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새로운 도전 (1)
전 파트가 모든 일과를 끝냈다. 가장 늦게 끝내거나, 혹은 이미 사라졌어야 할 홍재순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차트를 덮었다. 하루 이틀에 적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1년차들만 남아 각자 남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내일 있을 담낭암 수술 환자의 차트와 검사 결과들을 챙겨 의국으로 들어갔다. 곧 홍재순이 교과서를 비롯해 관련된 책 몇 권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그럼 시작해 볼까?”
탁탁 손바닥을 치는 홍재순을 본 김지훈이 살짝 손을 들었다. 천안에서의 첫 번째 이론 공부였다. 시간이 부족한 것을 감안해 다음 날 있을 수술 환자를 중심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홍재순은 이미 어제부터 준비를 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선생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2년차들 시간 되면 부르겠습니다. 호석이는 일 끝나는 대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김지훈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로 전화를 들었다. 아무래도 신현수와 홍재순의 관계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홍재순이 부르지 말라고 할 틈을 주지 말아야 했다.
“일석아, 나야. 오늘은 현수가 당직이지? 혹시 옆에 있어?”
다행히 마침 응급실에 환자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빨리 병동 의국으로 와. 오늘 담낭암에 대해 공부를 한다고 했잖아. 괜히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말고 일 없으면 빨리 와. 우리한테 부족한 거 팍팍 채워야지. 넉넉하게 한 시간이면 될 거야.”
손일석이 무언가를 더 물었지만 김지훈이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툭 끊었다. 아마도 홍재순이 옆에서 듣고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기준이 아니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홍재순 선생님이 필요하지만, 내년에는 우리끼리 이런 식으로 충분히 준비해 나갈 수 있을 거야. 우리 셋이 한 팀이 된다고 생각하면 힘들지도 않겠지?’
잠시 후, 손일석과 신현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디밀었다.
신현수와 홍재순이 상당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구미에서 김지훈이 어떻게 했는지 들었다면 신현수 입장에서는 더욱 얼굴을 보기 민망할지도 몰랐다. 손일석도 감히 나서질 못했다.
김지훈이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그럼 시작할까요?”
“응? 그래. 시작하자. 일석이하고 현수는 이 자리가 불편하면 굳이 함께하지 않아도 돼. 니들도 2년차 말인데 편하게 생각해. 단, 일단 시작하면 나한테 욕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 잊지 마.”
치프가 이렇게 말한다고 정말 일어난다면 사회생활 빵점이다. 더구나 변했다고는 하지만 홍재순이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은 함께 이론 공부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홍재순에게 살짝 눈짓을 한 김지훈이 환자에 대한 요점이 적힌 복사물을 건넸다. 비록 한 장에 불과했지만 건성건성 지나갈 자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복사물을 든 김지훈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셋이 함께하는 첫 번째 시간이다. 최선을 다해 이론을 배우고, 재밌게 이끌어 보자. 현수, 니가 스승님의 세부 전공일지도 모르는 위장관을 한단 말이지. 우리가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하든 지금은 현수 너보다 더 노력할 테니까 멋지게 달려 보자. 나 만만하게 볼 놈 아니다.’
역시 신현수는 여러모로 최고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아 복사물을 읽고 있는 손일석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발표를 시작했다.
“그럼 환자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본 67세 남자 환자는 내원 삼 개월 전부터 시작된 우상복부 동통과 내원 한 달 전부터 발생한 황달을 주소로…….”
김지훈이 환자의 과거력과 증상, 그리고 각종 검사를 시행한 이유와 결과를 발표했다. 뒤이어 홍재순이 담낭암에 대한 고찰 및 수술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고는 교과서 및 관련 책에서 중요 부분을 짚으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어느 틈엔가 의국에 들어온 안호석이 졸린 눈을 부릅떠 가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곧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물론 김지훈과 홍재순의 독무대였다. 손일석이나 신현수는 홍재순과의 이런 자리가 처음이기도 했지만, 준비를 하고 안 하고의 차이도 굉장히 컸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신현수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김지훈은 마치 교수들 앞에서 정식으로 발표를 하는 것처럼 진지했고, 격식까지 갖췄다. 홍재순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많은 책을 참고했고,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까지 세세하게 설명을 했다.
