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54화 (354/1,329)

제2화 새로운 배움 (1)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아침부터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뭔가를 기다리다 말고 눈을 번쩍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왔다. 인턴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소아과에서 보낸 컨설트 용지를 두고 갔다.

서정민의 수술 여부에 대한 의뢰였다. 마지막에 적힌 글자에 눈이 확 쏠렸다.

To Prof. 송재덕.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김지훈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에휴!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과장님에게 의뢰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시간에 잠이나 잘걸.’

선천성 거대 결장 수술은 상당히 보기 힘든 수술이었다. 백무용 교수가 소아외과를 맡았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고 자체 집담회에서 발표할 준비까지 했다. 오프에서 돌아온 홍재순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밤이 늦도록 함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송재덕 과장에게 의뢰를 한 것이다.

손일석이 아직도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얄미워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수술을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전공의에게 어시스트를 서는 것과 참관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회진이 시작됐다. 반대 방향으로 가던 손일석이 손을 흔들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얄미웠다.

그런데 회진을 마치고 병동 스테이션으로 돌아왔을 때 송재덕 과장이 컨설트 용지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백 교수, 가자. 가자. 환자 보자. 컨설트 보러 같이 가자. 지훈이 니가 발견했지? 잘했다. 잘했어. 허허! 니가 지훈이지? 지훈이.”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정준석이 있을 때 대장 조영 사진을 봤을 뿐인데 이미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 알고 있었다. 말투와는 정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두 파트가 모두 간다?

분위기가 뭔가 묘해졌다.

우르르 소아과 병동에 도착했다.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가 서정민의 상태를 살핀 후, 보호자에게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하겠다는 말을 했다.

잠시 후, 소아과 교수와 만난 송재덕 과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조 교수, 우리 백 교수가 소아외과야, 소아외과.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컨설트 내면 안 돼. 정민이? 정민이 맞지? 상태 좋을 때 빨리 수술하자. 내일 할까? 내일? 백 교수, 어때?”

백무용 교수가 잠시 고민을 했다. 이미 잡혀 있는 정규 수술이 세 건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장염조차도 위험한 질환이 바로 선천성 거대 결장이었다. 송재덕 과장의 말대로 서정민의 상태가 좋을 때 빨리하는 것이 도리어 안전했다.

“조 교수님, 수술하는 데 우려할 만한 사항은 없습니까?”

“다행히 지금 상태가 아주 좋아요. 외과 문제만 없다면 바로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첫 번째로 수술하겠습니다. 전과해 주세요. 김지훈, 수술 준비 잘해.”

“예, 선생님.”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됐다. 김지훈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고, 손일석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수술 욕심 하나만은 정말 비등비등했다.

잠시 후, 백무용 교수가 다시 서정민을 찾았다. 수술 방법과 향후 문제를 듣던 아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단순한 변비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병이었나요? 미안해서 어쩌죠. 우리 정민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어쩌죠.”

엄마의 자책과 슬픔에 모두 말을 잃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 바로 수술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백무용 교수가 몇 번이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는 외래로 향했다. 소아용 코 줄과 비닐 주머니를 든 김지훈과 간호사만 남았다.

“어머니, 저 기억나시죠?”

아직도 눈물을 감추지 못하던 아이 엄마가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 슬픔은 그대로였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정민이 병을 알았는데 왜 모르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수술만 받으면 우리 정민이 건강해지겠죠?”

아이 엄마의 웃음이 왜 이리 슬플까?

고맙다는 말이 왜 이렇게 아플까?

아픈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도 모르고 수술 욕심을 냈던 것이 내심 부끄러워졌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며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아이에게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 남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김지훈이 비닐 주머니를 아이의 고추 주변에 붙였다.

