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56화 (356/1,329)

제3화 세상에 여유란 것이 있긴 한가? (1)

백무용 교수의 수술이 모두 끝났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이 또 수술 방에 나타났다. 그것도 딱 김지훈이 회복실에서 오더를 내고 있을 때였다.

“지훈아! 오늘 수술 잘 끝났지? 재순이가 이제는 치프야, 치프. 그치? 그렇지?”

“예, 선생님.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백 교수가 말 안 했어? 너 내일 서울 가야지, 서울. 간 김에 이것도 있으면 찾아와. 지훈아, 이제는 손만 빠르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야. 기계를 다룰 줄 알아야 돼, 기계를. 나이 먹은 사람은 의사하기도 힘들다. 힘들어.”

송재덕 과장이 혀를 차며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의료용 스테이플러(Stapler)라는 생소한 글자가 보였다.

“선생님, 이게 뭡니까?”

“나도 잘 몰라. 그러니까 찾아오라고 하지. 의협에는 있을 거야. 호치키스로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호치키스를 사람한테 왜 써? 원! 어렵다. 어려워. 지훈아, 대장 하자, 대장.”

다소 어지러운 말이었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대장 수술에 쓰이는 의료용 스테이플러에 대한 자료와 수술 테이프가 있으면 모두 찾아오겠습니다.”

송재덕 과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가끔 3년차들은 물론 눈치 빠른 손일석조차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곤 했다. 그런데 근 1년 만에 천안에 온 김지훈이 딱딱 알아들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니가 지훈이지? 지훈이. 암! 사람은 이래야 돼. 말을 하면 딱딱 알아듣는 맛이 있어야지 말이야. 일석이, 현수, 이놈들은 안 돼. 대장을 안 해? 에이! 나쁜 놈들.”

왜 지금 나쁜 놈들을 찾는지 몰라도,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다. 김지훈이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짓자 송재덕 과장이 등을 툭툭 두드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그날 저녁, 백무용 교수와 챙길 것들을 점검했다.

“내일 오전 일과 끝나면 바로 출발해. 그리고 오십만 원 줄 테니까 테이프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 밥 먹고 와. 아! 너 차 있다고 했지? 아마 기름 값까지 될 거다.”

우와! 50만 원이다.

다 써도 된다는 말은 아닐 테지만, 저녁 한 끼 먹을 돈은 넉넉하게 남을 것이다.

김지훈이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경아 씨,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 나 서울 갑니다.”

(정말이요? 평일인데 어떻게 올라오세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내일 얘기해요. 일곱 시에…….”

김지훈이 잠깐 말을 끊었다. 서울 병원에도 들르는데 스승인 이준영 과장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일곱 시에 스승님께 인사부터 드려야 하니까 일단 밥 먹지 말고 집에 있어요. 저녁 뭐 먹을지 미리 생각해 놔요.”

일거양득이었다.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거기까지였다. 응급실에 이어 양방이 벌어진 탓에 수술 방까지 달려가 손을 보태야 했다. 새벽까지 말이다.

3년차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천안이었다. 당연히 세컨이었고, 배를 닫을 때만 퍼스트를 섰다. 이런 날은 정말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3일 중 하루는 마음 놓고 잘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오전 일과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차를 몰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손일석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ECU고 배터리고 엔진 오일이고 뭐고, 그런 문제는 조용히 접는 게 맞았다.

“일석아, 잊고 있었다. 계좌번호 좀 불러.”

“갑자기 계좌는 왜?”

“차 값 줘야지. 백. 만. 원.”

그래도 생각은 나는지 백만 원이라는 소리를 할 때는 또박또박 힘을 주고 말았다.

손일석이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형이 요새 돈이 좀 궁하다만 너한테 그걸 어떻게 받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몰고 다녀.”

“그런 게 어디 있어. 빨리 말해. 오늘 중으로 보낼게.”

