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46화 (346/1,329)

제9화 마지막 날의 불꽃 (2)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는지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언젠가는 이 문제가 금경태의 발목을 잡을 거야. 네가 당한 일을 더하고, 약점 한두 개만 더 잡으면 우리한테 살려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릴 수도 있어.”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어떤 논문이기에 그런 말까지 하세요?”

“내가 쓴 논문이 세계 학회에서 발표가 됐어. 제1저자에 금경태라는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데. 발표를 도운 신현수 이름까지 올라갔는데 내 이름은 없었어. 근 일 년 동안 쓴 논문이었는데. 후우! 그 정도 되면 표절이 아니라 절도지?”

홍재순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김지훈은 입도 열지 못했다.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제자의 논문을 가로채 다른 곳도 아닌 세계 학회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간혹 전공의의 논문을 자신이 쓴 것처럼 발표하는 일이 있어 구설수에 오르는 교수들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2저자에 전공의의 이름을 올려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물며 세계 학회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건 지금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홍재순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지훈아, 금경태가 어떤 인간인데 내가 쓴 걸 그대로 냈겠어? 많이 만졌더라. 하지만 환자 케이스 인용은 물론 도입부나 결론까지, 중요한 대목은 똑같으니까 표절이라는 건 부인하지 못해. 하지만 난 전공의에 불과하잖아. 지금 금경태가 가진 힘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이 상태에서 폭로해 봤자 도리어 내가 옷을 벗어야 될걸? 그러니까 너도 알고만 있어. 내가 언젠가는 금경태 옷을 벗기고 말 거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데 증거는 있어요?”

“금경태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지. 내가 쓴 논문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싶더라. 그래서 세계 학회가 열리기 한참 전에 외과 학회에 예비 심사를 요청했거든. 근데 지도 교수 이름이 없어서 심사가 보류됐어. 여기 오기 전에 확인을 했는데 아직도 잘 모셔져 있더라. 그 논문이 바로 증거야. 몇 부 복사하고 제출 시점까지 정확하게 확인해 놨어.”

이 정도면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정말 충격적이고도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은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 그런 짓까지 했을까?

관행이라고, 혹은 전공의는 찍소리도 못한다는 현실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정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었다.

‘돈도 모자라 제자의 논문까지 표절을 해? 도대체 그 인간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지?’

전공의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감싸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사람이 과장이다. 그런데 도리어 제자들을 이용하고 버리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꿈과 희망까지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기껏 옹호해 준다는 것이 정갑수였다.

반드시 제거해야 할 사회의 암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마동식이 일반 외과 내에도 있었다. 그것도 가장 막강한 자리인 서울 병원의 과장으로 말이다.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분노까지 솟구쳤다. 가슴이 너무도 답답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난 김지훈이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이를 악물었다.

“어후! 이 개……. 정말 사람도 아니네. 선생님, 그걸 어떻게 참으셨어요. 지금 당장 이혁민 선생님에게라도 말씀드리죠. 이대로 지나갈 일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 과 전체가 걸린 문제예요.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잖아요.”

속마음을 거칠게 토해 낸 김지훈의 눈이 번들거렸다. 홍재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당장 모든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눈빛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보고만 있던 홍재순이 낮고 긴 숨을 내뱉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지훈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솔직히 표절만으로는 부족해. 우린 전공의고, 금경태는 과장이자 부원장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난 금경태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어. 바닥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다.”

홍재순의 눈빛과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렇다. 냉정해야 할 때였다. 산재 문제도 정훈철이 아니었으면 어떤 몸부림을 쳤어도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을 것이다. 무작정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치던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다 이대로 끝나는 것 아닙니까? 금경태 과장이 어떤 짓을 해도 우리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 인간이 한 짓을 모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제 마음대로 이용하고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인데 정말 모를 수 있을까?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현실을 외면하지만 않으면 돼. 내가 장담한다. 멀지 않았어.”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금경태 과장의 전횡과 부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일반 외과라는 작은 사회를 위한 길이었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홍재순이 씨익 웃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이렇게 흥분하는 놈이 그동안은 어떻게 참았어? 지훈아, 나중에 내가 금경태가 그간 저지른 짓을 터트리면 날 도와줄 거지?”

정말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장례식장 운영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금경태 과장이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서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홍재순이 당한 일은 결코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일반 외과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금경태는 과장은커녕 의사로서의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홍재순 선생님의 말이 맞아. 당장 목소리를 높여 봐야 도리어 우리만 다칠 수도 있어. 대신 절대 잊지 말자. 내 자신만이 아니라 일반 외과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알려야 할 일이야.’

문득 최동빈이 떠올랐다.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걸고 옳은 일을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최동빈에게 배운 것은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만이 아니었다.

눈빛을 굳히던 김지훈이 홍재순을 보다 말고 갑자기 웃었다. 이런 비밀까지 공유하다니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묘했다.

“저도 금경태라고 부르고 싶어지네요. 그런데 선생님,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만일 금경태 과장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홍재순이 미소를 머금으며 어깨를 잡았다.

“닐 믿어 주는 놈에게 못할 말이 뭐가 있어? 솔직히 너한테만은 진정한 치프가 되고 싶다.”

홍재순과 이런 말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대하고 믿어 준다면, 그 사람도 날 위해 주고 믿어 주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일 것이다.

뿌듯한 마음도 잠시, 금경태 과장의 일이 다시 뒷목을 뻐근하게 했다.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선생님, 그럼 제게 말씀하실 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만일 제가 먼저 말을 하게 되면 그땐 선생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피해를 보는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만일 또 다른 누군가가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이미 당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김지훈의 굳은 결심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상하게 듣기가 좋은 말이었다. 김지훈이 휙 돌아서며 힘차게 주먹을 흔들었다.

