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새로운 도전 (2)
백무용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술하기 아주 편했습니다.”
“그래그래. 나도 백 교수가 참 편하게 보이더라. 지훈아, 너도 세컨 참 잘 선다. 앞으로도 쭉 서라, 쭉. 재순아, 잘했다. 잘했어. 허허! 재순이가 치프네, 치프. 야야! 마취과 뭐하니? 수술 거의 다 끝나 간다. 환자 빨리 깨워, 빨리.”
송재덕 과장이 난데없이 마취과까지 간섭을 했다. 홍재순의 손이 더 이상 느리지만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취과도 눈치가 비상했다.
“어후! 홍재순 선생님, 벌써 배를 거의 다 닫았어요? 예, 과장님. 빨리 깨우겠습니다.”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홍재순의 얼굴이 빨개진 것이 틀림없었다.
실수할까 봐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던 천안에서의 첫 수술이 무난히 끝났다. 걱정이 가득했던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수술이 이어졌다.
점차 자신감을 찾은 홍재순은 집중과 수술 팀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김지훈은 홍재순의 손과 수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 수술에서는 발등을 밟을 일이 없었다. 결코 구미에서 경험을 했던 수술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홍재순 역시 치프이자, 일반 외과 의사였다.
모든 수술이 끝났다. 홍재순이 한참 동안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루 종일 한마디 불평 없이 세컨을 섰다. 순간순간 불안함을 보일 때마다 어떻게든 신호를 보내 자신감을 잃지 않게 했다.
홍재순에게 김지훈은 더 이상 2년차가 아니었다.
“지훈아, 고맙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가슴이 뜨거워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회복실에서 오더를 내면서도 자꾸만 웃었다.
무슨 일인지 송재덕 과장이 다시 들어왔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과장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야. 아니야. 오더 내. 천천히 내, 천천히. 흐음! 허허! 니가 지훈이지? 지훈이 맞지?”
“예, 과장님.”
“음! 그래. 지훈아. 니가 지훈이구나.”
‘우리도 힘들어했던 재순이의 손과 마음을 고친 놈이 김지훈 너란 말이지. 고맙다. 그게 외과야. 못한다고 욕하지만 말고 서로 도와야지. 그럼. 절대 혼자 크는 놈은 없는 법이다. 아주 잘했다. 고맙다. 허어! 대장 파트를 세부 전공으로 택하게 해야 하는데, 요 놈을 어떻게 한다.’
송재덕 과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누군가 아무 말도 없이 지켜만 보면 그것처럼 갑갑하고 이상한 느낌은 없다. 김지훈이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냐. 편하게 오더 내. 응? 편하게. 왜, 내가 있으니까 불편해? 아니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불편하다.
“아닙니다, 과장님. 그럴 리가 있나요.”
“그치? 그럼 그래야지. 지훈아, 넌 대장 하는 거다, 대장. 그게 재밌어. 간담도는 재미없다. 라파로로 끝내고 대장 하자. 지훈아, 넌 구미에서 수술 좀 했지? 만날 세컨만 선 건 아니야? 송동화가 많이 줬지?”
“예.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유난히도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했다.
송동화 과장과 이미 통화를 한 후였다. 홍재순을 챙기느라 생각보다 많이 챙겨 주지 못했다는 말까지 들었다. 더구나 홍재순에게 들었던 말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김지훈이 더 예뻐 보이는 모양이었다.
송재덕 과장이 갑자기 입맛을 다셨다. 이번 2년차들 중에는 유난스럽게 탐이 나는 전공의들이 많았다. 더구나 대장 항문 파트가 이제는 대장과 항문으로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몇 년 내에 2명 정도 충원할 필요가 있어 여건까지 좋았다.
손일석과 신현수는 그들 중 한 명이었고, 당연히 대장 파트를 전공하라는 말을 했다. 둘 중의 한 명이라도 붙잡아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손일석은 혈관에 목을 맨 상태였고, 신현수는 천안에 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마음을 접은 것은 아니었지만 실망할 이유는 없었다.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전공의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김지훈과 이경석이었다.
사실 김지훈이 오기 전까지는 이준영 과장 때문에 말을 아끼려 했지만, 얼굴을 보는 순간 싹 잊어버렸다.