“마음은 고맙다만 운이 없었으면 두세 번 말썽이……. 아! 아니다. 똥차를 두고 친구끼리 무슨 돈을 주고받아? 됐어. 너 눈 뻘건 거 보니까 피곤한 모양인데 운전 조심해라.”

두세 번의 말썽이라!

손일석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고 있었다. 똥차라는 말을 공연히 한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쓰윽 매서운 눈초리를 주다 말고 웃었다.

“알았으니까 잊지 말고 계좌번호나 써 놔.”

“됐다니까 왜 자꾸 그래. 우리 사이에 무슨 돈이니. 지훈아, 그냥 이 형의 마음으로 알고 잘 몰고 다녀. 나도 니 마음만 받을게.”

손일석의 다소 어색한 표정을 뒤로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차를 몰고 뻥 뚫린 평일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역시 웃길 잘했다.

일단 굴러가면 차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서울에 도착했다.

의사 협회는 동부이촌동에 있다. 위치도 애매모호한 데다 가는 길이 상당히 복잡했다. 고개를 빼며 한참을 찾은 끝에 간신히 도착해 학술부를 찾았다.

“라파로 수술 테이프하고 대장 항문에 사용되는 스테이플러 사용 방법에 관한 테이프를 구하러 왔습니다.”

생각보다 필요한 테이프가 많았다. 도합 12개였다. 의협은 자선단체가 아니었다. 테이프를 공짜로 주진 않는다. 가격을 물어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혹시 열두 개나 사는데 안 깎아 주시나요?”

사무직원의 눈이 번쩍였다.

“공부하려고 사는 건데 깎으시면 안 되죠. 머릿속에 안 들어오실 겁니다. 도합 사십팔만 원입니다.”

멋진 말이었다. 꼼짝 없이 다 내야 했다. 달랑 2만 원을 손에 든 김지훈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하여튼 이 동네는 싼 게 없어요. 원서도 우라지게 비싸더니, 수술 테이프 하나에 사만 원이 뭐야? 얼라? 이건 또 뭐냐? 비매품이네.’

설마 직원이 삥땅을 친 것은 아닐 것이다. 의협이 어려운 건지, 원래 돈을 주고 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백무용 교수가 돈을 줬으니 돈 내고 사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의협을 나온 김지훈이 심호흡을 했다.

서울 공기는 텁텁했지만 평일 이 시간에 외부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일종의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했다.

서울 병원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경아 씨, 맛있는 거 먹읍시다. 스승님, 제가 갑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외래를 찾았다. 금경태 과장은 물론 이혁민 교수도 수술 중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박다 말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제야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후!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간만에 스승님을 뵈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오늘이 수요일이냐. 괜히 경아 씨 만나는 시간만 늦어졌네.’

다행히 미리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백무용 교수에게 필요한 것들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수술 테이프만 해도 10개나 됐다. 이 정도 양이면 그 안에 자신만의 노하우까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외래에서 나와 논문을 찾으러 가던 김지훈이 가자미눈을 떴다.

‘백무용 선생님이 금경태 과장과 친분이 깊으신가? 그게 아니면 이 정도로 신경을 쓸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세부 전공이 같아서 그런가?’

정신이 산만해서는 논문을 제대로 찾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친 김지훈이 논문을 검색했다.

라파로에 관한 논문이 의외로 많았다. 어느새 출력하거나 복사한 논문들로 가방이 뚱뚱해졌다. 덤으로 송재덕 과장은 호치키스로 표현하는 의료용 스테이플러에 관한 논문까지 찾았다.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이쿠! 꽤 무겁네.”

낑낑대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준영 과장의 당직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근무 날이 아니면 창문이 환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어느 병원이나 외래가 끝나면 응급실은 항상 바빴다. 아픈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었다. 반가워하는 간호사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당직실 문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이! 계실 리가 없지.’

