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52화 (352/1,329)

제1화 2년차 셋이 모여도 결국 2년차일까? (1)

그래! 여긴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천안이다.

무슨 사고가 나도 꼭 단체로 몰려온다.

아마도 구미와 전화벨 소리가 달랐던 모양이다.

이미 당직 1년차 2명이 모두 내려와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처치실은 이미 꽉 찼고,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까지 있었다. 김지훈까지 달려들었지만 그래도 손이 모자라 손일석에게도 연락을 했다.

5분도 안 돼 내려온 손일석이 팔을 걷어붙였다. 일반 외과 전공의만 4명이었다.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수월하게 바이탈을 잡았다. 이제는 치명적인 손상을 동반하지 않는 한 바이탈을 놓칠 일이 년차들이 아니었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의 힘이야.’

환자들이 빠르게 정리되는 가운데 검사 결과가 차례차례 나왔다. 여기는 천안이다. 단체로 사고가 났는데 일반 외과 환자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달랑 혈복강 환자 한 명뿐이었다. 김지훈이 주머니 속에 든 수술용 기구를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상해. 일석이하고 현수가 당직을 설 때는 수술 환자가 밀려들어 오는데, 내가 끼면 양방도 힘드네. 어떻게 일주일 동안 수술 구경만 하냐. 세컨이라도 서는 걸 행복해야 하나?’

따르륵! 따가각!

오늘따라 톱니 물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당직 치프가 내려오는 것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 오늘은 송재덕 과장의 당직 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연락을 받기가 무섭게 출발할 것이다.

30분 후, 수술 방으로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수술을 많이 주겠다는 송재덕 과장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물론 대장을 하면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아쉬운 일이었다. 손일석도 뭔가 아쉬운지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먼 훗날까지 함께하려면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마음먹은 것처럼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힐끗 환자를 보았다. 안호석이 옆에 바짝 붙어 환자를 보고 있었다. 안호석도 어느새 2년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1년차들 모두 열심히 일해 왔다. 믿음직스러웠고, 믿어도 좋을 만큼 다들 뛰어났다.

‘1년차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가 생기네.’

김지훈이 복부 CT를 걸며 손일석을 불렀다.

“일석아, 이 환자 어떻게 수술을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잘해야지. 지훈아, 우린 정말 운이 좋아야 퍼스트다. 3년차 선생님들이 농땡이 좀 부려야 하는데 그럴 기미조차 안 보이네.”

“그러게 말이다. 근데 너도 수술 전에 환자에 대해 파악하면서 나름 계획을 세울 거 아냐. 나한테도 좀 가르쳐 줘.”

“가르쳐 달라고?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사실 손일석도 자존심은 상하지만, 슬슬 수술에 관해서는 김지훈에게 한 수 접고 있었다. 혈관 수술에 꽂힌 탓만이 아니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르쳐 달라니?

‘이건 내가 할 소린데,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김지훈은 진지하기만 했다. 눈빛도 달라진 것 같았다.

한 소리 하려던 손일석이 그 눈빛에 밀렸다. 왠지 평소처럼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손일석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헛기침을 터트리며 다시 한 번 복부 CT를 신중하게 살핀 손일석이 나름의 계획을 설명했다. 김지훈이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난 비장 깨진 환자 수술을 할 때마다 한 가지 의문이 있었어. 너도 자주 봐서 알겠지만 접근 방식이 여러 가지잖아.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안전할지 나름 고민을 했어. 어찌 됐든 수술의 핵심은 동맥을 빨리 잡는 건데 최근 경향을 보면…….”

손일석의 말이 이어질수록 김지훈의 눈가가 더욱 좁아졌다. 처음으로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큰 수확이 있었다. 무심코 지나친 과정에 생각하지도 못한 의미가 있었다.

“동맥 위치상 비장 손상 때 아래쪽에서 접근하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하단 말이지? 난 그 방식이 조금 불편한 것 같아서 아예 생각도 안했는데 정말 그런가?”