‘녀석! 참 욕심나네. 항문 쪽만 하기에는 많이 아까우니까 넌 대장 파트를 해야 돼. 이준영만 일반 외과 의사 아니다. 네가 대장을 하고, 경석이가 항문을 하면 그림이 딱 나오잖아. 어떻게든 대장 파트에 마음을 붙이게 해야 하는데.’
외과 전공의에게 통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그랬구나. 많이 했구나. 내가 수술 많이 줘야겠네. 그럼 대장 해야 되는데. 지훈아, 어때? 대장 좋지? 그게 참 재밌는 파트다. 아암! 그렇고말고. 간담도는 재미없다. 우리 수술 많이 해 보자, 많이. 지훈아, 좋지?”
‘저 선생님 파트 아닙니다. 어떻게 수술을 많이 준다는 말씀이세요. 그리고 간담도가 대장 파트보다 재미있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송재덕 과장이 대장이라는 소리를 아예 입에 달고 있었다. 천안에 온 지 단 사흘 만에 지훈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장이라는 소리가 슬슬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간담도는 또 왜 그렇게 재미없다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순간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송재덕 과장 때문인지 휙 하고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오더를 다 낸 것을 보고서야 송재덕 과장이 회복실에서 나갔다. 은근히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해방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똑똑히 알았다.
병동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지훈이구나. 대장 하자.’
송재덕 과장 특유의 목소리가 귓가를 감돌았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간담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스승님 아니면 모르는 일인데,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 눈치네. 결국 이혁민 선생님이 중간에서 말을 전하셨단 말이겠지? 그런데 간담도가 재미없다는 말을 왜 그렇게 강조하시는 거야? 금경태 과장 때문에 그러시나?’
이준영 과장의 세부 전공이 간담도라는 사실과, 송재덕 과장이 자신을 두고 스승과 줄다리기를 한다는 것을 모르는 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송재덕 과장이 말을 해 줄 리도 없었다. 게다가 손일석에게 위장이라는 말을 들은 탓인지 무언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병동에 도착한 김지훈이 들려오는 소리에 씨익 웃었다.
“벌써 수술이 다 끝났다고? 뭐야? 분명히 재순이 형이 퍼스트 섰지? 근데 이게 말이 돼?”
“나도 놀랐다. 구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회진을 기다리던 3년차들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잠시 후, 홍재순이 아침과 다름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지훈아, 회진 돌자.”
목소리에 힘이 팍팍 들어가 있었다.
‘나 같으면 옛날 일을 쉽게 잊지는 못할 텐데, 홍재순 선생님도 대단하시네. 하긴 그 덕에 나도 마음이 편하니까, 일석이가 힘 좀 발휘하면 의국 분위기도 더 좋아지겠지.’
아직은 의국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홍재순을 보는 눈빛도 곱지만은 않았다. 겉으로 확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예전의 상처가 다시 도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회진을 돌고 병동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일석이 울상이 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이 혀를 차며 고개까지 흔들고 있었다.
“한 번 나쁜 놈은 영원히 나쁜 놈이야. 알지? 삼 개월 동안 열심히 돌아. 너 혈관 한다고 농땡이 치면 정말 나쁜 놈이야. 나쁜 놈. 대장이 좋아, 대장이. 에이! 나쁜 놈.”
송재덕 과장이 사라지자마자 물었다.
“일석아, 너 무슨 실수라도 했어?”
“실수는 무슨. 회진 도시다 말고 다짜고짜 저러시네. 어후! 앞으로 삼 개월을 어떻게 사냐. 대장 파트 안 한다고 나쁜 놈은 아니잖아.”
그렇다. 손일석은 송재덕 과장의 파트였다. 3개월 동안 단지 대장 파트를 안 한다는 이유로 나쁜 놈이란 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은근히 뒤끝이 있는 걸까? 아니면 미련을 못 버린 걸까?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정신없이 한 주가 지났다. 그 와중에도 손일석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모든 전공의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한 홍재순의 손에 놀라고, 그 이유에 한 번 더 놀랐다. 누군가는 반성하고, 누군가는 애써 지난날의 잘못을 외면했다.
“재순이 형이 완전히 변했어. 의국 분위기 나빠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반성할 일이 많네.”
“아직은 몰라. 그 성격 어디 가? 기분 안 좋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예전처럼 바로 돌아 버릴 거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한 게 또 뭐가 있어? 다 자초한 일이지.”
같은 일을 두고 반응은 다양했다. 그런 존재가 사람인 모양이었다. 신현수의 얼굴이 복잡하게 보였다.
