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마지막 날의 불꽃 (3)
또 아뻬다. 그것도 부족해 빤뻬리까지 하나 더 있었다. 그렇다고 산부인과 수술이 없었을까?
토요일에 이럴 수는 없었다. 스케줄을 받아 든 이용철 과장이 헛웃음만 내뱉었다.
아무리 사명감이 투철하다고 해도 짜증이 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적절한 윤활유가 필요한 법이었다.
“과장님, 제가 오늘 저녁 거하게 쏘겠습니다. 마취과하고 수술 방 간호사들까지 다요. 그러니까 딱 두 개만 더 하죠.”
송동화 과장의 말에 이용철 과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거하게’라는 소리에 댓 발이나 나왔던 간호사들의 입이 쏙 들어갔다. 사실 밥을 사든 안 사든 수술은 해야 한다. 그래도 즐거우면 힘이 덜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떠나야 할 사람들에겐 떡고물도 안 떨어진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아뻬만 모두 10개를 했다. 수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지훈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오래간만에 응급실 환자를 봐서 그런가 힘들다. 홍재순 선생님, 도훈이하고 마지막으로 한 개만 딱 하고 가세요. 지훈아, 너도 힘들지? 빤뻬리만 하고 가. 정말 마지막이다. 다음 텀은 왜 안 오는 거야?”
퍼스트와 집도의는 차원이 다르다.
마지막이 아니면 어떠리!
뱃가죽이 등에 붙은들 또 어떠리!
송동화 과장의 엄살이 왜 이렇게 즐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입이 쫙 찢어진 김지훈과 홍재순이 신 나게 수술 준비를 했다.
아뻬와 동시에 빤뻬리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이경석이 구미에 도착했다. 병동에는 아무도 없고, 수술이 계속 있다는 소리에 덧가운을 입고는 수술 방을 기웃거렸다.
홍재순이 아뻬를 하고 있었다.
‘뭐야? 재순이가 지금 이 시간까지 출발도 미루고 수술을 하고 있는 거야? 설마 손이 느린 것 때문에 지금까지 수술을 하는 건 아니겠지?’
수술실로 들어간 이경석이 눈만 껌벅거렸다. 분명 기척 소리를 들었을 텐데 홍재순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홍재순은 이 정도로 수술에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슬며시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경석이 당황스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 재순이가 수술을 이렇게 잘했었나? 아니잖아. 그 느림보 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거기다 도훈이가 퍼스트를 서? 송동화 과장님은 재순이한테 수술을 주시고 어디 계신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조심스럽게 수술실을 나온 이경석이 송동화 과장을 찾았다. 바로 옆방에서 김지훈과 빤뻬리 수술을 하고 있었다.
‘양방이었네. 어라? 지훈이가 수술을 하네?’
수술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간 근무 지역이 겹치질 않았다. 입국식 때 우연히 퍼스트를 서는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집도를 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은근한 호기심에 이경석이 고개를 빼 들었다. 나름 수술에 자신을 갖고 있던 이경석이 김지훈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지훈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한숨이 터졌다. 입맛만 다셨다.
소문은 정말 믿을 게 못 됐다.
‘아! 저 자식, 수술 잘한다는 소리가 괜히 들린 게 아니었네. 후우! 정말 잘한다. 정말 기가 차네.’
곧 아뻬 수술이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빤뻬리도 끝났다. 7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못하고 무려 12개의 수술을 한 것이다. 구미에서의 마지막 날을 정말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제야 김지훈과 홍재순이 이경석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후! 경석이 형, 조금만 일찍 오시지. 지금까지 수술하느라고 출발도 못했잖아요. 배고파 죽겠네.”
즐거운 투정이었다.
“이경석 선생, 별일 없었지? 환자들 잘 부탁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홍재순이 맞나?
이경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하는 손만이 아니라 말투까지 달라져 있었다.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분명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더구나 환자를 부탁한다는 말까지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깜짝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출발해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김지훈과 홍재순이 이경석과 함께 회진을 돈 것이다.
환자에 대한 열의 하면 김지훈이었기에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홍재순은 결코 그런 전공의가 아니었다.
