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57화 (357/1,329)

제3화 세상에 여유란 것이 있긴 한가? (2)

뭔가 잘못됐다.

“김지훈, 너 벌써 내 말 잊었어? 이제 2년차인 놈이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세부 전공에만 관심을 두면 어떻게 해? 일반 외과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니가 무엇을 택하든 아직은 기본을 확실하게 다져야 할 때라고 분명히 말했다. 기억해?”

목소리까지 변했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이렇게 말이 긴 사람도 아니었다.

“너 혹시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나다고 우쭐대는 거야? 일반 외과는 어느 과보다도 기본이 중요하다고 했지. 지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혼이 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지금도 세계 학회 때 나눈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은 분명 세부 전공보다 기본을 몇 배 더 강조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팔짱을 낀 채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의 전공에 신경을 쓰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다 말고 스승이라고 했을 것이다. 세부 전공에 대해 고민할 때도 됐다. 그러나 기본이 탄탄하지 않으면 무엇을 택하든 대가가 될 수는 없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세부 전공은 정말 네가 하고 싶은 분야를 택하면 돼. 널 가르칠 교수들은 많아.”

“명심하겠습니다.”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김지훈이 아니었다면 목소리를 높일 이유도 없었다. 때가 조금 빠르고 느리냐는 하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꿈이 무엇인지 알기에,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있기에 성급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스승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허경발 명예 교수도 그랬다. 어쩌면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렇지, 더 호되게 혼났을지도 몰랐다.

‘지훈아, 천안 병원의 일이 만만치 않을 텐데 빨리 가서 쉬는 게 좋겠다. 녀석! 내가 무엇을 했는지 그렇게 궁금해?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혹시 너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은 네 몫이야.’

아쉽지만 이제 가 보라는 말을 하려던 이준영 과장이 갑자기 눈가를 찌푸렸다. 갑자기 찾아와 하마터면 중요한 말을 잊을 뻔했다.

“1월 1일에 뭐 해?”

난데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김지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경아 씨와 만나 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이준영 과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항상 밝은 탓에 김지훈에게 피붙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을 굳힌 거야?”

“예. 아직 정식으로 묻지는 못했지만 제게는 과분한 사람입니다. 끝까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경아도 같은 마음일 거야. 둘이 잘 어울려. 축하한다. 그러면 그날 서울에는 몇 시에 돌아와?”

“확실하게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수원에 들렀다 오는 거라서 늦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럼 다섯 시까지 병원 앞으로 와. 스승님께 인사 가자.”

순간 이해가 되지 않은 김지훈이 눈만 멀뚱멀뚱 떴다.

스승님이 스승님이라고 부른다면?

“설마 허경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말씀이신가요?”

“내게 스승님은 단 한 분뿐이야. 그렇게 알고 가 봐. 늦었다. 송재덕 선생님께 안부 전하고.”

함께 신년 인사를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더구나 일반 외과의 대가이자 큰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허경발 명예 교수였다.

김지훈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펄쩍펄쩍 뛰며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숨이 가빠 말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스승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 일어선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만 끄덕였다.

‘녀석! 선생님이면 선생님이고, 스승이면 스승이지. 내가 너무 혼을 냈나?’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김지훈이 문을 열려는 순간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간담도는 생각보다 어렵다. 열심히 해. 길이 어둡다. 운전 조심해라.”

김지훈에 대한 염려와 정이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운전 조심하겠습니다. 어? 가만, 간담도는 어렵다고 하셨나? 이건 그냥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스승님도?’

주춤거리던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태울 때를 빼고는 대개 단 한마디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스승이었다. 휙휙 돌아가는 머릿속은 분명 스승의 세부 전공이 간담도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입이 쫙 찢어진 김지훈이 막 말을 하려다 말고 또 멈칫거렸다. 오늘도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 말은 단순히 전공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중간에 자신도 모르게 스승님이라고 불렀을 때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했다. 이제는 확실히 스승과 제자다. 단둘이 있을 때는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이 힘차게 외쳤다.

“스승님, 1월 1일에 뵙겠습니다.”

응급실의 더운 공기가 밀려들어 오다 사라졌다.

‘스승님이라는 소리가 점점 듣기 좋네. 그나저나 저놈이 오기 전에 일이 잘 풀려야 간담도를 가르칠 수 있을 텐데.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지만 점점 욕심이 더 나는군. 저놈 때문인가?’

이준영 과장이 소파 옆에 놓인 캔 커피 한 박스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비싸고 맛난 음식이라도 제자가 준 커피보다 달고 맛있지는 않았다.

아니다. 이제는 제자에 한 놈 더 추가다.

뒷좌석에 가방을 싣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불과 3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스승과의 대화는 항상 그랬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오늘은 가슴 떨리는 말까지 들었다.

‘후우! 간담도를 하신 게 틀림없어.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공부하자. 그래야 무엇을 택하든 스승님께 배울 자격이 생기겠지? 허경발 선생님께 신년 인사까지 가자고 하시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아직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경아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준비가 안 됐다고 8시 반에 데리러 오란다.

무엇 때문인지 대충 짐작은 갔다. 어쨌든 한 시간이나 남았다. 이럴 때 미리 가서 꽃 한 송이 들고 기다리고 있으면 엄청 좋아할 것이다.

‘에휴! 화장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리나? 그냥 봐도 예쁘기만 한데 대충 찍어 바르고 나오지. 그래도 나름 좋은 기회지? 점수나 따자.’

그때 가방을 둘러멘 본과 4학년들이 보였다.

‘아! 국가고시가 다음 달이지? 얼마 안 남았네. 혁원이! 혹시 이 자식이 지금 병원에 있으려나?’

병원에 딸려 있는 본과 강의실로 향했다.