홍재순도 전공의들의 시선이 어떤지 알 테지만 결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번 주 내내 바짝 옆에 붙어 움직이던 김지훈의 표정이 점점 편안해져 갔다.
‘선생님, 지금처럼만 가죠. 분위기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웁니다. 서로 잘못한 게 있으면 남 탓을 하기 전에 제 자신부터 먼저 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신현수였다. 정말 세부 전공으로 위장관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은 이준영 과장의 세부 전공이 확실한지가 더 궁금했다.
‘아버지가 이사장님이니까 분명 확실한 정보를 얻었을 거야. 그렇다면 십중팔구 스승님 세부 전공이 위장관이라는 말인데… 죽겠네. 그냥 확 대놓고 물어볼까?’
직설적으로 물어본다고 해서 신현수가 확실하게 말하진 않을 것이다. 고민 끝에 은근슬쩍 떠보았다.
“현수야, 너 위장관을 마음에 두고 있다며? 이혁민 선생님, 좋은 분이시지. 에휴! 유방하고 갑상선까지 맡아서 수술도 많은데, 혼자 하시려면 힘드실 거야. 그렇다고 서울에 세부 전공도 같은 교수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글쎄다.”
한마디만 딱 하고 사라졌다. 도대체 뭘 말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전공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스승의 세부 전공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걸까?
김지훈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신현수는 틈을 주지 않았다. 한두 번 더 물어보았지만 냉랭한 표정으로 힐끗 눈길만 줄 뿐이었다.
“피곤하다. 그 시간에 잠이나 더 자.”
그렇게 싱숭생숭한 한 주가 지나가고 주말을 맞이했다. 이번 주 역시 당직이었다. 외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응급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모처럼 전화를 했건만 고경아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조차 충분히 허락하지 않았다.
응급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1년차와 함께 가운을 휘날리며 가까스로 응급실을 평정했다.
잠깐 한가해진 틈을 타 당직실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숨을 돌리던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인턴 때나 지금이나 일하는 방식은 아무런 차이도 없잖아. 이런 식으로 일을 해도 발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상황에 따라 움직인 면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 곧 3년차다. 지금처럼 단순히 열심히만 해서는 더 이상 발전을 도모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
길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일도 손에 익었고, 경험도 만만치 않게 쌓았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고 해도 누군가 떡을 먹여 주기만을 바랄 시기는 아니었다.
흔히 듣고, 누구나 다 아는 말이 바로 답이었다. 자체 집담회를 하면서 분명하게 느낀 점이 있었다.
명확한 목표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물론 목적이나 목표를 생각하지 않아도 시간은 가고, 일은 하게 돼 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필요한 만큼은 다 배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목표가 있고, 없고는 매사에 큰 차이를 줄 것이다.
‘라파로와 소아 외과 준비에 자체 집담회 형식의 이론 공부까지 잘 유지해야 하는데, 그 속에는 어떤 목표가 있는 거지? 내가 지향해야 할 목적이 무엇일까?’
눈가를 찡그리던 김지훈이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셨다. 무심코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려다 말고 피식 웃었다.
의사가 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당직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도 무수한 일들이 있었다.
‘인턴 때는 정말 멋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는데. 일석이하고 현수하고 힘들다고 함께 아우성을 치던 곳이 여기였지. 그러고 보니 악어와 정갑수하고 싸운 곳도 여기였네?’
입가에 살짝 힘을 주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 때문에 웃고, 화를 냈을까?
좋은 일이든 기억하기 싫은 일이든, 그 모든 일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김지훈 자신의 꿈이었다. 진정한 의사,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는 바로 그 꿈이 아니었으면 많은 일들이 기억 속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점점 경험이 쌓일수록 누구도 혼자서는 최고의 의사가 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점 세분화되고, 보다 전문적인 되어야 하는 추세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다 함께 진정한 의사이자 최고의 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 답이었다.
지난 시간, 흐릿하기만 했던 생각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래. 최고의 써전이 되려면 동료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만큼 중요한 점은 없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석이하고 현수와 함께 최선을 다하는 거야. 서로에게 배우고, 라이벌로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한다면 가능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해.’
예전에는 감정에 치우친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냉정한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누구도 미래의 일에 대한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목표와 과정이 올바르다면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동기들과 함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일이었다.
따르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실 콜이 왔다. 왠지 전화벨 소리가 다른 때와는 다르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