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즐거운 변화(?) (2)
입을 쩍 벌린 김지훈이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어… 어떻게 알아?”
손일석이 코웃음을 쳤다.
“말은 왜 더듬어? 하여간 이준영 선생님 말만 나오면 너도 참 과민해. 누가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인 줄 알겠다, 인마. 난 얼굴만 봐도 오금이 저린데 뭐가 좋다고.”
스승과 제자라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지훈의 눈이 쫙 찢어졌다.
“다른 소리 말고 위장관을 하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잘 생각해 봐, 인마. 서연이 아버님 수술 때 누가 들어갔어? 이준영 선생님이야. 이혁민 선생님과 아무리 친하고, 고수라고 해도 음성에서 올라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야. 그런데 다들 못한다는 수술을 어떻게 같이하자고 해?”
손일석이 열변을 토했다.
“그러다 문제 생겼으면 두 분 다 난리 났을 거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정도면 최소한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봐야지. 신기동 선생님을 부른 이유도 생각을 해 봐. 혈관 전문이 아닌데 수술만 잘한다고 부를 수 있겠어?”
김지훈이 거의 뒤로 넘어갔다.
‘으아! 그런 생각도 못하고 간담도를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니 내가 미쳤지. 어이구! 물러도 되나? 아니, 스승님도 그렇지. 위장관을 하셨으면 가볍게 언질만 주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한마디로 날벼락이었다. 손일석이나 신현수나 예리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두 놈의 생각이 같다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한 말이었다.
갑자기 지끈거리는 이마에 책상에 고개를 박던 김지훈이 갸우뚱거렸다. 결정적인 말이 빠져 있었다.
“이준영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야! 그 양반이 내가 뭘 했다고 시시콜콜 얘기를 하는 분이냐? 그래도 현수 말이니까 신뢰도 97퍼센트에 표준 편차가 위아래로 3퍼센트야. 우리가 얻는 정보와는 질이 달라요. 아버지가 이사장님이라는 걸 잊어 먹었어?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위장관은 현수 자리라고 봐야 하나?”
다행히 추측이었다. 김지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손일석의 말마따나 신현수만큼 병원 사정에 정통한 전공의는 있을 수 없었다.
‘솔직히 가능성이 더 높겠지? 제길! 최대 100퍼센트면 거의 확정적이네. 이래서 머리가 잘 돌아가야 하는데.’
김지훈의 표정이 묘해지자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니 마음 다 알지. 근데 김지훈답지 않게 왜 걱정을 해? 우리 과 할 때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잖아. 현수가 위장관 하면 넌 다른 파트를 해야 돼? 정말 하고 싶으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피 터지게 싸워 봐, 인마.”
핵심은 조금 비켜 나갔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른 말보다 정말이라는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들며 눈가를 좁혔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파트? 그래, 그게 핵심이었어. 스승님도 그래서 말씀을 하시지 않은 거야. 무엇을 택하든 결국 열심히 하는 게 먼저야. 에이! 그래도 그렇지, 제자한테 힌트 정도는 주셨어야지.’
은근히 서운한 감정도 있었지만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앞으로 3개월 동안 간담도 파트를 돈다. 백무용 교수는 열심히만 하면 인정해 주는 사람이었다. 금경태 과장 파트를 돌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한다면 조금은 더 확실해질 것이다.
‘일단 이번 삼 개월 동안 간담도를 더 확실히 배우고, 그때도 정말 하고 싶은지 어떤지에 따라 확실하게 결정하자. 세부 전공이 다르다고 스승님이 달라지실 리도 없고, 배우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두근대던 심장이 좀 가라앉았다. 오히려 전의가 불타올랐다.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손일석의 손가락이 머리 옆에서 뱅뱅 돌았다.
월요일 오전인데 의외로 시간이 남았다. 손일석이 턱을 괸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입을 열라는 눈치였다. 듣고 싶은 소리는 따로 있었다.
잠시 상황을 정리한 김지훈이 신중하게 홍재순과의 일을 말해 주었다. 빼야 할 일들은 당연히 뺐다. 특히 금경태 과장의 일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그렇게 된 거야. 사실 얘기하기 껄끄러운 면도 있는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도 잘못한 게 많은 것 같아. 알고 보니까 정말 좋은 선생님이시더라.”
손일석이 굳은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그랬구나. 제길!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 하여튼 넌 정말 알 수가 없는 놈이야.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건 또 잘 집어내. 고맙다. 니 덕분에 실수하지 않겠다.”
“일석아, 다들 홍재순 선생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게 좋을 것 같다. 니 말대로 넌 하오문주라는 사실 잊지 마라. 은밀하고도 비밀스럽게 널리 알려. 특히 현수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지?”
“자식이!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도 입이 그렇게 가벼운 놈이 아냐, 인마. 쯧! 그나저나 현수가 제일 문제네. 작년에 같은 파트를 돌았다면 둘 다 감정이 좋진 않을 거 아냐. 솔직히 나도 당장은 홍재순 선생님 보면서 웃을 자신이 없거든.”
걱정이 가득한 손일석의 얼굴을 보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아마 이번 주 내에 홍재순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힘들다고 해도 모두들 함께 고쳐 가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우리는 무심코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를까?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아픔을 주고 있을까?
내게 아픈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분명히 아픈 일일 것이다.
김지훈이 그간 잘못한 일은 없는지 생각을 했다.
그날 오후, 백무용 교수에게 연락을 받은 김지훈이 홍재순과 함께 외래로 내려갔다. 무언가 나직한 목소리로 한참 대화를 하다 말고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론 공부는 말씀대로 하는 게 참 좋은 것 같은데 천안에서도 그게 될까요? 호석이도 마음에 걸리고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허락하시면 일이 주 정도만 그렇게 하자. 아직도 준비가 덜 된 모양이야.”
