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58화 (358/1,329)

제3화 세상에 여유란 것이 있긴 한가? (3)

그 미소에 속으면 안 된다. 누군가는 일에 지쳐 확실히 죽게 생겼다. 이건 김지훈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모든 귀가 활짝 열리며 일제히 송재덕 과장을 보았다.

“치프들은 밤낮으로 수술실에 들어오고, 1년차들은 일이 많잖아. 그럼 시간이 제일 많은 년차가 2년차지? 지훈아, 그치? 니들이 제일 시간 많지? 내 말이 맞지?”

그럴 리가 있나?

도리어 병동과 응급실에 수술실까지, 1년차와 3년차의 중간에 껴 일이 더 많을 수도 있는 것이 천안의 현실이었다. 솔직히 시간이 제일 많은 년차는 3년차다. 이를 모를 송재덕 과장이 아니었다.

손일석이 미친 듯이 눈짓을 했다.

‘지훈아, 안 돼. 시간 없다고 말씀드려. 진짜 그렇잖아.’

송재덕 과장의 미소가 진해지다 못해 으스스하게 보였다. 신현수마저 간절한 눈길을 보냈지만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필이면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냐.’

“예, 많습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 그렇구나. 시간이 없다고 하면 다른 년차 시키려고 했는데 잘됐다. 잘됐어. 그럼 라파로하고 호치키스 발표를 니들 셋이 나눠서 하자. 좋지? 논문까지 잘 정리해서 일주일에 두 번만 하자. 두 번만. 야! 기대된다. 기대돼. 저 나쁜 놈들도 발표는 잘하겠지? 나쁜 놈들.”

송재덕 과장의 폭탄 발언으로 2년차들이 동시에 뒤로 넘어갔다. 그 무시무시한 말에 백무용 교수는 물론 박경일 교수까지 동의를 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3년차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결정이 나자마자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들 우르르 빠져나갔다. 송재덕 과장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 모습에 입맛을 다시던 송재덕 과장이 밖으로 나가다 말고 김지훈에게 손짓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과장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지훈아, 어제 서울 병원에서 준영이 봤지? 준영이.”

그새 통화를 하다니, 친하기는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예. 만나 뵙고 왔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어. 무섭다. 무서워. 사람이 말이야. 웃으면서 대화를 할 줄 알아야지. 그래도 넌 대장 하는 거야, 대장. 소아까지 말이야. 음! 간담도는 재미없다. 라파로만 배우고 그다음부터는 대장 배우자.”

김지훈이 입을 삐죽거렸다. 왜 무섭다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간담도가 재미없다는 말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송재덕 과장은 자신이 간담도 파트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입을 통해서는 아닐 테고, 아마도 이혁민 교수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장을 하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했다?

물론 자신을 아껴 준다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과 이준영 과장이 어떤 관계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결국 뒤집어 생각하면 스승의 세부 전공이 간담도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90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다. 현수야, 니가 잘못 짚었다. 스승님은 간담도를 하셨네. 이젠 내 선택만 남은 건가? 보나 마나지, 뭐.’

우워어어어어!

김지훈이 고개를 숙이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축 처졌던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갔다.

이미 간담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젠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한동안 이어진 송재덕 과장의 말도 결코 지겹지 않았다.

지훈아! 대장 하자, 대장! 소아도 하자!

세 단어가 졸졸 뒤통수에 따라붙었지만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며 의국으로 들어갔다. 손일석과 신현수가 산더미처럼 쌓인 수술 테이프와 논문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신현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량이 너무 많았다. 서울에서 구해 온 것만이 아니었다.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가 발표 잘하라며 그동안 모은 자료까지 준 것이다.

난리 났다.

손일석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탄식을 했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냐. 죽겠네. 우리는 오프도 제대로 갈 수 없는 운명인가 봐. 아니지. 저 자식이 오자마자 바로 이 난리가 났으니까 원흉은 김지훈 너였네. 죽일 놈. 어후! 지훈아,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자체 집담회는 뒤로 미뤄야겠지? 현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신현수가 슬며시 김지훈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체 집담회까지 하는 건 무리였다. 방법이 있다면 한동안 거의 1년차처럼 사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솔직히 손일석의 말에 동의하고 싶었다.