열의가 넘쳐흘렀다. 진지함 속에 재미와 흥미가 더해지고 있었다. 토론을 벌이는 김지훈의 눈이 여름 한낮의 햇빛을 받은 은빛 모래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후우! 생각 이상이네. 구미에서도 이런 식으로 이론 공부를 해 온 걸까?’
이어진 말에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손일석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한 표정만 지었다.
“지훈아, 이 부분에서는 퍼스트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간을 절제하기 시작할 때요? 어차피 담낭하고 같이 절제를 해야 하니까 그때는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아랫년차를 대우한 적이 없었던 홍재순이 놀랍게도 김지훈에게 수술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한순간에 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놀란 표정을 짓는 동기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책에 그려진 수술 방법을 따라가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에 바빴다. 마치 실제로 수술을 하는 것처럼 손짓까지 하는 모습은 진지하기만 했다.
손일석이 슬슬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수술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눈앞에 홍재순이 있다는 부담까지 날려 버리고 있었다. 계속 기회를 엿보던 손일석이 마침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았다.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인 혈관에 관한 문제였다.
“지훈아, 그 부분에서는 간 문맥하고 간 동맥이 같이 지나가니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실 것 같은데. 그래야 안전하지 않겠어? 아무리 조그만 손상이라도 일단 발생하면 난리 나는 게 간이잖아.”
손일석이 혈관의 분포와 위험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신기동 교수의 후계자를 자처할 최소한의 자격은 갖춘 것이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빛을 굳혔다.
‘일석이 이 자식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네. 좋아. 니들 둘이 모두 내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이 말이지. 오케이! 나도 빨리 세부 전공 정해서 달릴 테니까 두고 보자.’
“맞네. 담낭 주변의 간 조직을 최소한 2센티미터 이상 절제해야 하니까, 그 부분은 정말 조심해야겠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홍재순이 그 자리에서 간의 해부학적 구조가 설명된 부분을 펼쳤다. 그러고는 수술 그림과 함께 비교를 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났지만 달아오른 분위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듣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토론한다는 것 자체가 쌓인 피로마저 잊게 한 것이다.
응급실에서 콜이 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김지훈이 만족스럽다는 듯 박수를 치면서도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간만에 재밌는 자리였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틈틈이 졸던 안호석까지 말이다.
응급실로 향하던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홍재순을 윗년차로 인정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빠져나오고 싶은 자리였다. 그러나 엉덩이를 뗄 수가 없었다.
의외로 깊이 있는 토론과 넘치는 활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홍재순의 변한 모습 때문만도 아니었다. 자신감과 열정에 넘치는 김지훈을 보는 순간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비록 몇몇이 하는 자체 집담회였지만 김지훈이 주도를 하고 있었다. 손일석까지 있는 자리였다. 당연히 그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은근히 화가 나면서도 김지훈의 모습이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질 않았다.
‘김지훈이 저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었나? 후우! 결코 몇 번 하다가 말 놈이 아닌데. 구미에서 최소한 두 달은 저런 식으로 이론 공부를 했겠지? 만일 이 정도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면 이론에서는 뒤처질 수도 있어. 어떻게 하지?’
급기야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에 은근한 후회까지 몰려왔다.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지훈과 함께 이론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뒤처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길! 수술과 이론이 완전히 정반대였다니. 이제 와 홍재순 선생님과 어떻게 웃고 지내지?’
한동안 잔잔하고 편안했던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 적극적이지 못하면 남는 것이 없는 법이었다. 지금 내세우는 자존심은 손톱 끝에 때만도 못했다. 당연히 버려야 할 때였다.
신현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도리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존심을 꺾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김지훈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안에 와 서로의 얼굴을 본 지 불과 사흘째였다.