“아이가 소변을 볼 때마다 버리지 마시고 간호사에게 가져다주세요. 소변을 잘 보는 것이 무척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지금 정민이 코에 이 줄을 끼울 겁니다. 코 줄을 끼고 있는 동안은 많이 보채고 힘들어하겠지만, 가스가 많이 차면 수술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술 후에도 문제가 되니까 잡아 빼지 않도록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간호사가 서정민의 머리를 잡았다. 손발을 잡은 엄마가 차마 볼 수가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김지훈이 코 줄을 잡았다. 성인용 코 줄은 굵지만 부드럽다. 반면 소아용 코 줄은 따로 만들어진 것이 없어 딱딱하고 가는 수액 연결 줄을 대신 사용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는 단단한 것이 더 유리했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코 줄을 밀어 넣었다.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치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렸다. 6개월 된 아이가 고통을 호소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아이 엄마가 울음을 터트리며 달래려 했다. 김지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손발을 꽉 잡고 계세요. 엄마가 힘들어하면 아이는 더 아프고 힘듭니다.”

협조가 가능한 성인에게 하는 방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오로지 감각과 신중함만이 필요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코 줄을 넣을 수 있었다. 주사기로 공기를 밀어 넣으며 코 줄이 위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김지훈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머니, 다행히 잘 들어갔습니다. 만일 정민이가 잡아 빼면 다시 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수술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절대 손이 가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꼭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품에 안겨 옷을 꼭 잡고 있는 아이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보였다. 테이프로 단단히 코 줄을 고정했지만 아이가 잡는 순간 바로 빠질 것이다. 간호사와 엄마가 주의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때 두툼한 털실로 만든 조그맣고 빨간 벙어리장갑이 보였다. 엄마의 사랑이 잔뜩 담겨 있을 그 장갑이 도움이 될 것이다.

김지훈이 아이의 양손에 벙어리장갑을 끼웠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코 줄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낫겠네요. 그래도 모르니까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그럼 이따 저녁때 다시 오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정민이가 조금이라도 안 좋은 것 같으면 간호사에게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이 엄마에게 신신당부하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다시 일상적인 일이 시작됐다. 틈틈이 서정민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모든 일과가 끝났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천안의 특성상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2년차 중 한 명은 거의 잡혀 있어야 한다. 시간이 허락할 때 자체 집담회를 해야 했다. 오늘은 보기 드문 선천성 거대 결장을 준비해 김지훈의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그런데 연락도 하기 전에 손일석과 신현수가 이미 의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홍재순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신현수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린 것 같았다.

“좋은 일 있으세요? 일석이만 빼고 다들 표정이 좋네요. 오늘은 아까 말한 대로 선천성 거대 결장에 관해 토론을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환자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홍재순이 곧이어 질환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어젯밤에 부랴부랴 만든 복사물이었지만 내용은 상당히 알찼다.

수술 방법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선천성 거대 결장의 수술 원칙은 간단했다. 부교감 신경절의 결손이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정상적인 대장을 이어 주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었다.

One step or Two step operation.

한 번에 하느냐, 아니면 두 번에 걸쳐 하느냐.

이것이 상당히 큰 논점이었다.

전통적인 방법은 두 번에 나눠서 수술을 했다. 일단 인공 항문을 만들고, 수개월 후 남은 대장의 기능이 정상적인지 충분히 확인한 후 대장을 이어 주는 것이다. 보다 확실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아이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최근에 대두하기 시작한 방법은 원 스텝이었다. 한 번에 하면 아이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무척 적다. 하지만 만일 부교감 신경절 결손 부위가 남는다면 결국 재수술을 하거나, 혹은 평생 동안 기능 장애를 겪을 수가 있었다. 이 역시 위험도가 증가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떤 방법이 더 좋을까?”

홍재순의 물음에 김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육 개월 정도 된 아이라 육안으로도 결손 부위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수술 도중 생검으로 신경절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확실히 제거할 가능성이 크고요. 두 번 수술하는 부담을 안느니 원 스텝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과감한 거 아닌가? 육안은 물론 임시 생검으로도 신경의 분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잖아. 신경 몇 개 보인다고 기능이 100퍼센트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난 투 스텝이 좋을 것 같은데.”

“신생아라면 모르지만 육 개월이면 그래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두 번을 한다고 해도 애초에 투 스텝으로 결정한 것과 결과는 같잖아. 난 과감하게 원 스텝으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에이! 그래도 교과서대로 하는 게 좋지. 현수야, 넌 어떻게 생각해?”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신현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원 스텝으로 하는 게 좋다고 봐.”

