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즐거운 변화(?) (1)
일요일 오전 9시.
회진을 올라온 각 파트 전공의들이 모두 홍재순만 보았다. 제시간에 올라와 회진을 도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자신들을 보며 지그시 미소를 짓는 모습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결코 예전에 보았던 비웃음이 아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누군가는 그간 한 행동 때문인지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신현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홍재순의 변화를 누가 가장 궁금해할까? 당연히 하오문 문주를 자처하는 손일석이었다. 이미 안호석에게 어젯밤의 일까지 다 들은 터였다.
하지만 여기는 지옥이라 불리는 천안이었다. 주말에는 가뜩이나 손이 모자라는데 그간의 일을 보고해야 할 김지훈은 당직이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응급실과 툭하면 벌어지는 수술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저녁때가 돼서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텀 교대를 하는 주라 병원에 남아 있던 신현수도 궁금한지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어후! 이놈의 동네는 응급 환자고 수술이고 점점 더 많아지네. 평일에는 그나마 형편이 폈는데, 주말에는 응급실에 툭하면 양방이라 정말 못살겠다. 그건 그렇고 지훈아, 잘 지냈지? 그동안 밀린 얘기는 천천히 하고, 홍재순 선생님 문제부터 풀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째 사람이 변한 것 같다.”
손일석의 눈이 궁금함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김지훈이 대답 대신 눈길만 주었다.
손일석과 신현수는 지난 3개월 동안 천안에 근무했다. 평일에는 그나마 편하다고 했지만 상당히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넥타이도 안 매고, 외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제치고도 자연스러운 신현수를 보니 답이 딱 나왔다. 변하기도 정말 많이 변했다.
전공의 생활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4년차가 없으니 일에 짓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정함과는 상당히 멀어진 신현수와 토끼 눈을 한 손일석의 얼굴에 은근한 승부욕이 솟구쳤다.
‘자식들, 정말 열심히 일했네. 어째 볼 때마다 점점 불안해지냐. 현수도 이제는 외과 전공의라는 티를 팍팍 내는구나.’
“지훈아,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주말 내내 당직을 섰더니 피곤해 죽겠다. 빨리 이 사태를 육하원칙에 맞춰 알기 쉽게 간단히 설명해 봐.”
“무슨 말을 해, 인마. 그냥 보면 돼. 이젠 우리가 알던 홍재순 선생님이 아니야.”
“얼라? 너 나한테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분노의 화신이었어. 저절로 사람이 변할 리는 없고, 막말로 사고라도 나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도 아니잖아. 좋게 말할 때 빨리 말해.”
안달이 난 손일석이 온갖 협박과 회유를 가했지만 김지훈은 웃기만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일어났을 신현수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의국원들의 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는 것이 분명했다.
여전한 놈이나, 변한 놈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께해야 할 동기들이었다. 문득 최고의 써전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니들 얼굴 보니까 정말 좋다. 일석아, 현수야, 우리 모두 파이팅하자. 천안 삼 개월 멋지게 가 보자구.”
김지훈이 힘차게 주먹까지 흔들자 손일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지훈아, 항상 언제나 매일 파이팅을 해야 하는 동네가 천안이야. 너 지금 구미가 아니라 천안에 와 있어, 인마.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김지훈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석아, 현수야, 니들도 논문 새로 받았지? 나는 간담도 쪽을 받았어.”
“어허! 이 자식 봐라. 하라는 말은 안 하고 이젠 아예 대놓고 하극상을 범하네. 확 목을 쳐 버려? 에이! 가뜩이나 논문에 신경 쓰여서 죽겠는데, 그 얘긴 왜 또 꺼내? 그나마 현수는 위암 쪽이지만 난 혈관이야. 천안에서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
“고민스럽겠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 우리가 이론이 좀 모자라잖아. 논문도 써야 하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선생님이 계시네.”
손일석은 물론 신현수까지 눈을 반짝였다.
“그게 누군데?”
“홍재순 선생님. 내가 천안 오면서 미리 이론하고 논문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수술은 몰라도 그쪽은 이거야.”
김지훈이 엄지를 쭉 들어 보이자 손일석과 신현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더구나 외과에서 이론과 실전이 따로 놀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신현수가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김지훈, 홍재순 선생님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신뢰하지 않아. 솔직히 이론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정도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그래, 지훈아. 현수 말이 틀린 건 아냐. 홍재순 선생님한테 배우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불신의 벽은 높았다. 한순간에 깨질 수는 없을 것이다. 첫날부터 이런 말을 하다니 성급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은 이미 홍재순의 이론 실력을 알고 있다. 게다가 가장 강도가 센 천안 근무를 생각할 때,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다가는 3개월 정도는 훌쩍 지나갈 것이다.
