서정민을 안고 있던 아이 엄마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선가 똥 냄새가 났다.

아이 엄마가 급히 기저귀를 풀었다. 서정민의 엉덩이가 온통 누런 똥으로 범벅이었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환자를 보아야 하는 사람이 의사다. 간혹 수술 후 장염이 발생하며 설사가 유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김지훈이 재빨리 청진을 했다.

꾸루루룩! 꾸루룩!

지극히 정상적인 장 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장 소리는 좋습니다.”

송재덕 과장이 크게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야! 이놈 똥 싼 거 봐라. 많이도 쌌다. 음! 타이밍이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백 교수, 이런 놈이 크게 될 놈이야. 크게. 장군이네, 장군.”

똥과 장군과의 관계는 모르지만 정말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다. 이래서 의사를 하는 모양이다. 남들은 다 더럽다고 피하는 똥을 보고도 이렇게 좋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서정민과 아이 엄마를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와 일과를 마친 후, 홍재순이 마련한 불구덩이에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2년차들의 몸에서 재가 펄펄 흩날리고 나서야 자체 집담회가 끝났다.

손일석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어후! 사방이 다 적이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타는 것 빼고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지훈아, 호치키스를 사용할 때 제일 주의할 점이 뭐야? 왜 대답을 못해. 너 조금 있으면 3년차야, 3년차. 이 정도는 테이프만 보고도 알아야지. 내일 아침까지 시간 준다. 대장을 하려면 열심히 배워야 돼. 열심히. 에이!”

“일석아, 현수야, 이 나쁜 놈들아. 니들이 왜 나쁜 놈인지 알아? 준비를 제대로 해야지. 준비를. 라파로도 모르면 어떻게 해? 서울에서 뭐 봤어? 왜 대답을 못해? 벙어리야? 꿀 먹었구나, 꿀. 에이! 나쁜 놈들. 지들만 먹었네.”

참 묘하게 태웠다. ‘에이’ 소리만 나오면 어깨를 움찔거려야 했다. 다음 단계가 바로 ‘야야야’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두려움을 승화시키면 도리어 열정으로 변하는 모양이었다. 2년차들이 헉헉거리면서도 눈에 불을 켰다.

“일석아, 현수야! 파이팅!”

“김지훈, 이 죽일 놈. 집담회만 아니었어도 이렇게는 안 탄다. 현수야, 안 그래?”

“일석아, 하기로 한 거잖아.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

신현수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지는 몰랐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주말 오프까지 다녀왔다. 고경아의 눈을 피해 물건 하나를 사느라 진땀을 뺐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드디어 1995년의 마지막 주가 왔다.

아픈 사람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여전히 수많은 환자들이 입원과 퇴원을 했다. 그 와중에도 의료용 스테이플러와 라파로가 점점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천안에서도 라파로를 시작할 것이다.

그간의 고생이 뿌듯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수술을 할 때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이면 절로 희열이 느껴지곤 했다. 머릿속이 꽉 차는 느낌 역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탄탄한 이론은 수술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보냈다. 응급실에서 밤새 난리를 치며 말이다.

보신각에서 울리는 종소리 횟수보다 환자를 더 많이 봤다.

***

1996년 1월 1일 아침이 밝았다.

응급실 앞에 서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던 김지훈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공의에게 한 해의 시작은 3월부터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각오를 다질 것이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3년차네. 올해도 열심히 살자.’

손일석에게 이른 교대를 부탁하고는 새벽같이 출발했다. 어디를 가는지 이유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날이 김지훈에게 어떤 날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일석아. 후우! 경아 씨와 만난 지도 벌써 삼 년째네. 잘해 준 것도 없는데 항상 날 사랑해 줘서 너무 고맙네요. 경아 씨,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줘요. 치프가 되면 지금보다는 시간이 많을 겁니다.’

아침 9시에 만나기로 했다.

몇 번이고 당부를 해서인지 고경아가 딱 시간을 맞춰 나왔다. 김지훈이 차를 모는 내내 고경아의 손을 꼭 잡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궁금해 죽겠다던 고경아도 말없이 김지훈만 보았다.

수원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대로를 지나 2차선으로 들어섰다. 고경아에게는 낯설지만 김지훈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틈엔가 회색빛 대리석으로 치장된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국화꽃 한 다발을 들고 나란히 걸었다.

어떤 말도 안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반짝이고 사방에 꽃이 있다고 해도 납골당은 삭막하기만 한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향냄새마저 슬프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운 이들이 보였다.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눈가를 붉혔다. 이제는 담담해질 때도 됐다는 것은 생각뿐이었다.

한동안 멍한 눈으로 그리운 이들의 사진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사람과 함께 그리운 이들 앞에 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이렇게 가슴을 꽉 차게 할 줄은 몰랐다.

“경아 씨, 제 부모님이세요. 함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지훈 씨, 저도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혹시 너무 빠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두 번의 절과 반절, 그리고 국화 한 다발.

‘어머니, 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고경아고요. 아직 경아 씨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는 못 드렸습니다. 이젠 인사를 드려도 되겠죠? 우리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젠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지만 가슴이 아프면서도 정말 행복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무사히 살아온 것은 그리운 이들의 사랑과 염려 때문이었다.

그리운 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경아와의 앞날을 축하해 주며, 격려하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리움이 북받쳤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함께 웃고 울었던 그때는 왜 소중함을 몰랐을까?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문득 시린 가슴을 못 이긴 김지훈의 눈가가 붉어졌다.

고경아가 살며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운 이들이 김지훈과 고경아를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 내음을 따라 그리운 이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이제 김지훈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속에서 놀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까닭 없이 밀려온 슬픔과 아픔이 사랑과 만났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말았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고, 소리 내 울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 겨울 산과 들이 스쳤다.

고경아가 나직한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낯설었던 풍경이 언젠가 와 봤던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아직도 눈가가 벌건 김지훈의 옆모습이 멋지게 보였다. 자신의 품에 안겨 울어 준 것이 이상하게 고마웠다.

“지훈 씨, 나 어떻게 보여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보이죠.”

그래. 그것이 사랑하는 사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해도 좋았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멋진 사람은 없다.

마른 장작처럼 불타오른 사랑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더 오래도록 서로를 아름답게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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