김지훈이 멍청히 남은 손에 들린 캔 커피 한 박스를 보았다. 이왕 사 온 커피다. 스승의 얼굴은 못 보지만 마음은 두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김지훈이 헛바람을 삼켰다. 이준영 과장이 떡하니 책상에 앉아 있었다. 놀란 것은 놀란 것이고, 스승이 눈앞에 있었다. 급히 가방과 커피를 놓은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눈가가 살짝 흔들린 이준영 과장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힐끗 눈길만 주었다.

“너 여기 웬일이냐? 오늘 근무 안 해?”

제자가 갑자기 찾아왔는데 반갑지도 않은가?

참 무뚝뚝한 사람이다. 반가워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놀란 표정이라도 짓는 것이 보통 사람이다. 그런데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야! 이럴 땐 정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네. 정말 아무 느낌도 없으신 건 아니겠지?’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일어나 냉장고에서 커피 하나를 꺼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돌아서는 순간 사라졌다.

“커피 마셔. 왜 왔어?”

그렇다. 이준영 과장은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커피 하나로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통했다.

김지훈이 슬며시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심부름 왔다가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선생님, 오늘 수요일인데 출근하셨네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이번 달부터 금요일에 쉬기로 했다. 무슨 심부름이야?”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이준영 과장의 체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이가 있다. 일주일에 고작 하루를 쉬어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후우! 조금만 더 지나면 벌써 일 년이 다 돼 가네. 내가 빨리 전문의를 따서 응급실 근무를 자청이라도 해야겠다. 그런데 갑자기 쉬는 날을 왜 바꾸셨지? 혁원이 문제는 잘 해결하셨을까? 마음이라도 편하셨으면 좋겠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조심스럽게 이준영 과장의 얼굴을 보았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곁눈질을 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전과는 분명 달랐다. 눈가에 드리워졌던 어두운 그림자가 확실히 사라졌다. 지금은 뭔가 편안해 보이면서 즐거움까지 엿보였다.

김지훈이 아는 한 이준영 과장을 행복하게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 마음까지 설레었다.

‘와우! 혁원이랑 잘되신 건가? 스승님이 이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확실해. 다른 사람의 눈을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십니다.’

섣부른 추측일지 모르지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김지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 주름이 걸렸다. 눈길은 불룩하게 배를 내민 가방에 쏠려 있었다.

이런! 대답이 늦었다.

“천안도 곧 라파로를 시작하신답니다. 송재덕 과장님도 대장 파트와 관련해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스테이플러라는 걸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서울에 온 이유를 자세하게 말하고 나자 이준영 과장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모든 교수들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응급실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 스승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괜히 말씀드렸나?’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하지만 네겐 도리어 좋은 기회야. 열심히 배워. 아! 송재덕 선생님은 잘 지내시지?”

표정이나 목소리나 방금 전과 똑같았다. 스승의 속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예. 항상 똑같으십니다.”

“파트가 다르지만 송재덕 선생님에게도 열심히 배워.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은 분이다.”

“예, 선생님. 그런데 자꾸 대장 파트를 하라고 그러시네요.”

김지훈이 슬쩍 이준영 과장의 눈치를 보았다. 세부 전공에 대한 말이 나온 이상 최소한의 반응이라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님, 이놈은 간담도 할 놈입니다. 전화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늦었다. 다 마셨으면 가 봐.”

역시 이준영 과장이었다. 정말 변함이 없는 스승이었다.

할 말만 딱 끝내고 가란다.

항상 그런 줄 알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이준영 과장도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앉아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김지훈이 쉴 수 있는 시간은 밤뿐이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쉬는 시간만 줄어들 것이다.

‘녀석! 눈을 보니까 잠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여유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자라. 서울에 올라오면 보자.’

한숨을 푹푹 내쉰 김지훈이 가방을 잡다 말고 눈을 반짝였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물어보아야 했다.

“스승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세부 전공으로 위장관을 하셨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궁금하기도 하고, 제 진로도 곧 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쯤이면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순간 이준영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김지훈의 얼굴도 굳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