“형, 시간이 없으니까 오늘 수술한 사람들만 함께 봐요.”
이경석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려 12개였다. 양방을 벌려 시간당 2명씩 한다고 해도 6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것도 모두 아뻬일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줄줄이 시간을 딱딱 맞춰 왔을 리도 없었다. 중간에 간호사들이 수술 방 준비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게다가 수술 기구가 모자랐을 테니 소독을 해야 하는 시간까지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 홍재순이 무려 5개나 했다. 느리다고 정평이 난 손까지 고려하면 도무지 계산이 되질 않았다. 최소한 두세 시간은 더 걸렸어야 했다. 아니, 그 이상을 잡아도 무방했다.
멍한 표정의 이경석을 뒤로한 김지훈이 마지막으로 최동빈을 찾았다. 천안 병원으로 떠난다는 말에 오성미가 눈가를 붉혔다. 현주와 둘째를 안고는 볼에 입을 맞춘 후 병실을 나왔다. 그때까지 홍재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아, 늦었다. 빨리 가자.”
“예, 선생님.”
오고 가는 말투가 이상하게 정겨웠다. 전공의들 사이에 흔히 오가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경석이 급기야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동안 근무 지역을 옮기면서 이해하지 못할 상황을 이렇게 많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놀라움을 잔뜩 남긴 김지훈과 홍재순이 구미를 떠나 천안으로 향했다.
김지훈은 이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루에 아뻬만 11개를 한 날을 말이다.
이경석이 부리나케 서도훈을 찾았다.
“홍재순 선생님이요? 듣던 말과는 다르게 수술 잘하시던데요. 저도 겁먹고 왔는데 한 번도 큰 소리가 안 나왔어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 쉬고 있었는지 송동화 과장이 뒤늦게 모습을 보였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경석 선생님, 이번 달에 우리가 산부인과보다 수술을 두 개 더 했네. 대단하죠? 마취과하고 밥 먹기로 했으니까 바로 갑시다.”
홍재순이 돌고 난 자리에서 웃음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경석이 머리를 흔들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홍재순이 이런 식으로 고민거리를 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재주 부린 놈들은 가고 밥은 이경석이 대신 먹었다.
그 시간, 김지훈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바아아앙!
굉음과 함께 홍재순의 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휴게실에서 저녁 사 준다고 하더니 저렇게 빨리 가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도대체 손은 왜 느렸던 거야?’
홍재순은 레이서였다. 밟아도 너무 심하게 밟았다.
김지훈이 최선을 다해 액셀을 밟았지만,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참 늦은 후였다. 홍재순이 씨익 웃으며 구운 감자 한 통과 맥반석 오징어, 그리고 환타 한 병을 내밀었다.
“지훈아, 저녁 먹을 시간이 없다. 이걸로 때워.”
“선생님은 드셨어요?”
“나? 그냥 간단하게 짜장면 한 그릇 먹었어. 곱빼기로.”
우물우물 감자를 씹던 김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천안은 여전히 예전 분위기일 것이다. 홍재순에게 힘든 날이 또 이어질지도 몰랐다.
“선생님, 그런데 천안 선생님들도 그러셨나요? 송재덕 과장님도 그렇고, 백무용 선생님도 그럴 분들이 아니시잖아요? 사실 서울 병원 선생님들도 안 그러셨을 것 같은데.”
무슨 의미인지 빤했다. 전공의들만이 아니라 교수들의 시선도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물론 일부 교수들은 당연히 그랬다.
“걱정돼? 우리 아버지가 치질 전문 병원을 하셔. 금경태가 날 고려해 준다고 주로 대장 항문 파트를 돌리더라. 그 덕에 구영선 교수나 임동완 교수에게는 찍혔지. 사실 다른 선생님들도 시선이 곱지는 못했어. 그나마 이혁민 선생님이나 송재덕 선생님은 관심을 주긴 하셨는데, 내가 워낙 개판을 쳤잖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야야야 소리 안 들은 게 천만다행이다.”
웃고 있는 홍재순의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맺혔다. 미안한 기색도 있었지만 트라우마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즐거운 일은 있기 마련이었다.