김지훈이 나직한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쳤다.
“일석아, 현수야, 혹시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 기억해? 그리고 내가 너희들과 멋진 라이벌이 되고 싶다는 말도 했잖아.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얘기한 거야.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는 거지만, 난 홍재순 선생님에게 이론과 논문을 배울 거야. 니들도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말이었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 법이다. 한동안 김지훈을 응시하던 신현수가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홍재순 선생님은 아니야. 그런데 우리 모두 파이팅하자고 했나? 어쩐지 전과는 느낌이 다른 것 같네.’
김지훈의 눈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최고의 라이벌이 더욱 강력해져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재돼 있던 신현수의 승부욕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현수야, 넌 이 중요한 시점에 어디 가? 인마.”
할 말이 궁했던 신현수가 엉뚱한 말을 했다.
“배고프다. 저녁 안 먹어?”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천안은 주말이라고 해도 치프들과 일일이 시간을 맞춰 가며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1년차들도 시간이 나는 대로 해결할 것이다. 미처 결론도 내지 못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김지훈에게는 찜찜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동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열심히 식판을 비우고 있는 신현수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구내식당에서는 밥도 안 먹었던 놈이 맞나?’
즐거움도 잠시였다. 역시 지옥이라 불리는 천안이었다.
밥도 다 먹기 전에 손일석의 삐삐가 울렸다.
“에휴! 밥 먹을 시간도 안 주네. 나 먼저 일어난다. 지훈아, 스탠바이하고 있어라.”
허겁지겁 밥을 쑤셔 넣은 손일석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곧 김지훈도 가운을 휘날리며 응급실로 달려갔다.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지독히도 바쁜 천안이었다. 그 와중에도 하루 종일 치프들을 포함해 모든 전공의들이 홍재순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날 밤, 전공의들이 제각기 머리를 맞댄 후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홍재순은 확실히 변했다.
단 한 가지 일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연이어 벌어지는 응급 수술 때문에 당직 전공의들이 자신의 파트 환자들을 제때에 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전화를 받은 홍재순이 직접 환자를 보고 해결해 준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어.”
눈알이 뱅뱅 돌 정도로 응급 수술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홍재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할 정도니, 사건은 사건이었다.
***
월요일 아침, 천안 병원에서의 정식 근무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위장관 파트의 박경일 교수가 올라왔고, 뒤이어 간담도 파트를 맡고 있는 백무용 교수가 올라왔다.
김지훈과 홍재순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응, 지훈이구나. 너 내 파트 처음 돌지?”
“예. 처음 돕니다.”
“열심히 하자. 홍재순 선생은 1년차 때 한 번 돌았지?”
고개를 끄덕인 백무용 교수가 병실로 향했다.
모든 전공의를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지만, 홍재순은 워낙 악명 아닌 악명이 높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치프까지 된 마당이라 더욱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첫 회진부터 뭔가 예상과는 달랐다. 김지훈과 함께 바짝 자신의 뒤를 따르던 홍재순이 안호석의 말문이 막히자 먼저 나선 것이다.
“이 환자 오늘 아침에 찍은 사진과 검사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가벼운 장 마비 증세인 것 같습니다.”
홍재순이 이렇게 적극적이었나?
손이 느린 것만큼 환자 파악도 느리다고 했는데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치프다운 모습이었다.
백무용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난하게 첫 회진을 마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그때 송재덕 과장도 막 회진을 마쳤다.
김지훈의 입가에 웃음이 팍 돌았다.
“어라? 너 누구냐? 누구야?
“김지훈입니다, 선생님.”
“응, 그래. 지훈이구나. 니가 김지훈이지. 잘 왔다. 잘 왔어. 백 교수 파트구나. 에이! 간담도는 재미없다. 대장이 재밌어, 대장이. 지훈아, 대장이 재밌다. 알지? 몰라?”
원래 조금은 두서없이 말하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심했다. 난데없이 간담도와 대장은 왜 꺼낸 것일까?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리자 송재덕 과장이 인심 좋은 동네 아저씨 미소를 지었다.