‘김지훈, 너도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

김지훈도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주일에 두 번이면 자료 발표하는데 최소한 한 달은 걸리겠지? 그럼 자체 집담회를 할 시간이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잖아. 그때도 일이 생기면 또 미뤄?’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입을 열었다. 기본을 충실히 쌓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난 자체 집담회까지 한다에 한 표. 무리긴 하지만, 한 번 미루기 시작하면 결국 끝까지 미루게 될 거야. 우리 일이 한 달 후에는 줄어들겠어? 그때 다른 일이 또 생기면?”

“지훈아, 이것도 공부야, 인마.”

“맞아. 새로운 분야지. 그런데 우린 불행히도 기존의 지식까지 부족하잖아. 3년차 되면 지금보다 더 쉽게 공부할 수 있을까? 일석아, 현수야, 우리 평일 오프 포기하고 한번 죽어 보자. 길어야 한 달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우리 함께 달리자. 최고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손일석이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지훈아, 생각 좀 해라. 그렇게 되면 월화수목 내내 발표할 준비를 해야 되잖아. 그렇다고 금요일은 쉴 수 있어? 주말에 당직이면 시간 없을 거 뻔하고, 결국 금요일에도, 아니 재수 없으면 주말까지 월요일 발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소리야. 그래도 삼 주에 한 번은 마음 편하게 오프 가야지. 지훈아, 우리 2년차다. 조금만 쉬자. 현수야, 넌 어떻게 생각해?”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갈등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심 손일석의 말에 십분 동의를 하면서도, 김지훈은 한다고 하면 하는 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들다고? 그럼 조금이라도 편한 방법을 찾아야지.’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럼 자체 집담회는 지금처럼 나랑 홍재순 선생님하고 다 준비할 테니까 니들은 참석만 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부분들이니까 토론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손일석이 입을 쩍 벌렸다. 신현수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김지훈만 보았다.

“지훈아, 할 수 있겠어?”

“해 봐야지. 무리가 오면 머리나 몸이 알려 주겠지. 나도 예전처럼 무식하게 달려들지는 않아. 만일 일하는 데까지 지장이 생기면 덜 급한 걸 포기해야지. 어쨌든 난 이것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봐.”

신현수가 이마를 주물렀다.

‘우리의 능력을 키울 기회라고? 정말 우리가 한 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야? 아니지. 내가 지금은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지. 지훈이를 이기려면 다른 방법이 없잖아.’

반드시 이기고 싶은 라이벌이다. 이제는 편법이 아니라 불같은 경쟁과 노력으로 이기고 싶었다. 김지훈의 말대로 자체 집담회 준비에서 빠진다면 뒤처질 것이 빤했다. 더 이상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좋아. 나도 달린다. 집담회 준비까지 할게.”

김지훈이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말에 그대로 동의한 적이 없었던 신현수였다.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개는 삐딱 선을 탔다. 이번에도 역시 손일석이 먼저 동의를 하고, 신현수가 말없이 따라오기를 바랐다. 이유야 어찌 됐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케이! 한 명 추가.”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기자 손일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3명 중 2명이 찬성했다. 혈관 분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김지훈과 신현수는 여전히 최고의 라이벌들이었다.

“에휴! 내가 니들 때문에 못산다. 왜 인생의 즐거움을 이렇게 쉽게 버리냐. 연애도 하고, 술도 먹고, 때론 나이트 가서 스트레스도 확 날려 버려야지. 버릴 건 버려 주세요. 제발.”

“그래서 넌 빠지겠다는 거야?”

“제길! 하필이면 왜 내 승부욕이 활활 불탈 때 이런 일이 벌어져. 니들이 나 앞서는 거 못 본다. 이 형이 선두에 서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안 들어? 내가 앞서 달리마.”

손일석이 팔을 쭉 뻗다 말고 픽 쓰러졌다.