빈말이거나 농담조였다면 곧 다른 일에 신경이 팔렸을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이 한참 동안 복부 CT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마치 수술을 하는 것처럼 손을 놀렸다. 손일석의 말을 깊이 고민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수술이라도 접근 방식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부분 배운 대로 하게 되고, 결국 그 방식이 자신에게 가장 편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면 최신 경향보다는 익숙한 방식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공의는 경험이 적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기에는 교수들보다 수술에 대한 부담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일석은 혈관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비장 절제술의 최근 경향을 알고 있었다.

김지훈의 머릿속에서 빨간 비상등이 번쩍거렸다.

‘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면까지 고민하고 있었네. 일석이 이 자식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구나. 비상이다, 비상.’

실로 대단한 자극이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네. 역시 손이 편한 대로만 수술할 일이 아니었어. 항상 공부하고 생각을 해야 돼. 고맙다, 일석아. 이래서 사람은 어떻게든 배워야 한다니까.”

“이 자식이 왜 갑자기 비행기를 태우고 난리야? 별거 아냐, 인마. 그냥 우연히 논문을 읽다가 본 거야. 내가 혈관 공부만으로도 바쁘잖아. 이 정도로 놀라면 앞으로 놀랄 일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손일석답게 농담을 하면서도 쑥스러운 듯 천장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어찌 됐든 인정할 만했다.

그때 신현수가 응급실로 들어왔다. 복부 CT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김지훈과 손일석을 보고는 곧장 다가왔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두 눈은 분명 무슨 일인지 묻고 있었다.

‘자식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가만, 오프 아냐?’

이제야 신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벌겠다. 단정한 머리로 봐서는 자다 나온 것이 아니었다. 손에 든 가방이 상당히 무거운지 한쪽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책이 아니면 그 정도 무게가 나갈 리가 없었다. 주말 오프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까지 공부를 하다가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집에서까지?

김지훈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너 아직 오프 안 갔어? 지금까지 뭐 했어?”

“할 일이 좀 있어서.”

분명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말이 짧았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차갑고 냉랭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슬며시 사이에 끼어든 신현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복부 CT를 보았다.

“비장 깨진 환자네. 근데 뭘 그렇게 유심히 봐?”

“응. 일석이랑 뭐 좀 얘기하느라고. 집에 안 가?”

“무슨 얘기?”

집이라는 소리에는 아예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CT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보지 못한 손상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공부는 그렇다고 쳐도, 오프 가는 길에 응급실까지 들러? 이 자식들 정말 무섭게 노력하고 있었네. 이거 장난 아닌데. 알려 주지 말까? 어휴! 그럼 진정한 라이벌이 아니지. 어쨌든 누군가는 자꾸 앞서 나가야 자극이 되겠지?’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일석아, 뭐 하니.”

김지훈이 손일석을 보며 CT를 가리켰다. 척하면 착이다. 손일석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다시 설명을 했다. 신현수의 눈빛이 묘해졌다. 김지훈과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아래쪽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더 안전하다고?”

“최근 경향이라는데, 사실 이렇게 수술하는 교수님은 안 계시잖아. 그래도 일단 머릿속에는 담아 놔야지.”

손일석의 말에 신현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논문을 찾아 읽고 싶었지만 시간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김지훈이 옆에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사용하는 기구도 달라지겠네.”

신현수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2년차 3명이 저마다 약간은 다른 생각에 빠진 채 머리를 맞댔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들 여기서 뭐 하니? 재밌는 거라도 있어? 지훈아, 나쁜 놈들하고 뭐 하는 거야? 응? 뭐 해? 환자 보자, 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처치실로 향하는 송재덕 과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너희들 셋이 모여서 고민하는 걸 보니까 좋다. 그래야지. 너희들은 다 병원에 충분히 남을 수 있는 인재들이야.’

송재덕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자를 보았다. 당직실에 있던 3년차가 급히 달려 나왔다. 항상 보아 왔던 모습대로 보호자에게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지훈아, 너 수술 당직이지? 맞지?”

마치 퍼스트라도 세울 것 같은 말투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김지훈이 답답한 콧소리를 냈다.

“응급실 당직입니다, 과장님.”