“음! 그래그래. 이따 보자. 백 교수, 나 수술 끝나면 바로 보자. 오늘부터 시작하는 거지? 어때? 좋지?”
“예. 수술 끝난 후 외래 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그때 보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수술 방으로 향하던 송재덕 과장이 갑자기 휙 돌아서며 말했다.
“지훈아, 대장이 재밌다, 대장이. 알지? 일석이하고 현수 저놈들은 안 돼. 에이! 넌 쟤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라. 알았지? 친하게 지내지 마.”
아무리 정신없게 말을 해도, 그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담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대장과 간담도 파트, 그리고 손일석과 신현수, 요 네 마디가 핵심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재덕 과장은 위장관 파트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대장 항문 파트를 입에 달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게다가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병동 일을 끝내고 잠시 한가한 틈에 손일석을 불렀다.
“일석아, 과장님 왜 저러셔? 갑자기 대장은 또 뭐야?”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궁금하지? 나도 궁금한 게 있네. 세상은 말이야. 오고 가는 게 있어야 웃음이 꽃피면서 살 만해지는 거다. 홍재순 선생님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홍재순 선생님이 머리에 벼락을 맞지 않았으면 분명히 니가 원인이야. 공연히 구미에 전화하게 만들지 마라.”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손일석이었다. 그러나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일이기에 홍재순의 사연을 모조리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얘기가 길어.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과장님이 왜 저러시는지 그 말부터 해 봐. 그리고 오늘 수술 스케줄 보니까 과장님이 대장 수술을 하시고, 박경일 선생님은 위암 수술을 하시네. 아무리 파트 구분이 애매모호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잖아? 혹시 파트 조정 같은 게 있었어?”
아직은 천안 병원만이 아니라 많은 대학 병원들이 파트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있었다. 명목상은 위장관 파트라고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간담도나 대장 수술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일반 외과 의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시대적 추세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확실하게 책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일반 종합 병원이라면 모르지만, 최종 의료 기관이자 교육까지 담당하고 있는 대학 병원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 이제 머리에 피 좀 마르는구나. 눈치가 좀 생겼어. 우리가 오자마자 과장님이 천안도 이제부터 확실하게 파트 구분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셨어.”
“그래? 그럼 과장님이 대장 항문 파트를 맡으신 거야?”
“놀랐지? 나도 과장님이 원래 대장 항문 파트를 세부 전공으로 하셨다는 말을 듣고 엄청 놀랐다. 위암 수술할 때 보면 평생 동안 위만 만졌던 분 같았는데, 역시 만류귀종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흔치 않은 한자성어였다. 그렇다면 분명 무협이다.
“만류귀종? 그건 또 뭐냐?”
“결국에는 모든 게 하나로 모인다는 말이야. 공부 좀 해라, 인마. 뭐 그건 그렇고, 하여튼 대장이든 위장이든 수술의 원칙은 다를 게 없잖아. 결국 고수의 반열에 오르면 다 잘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뭘 하든 결국 외과는 수술 아니냐.”
뭔가 심오한 소리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개똥철학이었다. 물론 맞는 말도 있지만 수술과 환자에 관한 한 독불장군은 없었다. 사실 그 점 하나만큼은 김지훈이나 손일석도 잘 알고 있었다.
“에휴! 그래. 고수는 그렇다 치고, 니들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고라도 쳤어?”
“사고는 무슨! 내가 사고를 칠 사람이냐. 어후! 나하고 현수한테 대장 항문을 하라고 얼마나 말씀을 하시던지 아주 귀에 못이 박혔다. 이젠 대장이라는 소리만 들려도 소름이 돋다 못해 자다 말고 깬다니까.”
“그래? 그럼 좋은 일이네. 과장님이 니들을 엄청 잘 봤다는 거 아냐.”
“그럼 니가 하든지. 엄청 좋아하실 거다. 그리고 난 혈관이란 거 잊었어? 신기동 선생님만이 내 희망이요, 불빛이야. 이 마음을 왜 몰라주실까!”
손일석이 한탄을 했다.
“현수는?”
“현수는 위장관 쪽에 관심이 많은가 봐.”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어쩌면 이준영 과장에게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줄어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승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이것만은 도저히 양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논문을 위암으로 받았나? 이혁민 선생님한테 배우면 확실하겠네.”
“물론 당연한 말이긴 한데 말이야. 현수 말을 들어 보니까 아무래도 이준영 선생님도 위장관 쪽인 것 같아.”
허걱! 이게 무슨 소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