한 송이 꽃이 스르르 사라지고 있었다.

김지훈을 알아본 본과 4학년들이 깜짝 놀라며 인사를 했다. 이제 곧 인턴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김지훈은 하늘보다 더 높은 선배였다.

이혁원을 찾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움직였다.

이혁원이 급히 달려 나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웬일이세요. 구미… 아니구나. 천안 근무 아니세요?”

“응, 맞아. 일이 있어서 잠깐 올라왔다가 니 생각이 나서 들렀어. 준비는 잘되어 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국가고시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학력고사 보는 것처럼 죽자 사자 공부하면 다 돼. 쉽지?”

농담 같은 진담에 이혁원이 크게 웃었다.

‘구미에서보다 훨씬 밝아졌네. 그럼 스승님과의 문제가 잘 해결됐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 거지? 보기 좋다. 부럽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밝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간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여기까지가 딱 좋았다. 이혁원이 스스로 얘기해 준다면 모를까, 더 자세히 알려고 애를 쓸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간다면 두고두고 궁금할 것이다. 김지훈이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나도 여기서 공부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 년이나 됐네. 혁원아, 너 상당히 좋아 보인다. 좋은 일 있었어?”

“좋은 일은요. 그냥 사는 게 즐겁습니다.”

“자식! 노인네 같은 말을 하고 있어. 그럼 인턴은 우리 병원에서 하는 거지?”

이혁원이 씨익 웃었다.

인턴이란 말속에 김지훈의 궁금함이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예, 선생님. 어쩌면 외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어쭈! 이것 봐라? 확실하네. 아버지가 일반 외과 의사 중의 의산데 당연히 그래야겠지.’

“의사나 되고 얘기해, 인마. 하하! 우리 과 하면 많이 가르쳐 줄 준비는 언제든 돼 있어. 하지만 그만큼 아프겠지?”

이혁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다니요?”

‘내가 거의 90퍼센트를 타면서 배웠어. 누구한테 그렇게 탔는지는 집에 가서 물어봐. 넌 나랑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면 죽었다고 복창하는 게 좋을 거다.’

스승에게 타며 배운 것을 그대로 이혁원을 태우며 가르친다? 제자는 스승보다 발전해야 하는 법이었다. 더욱 살벌하게 태울 자신도 있었다. 더구나 내년이면 3년차다.

왠지 상상만으로도 너무 즐거웠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그런 게 있어. 하여튼 공부 열심히 하고 내년에 보자. 이왕이면 인턴 때부터 나랑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면 좋은데 말이야. 어때?”

“어휴! 선생님, 그러면 저도 좋죠.”

이혁원이 속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김지훈도 따라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차팅, 수처, 비지에이, 코 줄, 소변 줄. 아이구! 처음부터 태울 거 정말 많네. 흐흐흐!’

벌써부터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태울지 구체적으로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김지훈은 스승을 위하는 만큼 이혁원도 아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물론 표현은 배운 대로 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였다.

***

고경아와 함께 종로로 갔다.

비록 얼굴을 맞댈 수는 없지만 부모님께 인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고경아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웃는 모습에서도, 찡그린 콧등에서도, 사소한 손짓 하나에서도 사랑이 느껴졌다.

누가 일부러 시계 침을 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버텼다. 그러나 심부름과 일은 별개였다.

내일 아침에 제대로 일을 하려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째깍째깍 초침 소리에 초조함을 느낄 때까지 함께했다.

“경아 씨, 주말 오프 때 봐요. 그리고 1월 1일 아침에 올라올 거니까 잊지 말아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궁금해 죽겠네.”

“나쁜 일은 절대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나 잘하세요.”

12시가 훌쩍 넘었다. 부리나케 고경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물론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동차라는 것이 꼭 어딘가를 데려다주는 도구만은 아니었다.

때론 한겨울의 추위만이 아니라 환한 빛과 남들의 시선까지 훌륭하게 가려 주기도 한다. 김지훈도 당연히 자동차의 효용성을 극대화시켰다. 고경아와 아쉬운 작별을 한 후에도 입 안 가득 감도는 달콤한 향기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떤 걸 사지? 경아 씨 마음에 들까?’

김지훈만이 아는 즐거운 상상이 이어졌다.

그 대가는 참으로 썼다.

새로 입원한 환자들을 파악하고 나니 새벽 3시가 넘었다. 다행히 한 사람이 공적인 일로 빠졌다고 홍재순이 자체 집담회를 연기했다. 그런데 눈이 거의 감긴 안호석이 복사물 하나를 건넸다.

“홍재순 선생님이 꼭 읽어 보시라고 하던데요.”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수술할 환자에 대한 내용이었다. 홍재순이 직접 작성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찬물에 세수까지 해 가며 졸음을 쫓았다. 복사물을 덮던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90퍼센트 이상 정확해진 스승의 세부 전공.

허경발 명예 교수님께 함께 드리는 신년 인사.

스승과 이혁원의 화해.

이제는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 고경아와의 데이트.

홍재순과 안호석의 마음.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지만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당직도 아닌 날에 불과 2시간 정도밖에 못 자겠지만 피곤하지가 않았다. 물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천근만근이었지만 말이다.

목요일도 무사히 하루의 일과를 마쳤다. 송재덕 과장이 교수들은 물론 전공의까지 모두 소집했다.

“지훈이가 준비를 아주 잘해 왔네. 잘했다. 잘했어. 그럼 이번 주는 자료 정리 좀 하고,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하자.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음! 내 생각에는 말이야.”

가뜩이나 일이 많은 천안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술도 모자라 새로운 부분에 대한 준비까지 맡으면 말 그대로 죽음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 확실한 1년차들까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전공의들을 쓰윽 둘러본 송재덕 과장이 동네 아저씨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