“에이! 그런 말은 하지도 마세요.”
두런두런 상의를 하는 사이, 어느새 외래에 도착했다.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가 회의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 왔구나, 지훈아. 재순아, 앉아. 앉아. 커피 마실까? 뭐하니. 빨리 타라. 달다. 아! 맛있다. 참 맛있네.”
생각해 보니 송재덕 과장도 언제나 커피를 달고 살았던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씩을 들고는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백무용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과장님, 아직은 준비가 부족합니다. 특히 수술 녹화 테이프를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지. 음! 그 말이 맞아. 그럼 언제 준비하지? 테이프는 누가 구해?”
“이제 막 텀이 바뀌어서 이번 주는 힘들 것 같고, 다음 주에 상황 봐서 지훈이를 보냈으면 합니다. 의사 협회하고 서울 병원을 들러야 하니까 하루는 그냥 빼 줘야겠는데요?”
송재덕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준비는 철저히 해야지, 철저히. 그래야 실수를 안 하는 법이야. 지훈아, 그렇지? 내 말이 맞지?”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하여간 영문도 모르는 사람에게 훅 치고 들어오는 말 습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예, 과장님.”
“그래. 니가 지훈이지? 지훈이 맞지?”
그냥 대답만 했을 뿐인데 송재덕 과장이 이름을 연발하며 동네 아저씨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지 백무용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홍재순, 김지훈,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이야. 그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미뤄 왔던 라파로(복강경 수술)를 이번에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연수를 갈 상황이 안 돼서, 일단 우리가 직접 필요한 자료를 모두 구해서 준비를 해야 돼.”
드디어 라파로(Laparoscopy:복강경)를?
우연의 일치고는 정말 공교로운 일이었다. 논문에도 도움이 되지만, 간담도 분야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금경태 과장에게 신경을 써야 할 일도 크게 줄 수도 있었다.
혹시 이혁민 교수가 이런 점까지 생각했을까?
분명 그럴 것이다. 새삼 이혁민 교수의 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스승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결코 한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지도 몰랐다.
이미 의사 협회를 다녀와야 한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이었다. 잠깐 옆길로 샜던 김지훈이 백무용 교수의 말에 집중했다.
“지훈아, 수술하는 방식이 조금씩은 다 다를 테니까 라파로로 수술을 한 영상은 가급적 집도의별로 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논문도 충분히 확보해야 돼. 다음 주에 시간 봐서 다녀와.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재순아, 너도 나랑 같이 라파로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지만, 그 전에 미리 준비를 좀 해야 된다. 나도 처음 시작하는 거니까 퍼스트가 정말 중요하다는 건 알지?”
홍재순이 콧등을 찡그렸다. 아직은 자신의 손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더구나 외과 교수들 중 가장 손이 빠른 송재덕 과장이 앞에 있어 더욱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무용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내가 상대적으로 수술이 적어서 소아 외과도 맡기로 했다. 당장은 탈장 정도겠지만 환자 오는 대로 잘 준비하고, 소아과하고도 협조를 잘해야 할 거야.”
김지훈이 입술에 침을 묻혔다. 라파로에 이어 소아 외과까지 전담한다면 수술 건수는 어떨지 몰라도 매 수술마다 정말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홍재순은 더욱 긴장을 했는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공부해야 할 것이 정말 많네요. 그래서 말인데,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
“내일 수술에 호석이 대신 지훈이를 데리고 들어갔으면 합니다. 제가 담낭암 수술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야 퍼스트를 확실하게 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재순은 치프다.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머뭇거리지도 않고 말했다. 이것 또한 그간 쌓여 왔던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무용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재덕 과장도 꽤 놀랐는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훈이를 세컨으로 세우고 싶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그게 왜 퍼스트를 확실하게 설 수 있는 이유가 돼?”
홍재순이 담담한 목소리로 구미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도리어 김지훈이 당황하고 말았다.
“지훈이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았고, 이제야 제 느린 손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는 버렸습니다. 하지만 천안에 오니까 구미와는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번 주, 아니 다음 주 정도까지만 허락해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의 눈길이 마주쳤다. 뜻밖의 말에 막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단단하기만 했던 편견의 벽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송재덕 과장의 눈가에 잔주름이 생겼다.
“홍재순이 변했네. 변했어. 그래, 재순아. 잘 생각했다. 그래야 일반 외과 의사지. 재순아, 열심히 하자. 응? 우리 열심히 하자. 니가 재순이구나. 홍재순이 맞지? 백 교수, 한시름 놨네. 놨어. 허어! 재순이, 너! 허허!”
홍재순의 이름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것이 바로 송재덕 과장의 마음이었다.
“야! 홍재순이 다시 봐야겠다. 그래. 과장님 말씀대로 우리 열심히 해 보자.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분위기가 묘하게 좋아졌다. 홍재순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하실 말씀 더 없으시면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내일 수술 환자에 대한 준비는 철저히 하겠습니다.”
첫 수술이 담낭암이란 사실에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송재덕 과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김지훈이 일어나며 인사를 하자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따라 나왔다.
“지훈아, 니가 지훈이지? 그래. 지훈이구나. 발등을 밟았어? 발등을 밟으면 수술을 잘한단 말이지. 그래, 그렇구나. 많이 밟아라. 팍팍 밟아. 음! 역시 넌 대장을 해야 돼. 지훈아, 대장 하자. 이준영이 신경 쓰지 말고 대장 하자. 허허! 백 교수는 좋겠어. 재순이도 좋고, 2년차도 좋고.”
연이어지는 이름과 웃음소리가 뒤통수를 간지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