“어라? 너도? 이유가 뭐야?”

신현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치 말하기 껄끄러운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신현수가 홍재순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먼저 사과까지 했는데 뭘 망설이는 거야?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고 몇 번을 다짐해야 하지? 정신 차리자.’

“지훈이 의견과 같아.”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같은 말을 반복했으면 했지, 자신과 의견이 같다는 말을 할 신현수가 아니었다. 왠지 다르게 보였다. 뭔가 확실하게 변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쨌든 같은 의견을 가졌다는 것이 반가웠다.

“오케이! 내일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원 스텝이네. 역시 현수 너도 과감하구나.”

손일석이 눈을 부릅뜨며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마치 자신들이 직접 집도하는 것처럼 격론이 벌어졌다. 신현수까지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일석이가 과감하고, 현수는 신중할 줄 알았는데 희한하네. 하긴 가장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할 혈관 수술에 꽂혔으면 과감하긴 좀 힘들겠지? 지훈이 저 자식은 참 판단하기 힘드네. 신중한 것 같으면서도 과감해. 수술할 때하고 똑같네.’

시간이 늦었다는 홍재순의 말에도 집담회는 끝날 줄 몰랐다. 결국 오늘도 응급실에 환자가 오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2년차들의 얼굴이 가볍게 상기돼 있었다. 그 속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의국을 나가던 손일석이 갑자기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그래. 이렇게 즐거운 자리를 만들어 줬는데 니가 들어가야지. 이런 수술에서 세컨이 어디야. 부럽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에 누구 의견이 맞는지 보자. 난 그래도 투 스텝이야.”

신현수가 피식 웃으며 뒤따라 나갔다.

단둘이 남자 홍재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훈아, 내일 정민이 수술은 니가 퍼스트 서.”

“예? 선생님 수술 안 들어가세요?”

“내가 세컨 설 거니까 넌 퍼스트 서면 돼. 백무용 선생님에게도 허락을 받았어. 너도 좋잖아?”

복사물을 정리하던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치프와 2년차가 이런 식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이 함께 들어가는데 제가 어떻게 퍼스트를 서요. 전 못 섭니다. 다른 선생님들한테 혼나요.”

홍재순이 웃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착잡한 것 같았다. 백무용 교수에게 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훈이기 때문이었다.

“지훈아, 난 내가 아직 기본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솔직히 이번 수술은 퍼스트를 서는 것 자체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내년에는 분명히 다를 거야. 그러니까 내가 기회를 줄 때 퍼스트 서.”

이제는 상당 부분의 불안과 두려움을 버렸을 홍재순이 솔직하게 말했다. 치프의 자존심도 세우지 않았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홍재순이 어깨를 툭툭 치며 나갔다.

의국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을 다시 본 것이다.

‘내가 부족하면 언제든 도움을 청해야 해. 그때는 자존심이고 뭐고 환자부터 생각하는 게 맞아. 자만과 자존심의 차이가 이런 걸까?’

스승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홍재순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알려 준 것 같았다.

그날 밤 김지훈이 밤새 꿈을 꾸었다. 2년차들과 끊임없이 토론을 한 후 퍼스트를 서는 꿈을 말이다. 누군가 무지하게 칭찬을 했다. 무사하게 수술이 끝난 후 겸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서정민의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 방 앞까지 따라온 엄마의 눈이 시뻘겋게 변한 채 퉁퉁 부어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도 공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마취과 교수가 나와 소량의 마취제를 먼저 투여했다.

서정민이 스르르 잠이 들자마자 김지훈이 재빨리 수술실로 옮겼다. 수술 침대에 눕히는 순간 난데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아이 괜찮지? 괜찮지? 수술 잘돼야 되는데. 응? 백 교수는 옷 갈아입고 있나? 그래. 천천히 하자. 천천히. 이직 마취도 안 했는데, 뭐.”

그 뒤에 아예 수술복을 입고 있는 손일석과 신현수가 보였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라? 니들은 이 시간에 일 안 하고 왜 들어왔어? 그런데 과장님은 또 왜 들어오셨지? 설마?’

갑자기 엄습한 불안에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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