역시 이혁민 선생님이나 송재덕 과장님은 달랐다. 언제나 믿고 따를 수 있는 교수들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거리다 말고 눈을 반짝였다.
‘흐음! 이혁민 선생님……. 논문은 언제 쓰나. 응? 홍재순 선생님이 금경태 과장도 놀랄 만한 논문을 썼잖아. 그렇다면 그 능력을 더 배워야지. 요거 잘하면 앞으로 삼 개월 안에 괜찮은 논문 하나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가만, 이런 기회를 나 혼자 독식하면 나쁜 놈이란 소리 듣겠지?’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아니, 한 번에 3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지훈은 이론과 논문을 잡고, 홍재순은 그간의 편견을 깰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손일석과 신현수는 함께 꿈을 이루고 싶은 라이벌이자 친구였다.
“선생님, 천안에서도 이론과 논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 바쁜 동네에서 시간이 되겠어?”
“에이! 시간 없는 동네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일석이하고 현수까지 포함입니다.”
“일석이하고 현수?”
홍재순이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신현수가 1년차 때 홍재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홍재순이 변했듯 신현수도 변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한 식구라면 필히 거쳐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지훈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2년차 세 명 정도는 책임지실 능력이 있으시잖아요. 그 자식들 말 안 들으면 제가 아주 박살을 내겠습니다. 다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 줄지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홍재순이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참 뻔뻔하지만 너도 얼굴이 보통 두꺼운 게 아니다. 현수하고 어땠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그래, 해 보자. 단, 세 놈이라고 슬슬 넘어가지는 않아.”
“타는 데는 이력이 난 놈들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을 괜히 꺼냈나?
부릉부릉! 빠아아아아아아앙!
한 번 레이서는 영원한 레이서였다. 전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의외였지만 솔직히 손만 느렸던 홍재순이었다.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밟아 천안 병원에 도착했다. 그래도 홍재순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차트를 쌓아 놓고 기다리던 안호석이 급히 홍재순에게 연락을 했다.
“자식이! 느려 터져서. 차는 왜 갖고 다녀?”
“어후! 선생님이 너무 빨리 가신 거죠. 에이! 난 밥도 못 먹고 이게 뭐예요? 똥차라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살살 밟았어, 인마. 늦었다. 빨리 차트 보자.”
안호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이건 무슨 상황이야?’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홍재순과 같은 파트라는 사실에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김지훈이 있으니 그래도 큰 탈은 없을 것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김지훈의 언동은 자연스럽다 못해 과감했고, 홍재순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부드러웠다. 더구나 홍재순이 이 늦은 밤에도 김지훈이 오자마자 차트를 확인하다니 놀랄 노 자였다. 들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안호석, 환자 파악은 확실히 했지? 지금 회진을 돌기에는 너무 늦었으니까, 우리가 차트 보는 동안 특별한 문제가 있는 환자는 바로바로 얘기해.”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김지훈은 아마도 홍재순과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믿은 안호석이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차트를 보며 오더까지 모두 확인한 홍재순이 기지개를 폈다. 김지훈도 생각보다 편안한 자세로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지훈아, 우린 오늘 당직이 아니란다. 야식이나 먹을까?”
“야! 선생님, 너무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번데기 탕 어떠세요? 호석이 어머니가 병원 앞에서 슈퍼 하시는데, 이게 끝내줍니다. 아무나 끓여 주시지도 않고요.”
“그래? 호석이 넌?”
“예? 저는 오늘 백(back)이기는 하지만 당직인데요.”
“인마, 누가 술 먹으래? 그래서 넌 안 먹을 거야?”
“아닙니다, 선생님. 저도 배고픕니다.”
정말 간만에 안호석의 어머니를 찾았다. 맥주는 예의상 한 말일 뿐이었다. 고소하고 매콤한 번데기 탕에 소주를 곁들였다. 홍재순은 딱 한 잔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김지훈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어머니, 잘 먹고 갑니다. 역시 번데기 탕은 최고예요.”
“그래. 언제든 또 와. 홍재순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예, 어머니.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호석이 데리고 또 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치프를 누가 조심하라고 했단 말인가?
일만 제대로 하면 어느 파트보다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았다.
이경석에 이어 안호석도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