“결국 내가 미쳐 가는구나.”

김지훈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때 의국 문이 조용히 열렸다. 홍재순이었다.

“지훈아,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이걸 언제 다 검토를 하고, 준비를 하냐. 근데 왜 아직 정리도 안 했어? 이렇게 되면 당분간 자체 집담회는 이제 힘들겠지?”

“지금처럼 하기로 했습니다.”

홍재순이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시간이 돼?”

“혼자 하면 무지 힘들었을 텐데, 자식들이 집담회도 같이 준비하자고 하네요. 크게 힘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말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2년차들이었다. 신현수에게 먼저 사과를 받았을 때보다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일반 외과에 미친놈들이었다.

‘이런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확실한 꿈이 있어서겠지? 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아랫년차들이지만 함께하고 싶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스스로 더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었다. 더구나 눈앞에 그 수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도와줄까?”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우리야 좋죠.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에 끝날 일도 아니고, 주중에는 거의 매일 매달려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평일 오프 안 가면 되잖아. 천안에는 아는 사람도 없어.”

3년차, 아니 치프가 오프를 안 간다고 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는 예감과 함께 큰 도움을 얻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준비해야 할 일이 줄어드는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더욱 깊게 알 수도 있는 기회였다.

김지훈이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야! 분위기 좋네요, 선생님. 기분도 좋은데 우리 커피 한잔할까요? 제가 사 오겠습니다.”

“좋지.”

김지훈이 재빨리 슈퍼로 달려갔다. 헉헉거리며 돌아온 순간 입을 쫙 벌리고 말았다.

홍재순의 손에서 논문이 날고 있었다. 제목과 요약만 보고도 거침없이 분류를 했다.

역시 이론의 최강자, 홍재순이었다.

손일석과 신현수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나 홍재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도리어 2년차들에게 배워야 할 부분인지도 몰랐다.

수술용 테이프!

라파로는 그나마 여러 번 보았기에 설명은 물론 논문 내용과 어울리는 부분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대장 수술용 스테이플러는 생소하기만 했다.

4명이 함께 테이프를 보기 시작했지만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한 명씩 사라졌다. 누군가 들어오면 누군가 또 나갔다.

2년차들에게 정말 여유는 없는 것일까?

쏜살처럼 시간이 흘렀다. 평일에는 물론 주말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월요일 발표는 일 벌인 놈이 먼저 해야겠지?”

주말 당직이라 가뜩이나 일이 많은데 손일석의 말에 첫 번째 발표까지 맡았다. 병동과 응급실을 뱅뱅 돌며 시간만 나면 발표 준비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판이었다.

그러나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곳은 따로 있었다.

서정민이었다.

말도 못하는 아이가 수술 후 5일째까지 물도 못 먹었다. 수술 전까지 따지면 벌써 8일이 넘었다. 아직도 코에 줄을 끼고 있었다. 수술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어른도 참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너무 어려 무통 처치도 할 수 없었다.

병실을 찾아갈 때마다 울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보면 거의 자지러졌다. 울다 울다 지쳐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나마 한두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그만큼 아프고 힘들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잔 아이 엄마의 얼굴이 핼쑥하기만 했다.

발표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물끄러미 창밖을 보았다.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해 정말 짧아졌네. 후우! 오늘 밤은 무사히 넘어가려나? 그럴 리가 없지. 환자 몰려오기 전에 정민이부터 보고 와야겠다. 가스가 왜 안 나오는 거야? 이러다 엄마까지 쓰러지겠네.’

장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방귀부터 나온다. 건장한 사람들 같은 경우 대장 수술을 해도 일주일이면 방귀를 낀다. 아이들은 회복이 더 빨랐다. 그런데 서정민은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장이 돌아오고 있다는 첫 신호인 장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너무 아파서 그런 걸까? 걷지도 못하는 아이기에 운동이 부족해서 그럴까?

아직 장 기능이 미숙해서 그럴까? 아니면 선천성 거대 결장이기 때문일까?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김지훈이 어두운 얼굴로 소아과 병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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