“그래? 그럼 다음에 하자, 다음에. 응? 대장 하면 말이야. 나 수술 방 올라간다. 준비되면 바로 올려. 그리고 나쁜 놈들하고 뭐 하는 거야? 가르쳐 주지 마. 혼자만 알고 있어. 혼자만. 저놈들 아주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 손일석, 신현수, 대장 안 할 거지? 그치? 에이! 나쁜 놈들. 치프야, 가자. 수술하자, 수술.”

송재덕 과장이 3년차에게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며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2년차 3명이 동시에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놀랍게도 신현수까지 그러고 있었다.

어느새 환자를 올리라는 시간이 5분도 남지 않았다. 복부 CT를 챙기던 김지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걸린 사진으로 향했다. 몇 개월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복부 사진이었다.

‘아이구! 배 속에 똥하고 가스가 꽉 찬 게 배 좀 아팠겠다. 말도 못하고 얼마나 울었을까? 변비야, 장염이야?’

엄마, 아빠는 또 얼마나 속을 태웠을까?

한순간의 걱정일 뿐이었다. 김지훈이 안호석과 함께 환자를 올릴 준비를 했다. 곧 주렁주렁 수액을 단 환자가 수술 방으로 향했다.

때마침 응급실도 한산해 잠시 쉴 틈을 얻었다. 그런데 손일석과 신현수가 아직도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손일석에게 다가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멈춰 서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뷰박스에 어린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단순 복부 사진도 때론 정말 많은 정보를 준다.

지금이 딱 그랬다.

김지훈이 이마에 주름까지 만들며 복부 사진을 보다 말고 응급실 인턴을 불렀다.

“인턴 선생, 이 환자 뭐야?”

“예. 소아과 선생님이 이미 보신 환자입니다. 변비가 심하다고 일단 관장하고 경과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변은 봤어?”

인턴이 머리를 긁적였다. 김지훈의 날카로운 눈빛에 서둘러 보호자를 찾았다. 곧 인턴이 다가와 아직 변을 보지 못했다고 노티를 했다.

한동안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응급실 차트를 찬찬히 확인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눈가를 찌푸리던 김지훈이 간호사에게 젤리와 장갑을 달라고 하고는 보호자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일반 외과에서 왔습니다.”

“네? 일반 외과요? 왜요?”

“아이 때문인데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아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반 외과라는 말에 약간은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땐 아이 엄마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것이 좋았다.

“아이 이름이 서정민이네요. 이름만큼 예쁘네요. 정민이한테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요. 혹시 정민이가 태어났을 때 태변이 제때 배출이 됐나요? 그리고 사진을 보니까 변비가 상당히 심하던데, 그동안 대변을 제대로 본 적은 있나요?”

“태변이 조금 늦게 나온 편이라는 말은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 정민이 장이 태어날 때부터 워낙 약한지 지금 육 개월인데 변비에 너무 시달리네요.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심해서 응급실까지 왔어요.”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그동안 소아과는 안 다니셨나요?”

“모유를 먹이다가 분유로 바꾸거나 이유식을 하면 이런 경우가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리고 집에서 관장을 해 주면 그래도 변은 잘 나왔어요. 그거 이외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어서 감기 걸렸을 때 한두 번 가 본 게 다예요.”

“그럼 모유 수유 때는 잘 봤어요?”

“그때도 거의…….”

아이 엄마가 말꼬리를 흐렸다. 단순 변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김지훈의 질문을 받으니 무엇인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긴 했지만 분명히 드문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양해를 구하고는 직장 수지 검사를 했다.

항문에 새끼손가락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어린아이다.

변비가 심하다고 했는데 변이 하나도 만져지지 않았다. 관장을 하고도 변을 못 보았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변비에 준해 손가락을 계속 움직여 항문과 직장에 자극을 주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시고요. 변을 보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김지훈이 다시 사진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너무 과민한가?’

그때 손일석과 신현수가 다가왔다.

“지훈아,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일석아, 현수야, 소아과에서는 심한 변비로 본 모양인데 이 사진 이상하지 않아?”

눈가에 힘을 주며 사진을 보던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변비가 심하면 요만한 애들 사진이 다 이렇지. 현수야, 안 그래?”

신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아이의 병력을 말했다. 그러고는 복부 사진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순간 신현수와 손일석이 눈가를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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