“선생님, 파이팅입니다.”

분위기를 확 바꾸는 목소리에 홍재순이 갑자기 웃었다.

“지훈아, 너 천안에서 백무용 선생님 파트 돌지?”

“예. 선생님을 삼 개월 더 봐야 합니다.”

“왜? 싫어?”

김지훈이 대답도 없이 쪼르르 사라졌다.

홍재순이 머리 뒤에 두 손을 포개며 눈을 감았다. 눈가에 드리워졌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며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금경태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을 함께 무너트릴 수 있는 든든한 동지가 한 명 생긴 것이다.

***

토요일 오전, 구미에서의 마지막 근무가 시작됐다.

회진을 올라온 송동화 과장이 투덜거렸다.

“에이! 이번 달에는 수술을 상당히 많이 했다 싶어서 산부인과보다 더 많이 했는지 알았는데, 그래도 대여섯 개 정도 모자라네. 지훈아, 다음 텀에서는 될까? 힘들겠지?”

무슨 수로 제왕수술의 강자인 산부인과를 이긴단 말인가?

사실 그 어떤 달보다 수술을 많이 했다. 생각해 보면 수술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참 다사다난했던 구미 근무였다.

그런 생각들 때문인지 토요일 오전 회진을 마치고 나니 그 어느 때보다도 시원섭섭했다.

그래도 이젠 구미와 작별을 해야 할 때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구미 생활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야! 정말 가는 날까지 아뻬가 뜨네. 정말 밭이다, 밭. 누가 아뻬 씨를 뿌리기라도 하나?”

환자를 보고 홍재순에게 노티를 했다.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응급실에 내려온 홍재순의 입가에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까지 한 수술이 이제는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구미에서의 마지막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실에 들어온 송동화 과장이 고민스러운 눈초리로 김지훈과 홍재순을 번갈아 보았다. 마치 누구에게 마지막 수술을 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결론이 났다. 나이는 어리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준 고마운 놈이 눈앞에 있었다. 이 정도는 해 주는 것이 마땅했다.

“지훈아, 수술하자. 홍재순 선생님, 퍼스트 서세요.”

아싸! 내가 한다.

지겹도록 본 아뻬였지만 수술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김지훈이 탄식을 터트리는 홍재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수술을 시작했다.

김지훈의 손이 펄펄 날았다. 오로지 수술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수술을 참관하던 송동화 과장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서도훈이 빨간색으로 물든 스케줄을 들고 들어왔다.

“홍재순 선생님, 아뻬가 하나 더 있는데 양방으로 하신답니다. 제가 퍼스트 들어갑니다.”

“응, 알았어.”

홍재순의 목소리에 실망이 잔뜩 배어 있었다.

가볍게 첫 번째 아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두 번째 아뻬가 시작됐다.

어느새 12시였다. 이제 오후 회진을 돌고 나면 천안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또 콜이 왔다.

“뭐? 아뻬가 의심된다고?”

부리나케 응급실로 달려간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아뻬였다. 가끔 환자 3명이 연속으로 와 수술하는 일이 있긴 했다. 평소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오늘은 다소 곤란하다는 생각이 조금, 아주 조금은 들었다.

급히 수술 방으로 올라가 노티를 하자 송동화 과장이 숨도 안 쉬고 말했다.

“지훈아, 홍재순 선생님에게 빨리 수술하라고 해. 끝나면 바로 출발해. 회진은 도훈이하고 돌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선생님.”

세 번째 아뻬가 시작됐다.

홍재순이 손가락을 꺾으며 전의를 다졌다. 구미에서의 마지막 수술을 멋지게 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타는 눈빛이 부끄럽지 않게 수술을 진행했다.

그런데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서도훈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두 장의 응급 수술 스케줄이 휘날렸다.

이미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김지훈과 홍재순이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원칙적으로는 다음 텀이 도착할 때까지 송동화 과장과 서도훈이 순차적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환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훈아, 과장님께 우리 가야 한다고 말씀드려.”

“그게요. 송동화 선생님께서 한 명은 복막염까지 진행된 것 같다고, 나머지 한 명만 더 하고 가시랍니다. 주말에 텀 교대까지 겹쳐서 그러시나 봐요. 그리고 이번에는 선생님이 하시라는데요.”

응? 수술을 준다고?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어차피 다음 텀을 같이 돈다. 홍재순이 괜찮다고만 하면 천안에는 조금 늦게 도착해도 상관없었다.

김지훈이 간절한 눈빛으로 홍재순을 보았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지훈아, 그렇게 수술을 하고 싶어? 빨리하고 가자.”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수술이 양방으로 벌어졌다. 연속해서 아뻬만 5개가 이어지다니 이런 날은 없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아뻬가 그야말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가야 된다고 말은 하면서도 송동화 과장이 수술을 주면 두말 않고 다시 손을 씻었다.

김지훈이나 홍재순이나 똑같았다.

계속해서 양방이 이어졌다. 인원만 충분했으면 세 방에서 수술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마침내 두 자릿수에 도달했다.

어떻게 그중에서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아뻬인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송동화 과장은 끝까지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과 홍재순이 없었다면 아직도 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네다섯 명은 남았을 것이다.

어느새 5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홍재순은 아예 입이 찢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술을 4개나 했다. 더구나 아뻬만 연속으로 한 덕분인지 희한할 정도로 손에 자신이 붙고 있었다.

송동화 과장과 홍재순이 마지막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땀에 푹 절어 버린 김지훈이 슬쩍슬쩍 기지개를 펴며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그때 마취과와 수술 방 간호사들이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고함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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