착각과 착각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의 세부 전공과 이론 공부를 한 방식 및 기간이 마구 뒤섞여 2년차들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하지만 그런 착각들이 김지훈과 신현수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낀 손일석까지 다시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전, 첫 번째로 담낭암 수술이 시작됐다.
담낭암은 극히 드문 질환이다. 담낭을 포함해 인접한 간 조직을 얼마나 정확하게 제거하는지에 따라 환자의 예후가 달라진다. 담낭과 인접한 간 조직을 2센티미터 이상의 두께로 절제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첫 수술부터 너무 큰 수술이었다.
수술을 준비하는 내내 홍재순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이 계속 말을 걸며 긴장을 풀어 주려 했지만 백무용 교수가 들어오자 자꾸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외래에 있어야 할 송재덕 과장까지 쓰윽 얼굴을 비쳤다. 수술실에 들어온 이유는 빤했다. 홍재순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선생님, 파이팅!”
김지훈의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어젯밤 담낭암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홍재순이 순간순간 멈칫거렸다. 극복한 줄 알았던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한 것이다.
김지훈이 그때마다 슬며시 발등을 밟았다. 백무용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짐짓 모른 척을 했다. 변했다고 했으니 기다려 볼 일이었다.
띠! 띠! 띠! 띠! 띠!
위이이잉! 슈우욱! 위이이잉! 슈우욱!
심장박동을 알리는 모니터와 인공호흡기 소리만이 울렸다. 그 소리를 따라 홍재순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간을 절제해 갈수록 수술 부위는 좁아졌고, 점점 위험해졌다. 간 내의 혈관들에 인접한 조직을 제거할 때는 극도의 긴장에 도리어 숨을 가쁘게 쉬었다.
홍재순의 모자가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하셔야 합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교수님도 계시고, 저도 있습니다.’
김지훈이 아예 홍재순의 발등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어떻게든 구미에서 느꼈던 자신감을 다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때 홍재순이 고개를 돌렸다. 확연한 불안이 보였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홍재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선생님, 크든 작든 결국에는 모두 수술일 뿐입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수술 팀을 믿고 집중하셔야 합니다.’
눈빛에 실린 강한 자신감이 전해졌다.
오직 한곳에만 집중하면 두려움 따위는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홍재순이 필사적으로 수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홍재순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백무용 교수의 손을 따라 홍재순의 손이 움직였다. 김지훈의 발은 여전히 홍재순의 발등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홍재순의 어깨를 짓눌렀던 불안과 두려움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수술 팀의 집중도도 높아졌다.
“타이! 컷!”
마침내 담낭을 포함한 간 조직이 절제됐다. 곧바로 주요 부분을 떼어 내 냉동 생검을 보냈다.
잠시 후, 바람처럼 달려온 안호석이 암 조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결과를 알려 왔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과정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백무용 교수가 힐끗 홍재순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마무리하자.”
간을 건드렸다. 당장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수술 후 출혈이었다.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지혈을 하고, 몇 번씩 확인했다. 이제 배를 닫는 과정만 남았다.
“홍재순 선생, 잘했어. 지훈이하고 닫아.”
백무용 교수가 흐뭇하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홍재순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첫 번째 퍼스트를 선 수술이 까다롭다는 담낭암 수술이었다. 처음부터 고비가 다가왔지만 결국에는 백무용 교수가 배를 닫는 과정을 맡겼다. 치프라면 당연히 받는 과정이었지만 구미와는 또 다른 감정이 솟구쳤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마음 덕분이었다.
‘지훈아, 정말 고맙다. 네가 없었다면…….’
차마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김지훈을 찾던 홍재순이 깜짝 놀랐다. 송재덕 과장이 떡하니 서 있었다. 등 뒤에 있어서 몰랐지만 수술 중에 슬며시 들어와 참관을 한 것이다.
“홍재순이 잘한다. 야! 퍼스트 잘 서네. 그래. 재순이 니가 치프구나, 치프. 구미 잘 갔다 왔네. 송동화가 아주 잘 가르쳤어. 백 교수, 재순이 치프 맞지? 맞지? 치프지?”
송재덕 과장이 치프라고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홍재순의 눈가가 붉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