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마지막 날의 불꽃 (1)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구미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회식 장소로 향하는 송동화 과장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오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금경태 과장이었다.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통화를 하고 나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지훈이 덕에 홍재순 선생 문제는 잘 해결됐지만 금경태 과장님의 본심은 뭘까? 신경 쓰지 말라면서도 홍재순 선생을 챙겨 줬는지 확인까지 하시는 걸 보면 뭔가 있다는 소린데, 알 수가 없네. 지훈이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뛰어나기 때문일까?’
김지훈과 홍재순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을 남겼다. 그 때문인지 금경태 과장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수술 건수를 채웠다고? 그럼 홍재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그리고 김지훈 말이야. 수술 좀 줬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몰라도 송동화 과장의 입장에서 많이 주지는 못했다. 김지훈은 아직 기회가 많았기에 치프인 홍재순을 먼저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지훈이 아니었으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경태 과장에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송 과장, 사람이 왜 그렇게 흐릿해. 홍재순하고 김지훈 중에 누구를 먼저 챙겨야 하는지도 몰라? 나중에 송 과장 밑으로 들어올 수도 있어. 시시껄렁한 놈들 여럿 뽑아야 도움도 안 돼. 확실한 놈 하나 제대로 잡는 게 낫단 말이야. 에이!’
까닭 모를 짜증이었다.
‘송 과장도 정신 바짝 차려.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야. 우리 과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중심을 확실히 잡고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야 하는데, 누가 중심이 돼야겠어? 송 과장하고 김지훈만큼은 확실하게 책임지고 싶으니까 날 실망시키지 마.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될 수도 있어.’
실망이라니?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기분 나쁜 말이었다. 끌어준다면서도 구미 병원의 과장으로서 어떤 수술을 했고, 과를 어떻게 운영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회식 장소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김지훈과 홍재순이 벌떡 일어났다. 물론 서도훈은 거의 차렷 자세였다. 그게 1년차였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김지훈의 목소리가 밝기만 했다.
언제 콜을 받을지 모르지만 회식은 회식이다. 설혹 환자가 와도 서도훈이 있으니 먹을 시간 정도는 충분히 나올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돼지가 아닌 소였다. 원래 고기를 아는 사람은 돼지를 더 좋아한다지만, 소다. 소고기 중에서도 등심은 특히 비싸다. 그것만으로도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홍재순 선생님, 오늘은 믿고 마실 테니까 환자 오면 지훈이랑 함께 잘 봐요. 그동안 마음 놓고 술 한 잔을 못했네.”
홍재순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살짝 붉어졌다. 구미 병원은 누가 과장을 하든 힘든 곳이었다. 하다 못해 전공의처럼 오프를 정해 놓고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치프를 믿지 못하면 몸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송동화 과장에게 이번 텀은 더욱 힘들었다. 초반에는 홍재순을 믿을 수 없어서 그랬고, 중반 이후에는 홍재순에게 수술을 하나라도 더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김지훈의 마음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글지글! 지글지글!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송동화 과장이 연신 술을 들이켰다. 홍재순이야 원래 술을 못하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김지훈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안주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싼 등심이다. 무조건 즐거운 자리였다.
김지훈과 서도훈이 미친 듯이 소고기에 집중했다.
소주 한 병이 사라졌다.
슬슬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한 송동화 과장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북돋았다. 김지훈이 열심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결코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등심이 거의 사라질 무렵, 막강한 경쟁자였던 서도훈이 응급실 콜을 받았다. 김지훈이 그제야 다소 여유를 찾았다.
가장 불쌍한 1년차를 두고 이래도 되는 걸까?
소주 한 병이 더 사라졌다.
술기운이 확 오른 송동화 과장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 탓인지 한참 그간의 일을 얘기하다 말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어쩌면 서도훈이 자리에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홍재순 선생님, 도대체 금경태 과장님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김지훈, 너는 또 뭐냐? 과장님이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네.”
김지훈과 홍재순이 당황하면서도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금경태 과장과 관계가 있을 줄은 둘 다 몰랐다. 김지훈이야 좋은 일도 아닌데 떠벌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홍재순도?
홍재순이 어색하게 웃었다.
“별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금경태 과장님도 그러더니 홍재순 선생님도 똑같은 말을 하네요. 얘기하기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선생님 일은 그렇다고 치고, 그럼 지훈이 너는?”
김지훈이야말로 의아한 일이었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변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송동화 과장에게 전화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신경을 쓴다니,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야?’
도리어 김지훈이 물었다.
“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장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한참 동안 김지훈을 응시하던 송동화 과장이 소주잔을 비우며 피식 웃었다. 술김에 실수를 했다.
구미로 오기 직전 서울에서 만났다. 그때 이미 김지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더구나 금경태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전공의보다 모를 수는 없었다. 이득이 없거나,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뭔가 득이 되기 때문에 신경을 쓸 것이다. 김지훈이 그 이유를 알든 모르든 말이다.
“아니다. 됐다. 마시자.”
술잔을 잡던 송동화 과장이 갑자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홍재순이 온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송재덕 과장이 전화로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금경태 과장의 말과 묘하게 겹쳤다.
‘송 과장, 재순이 잘 가르쳐라. 그놈 이제 치프야, 치프. 일 좀 해야 하잖아. 손은? 손은 빨라졌어?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쉽게 고쳐질 손이 아니지. 에휴! 그놈의 자식도 외과 의사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응? 송 과장, 어떻게 하면 좋겠어? 몇 대 맞으면 정신 좀 차릴까? 천안에 오면 막 때릴까? 어이구! 아니다, 아니다. 송 과장, 잘 가르쳐라. 학교 선배라고 봐주면 안 돼. 말 안 들으면 막 때려. 알았지? 알았니?’
속사포처럼 터진 말이었다.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급한 환자가 왔는지 송재덕 과장이 미안하다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분명했다.
교수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전공의를 자식이라고 부르는 송재덕 과장이었다. 자신의 말처럼 미우나 고우나 홍재순 역시 일반 외과 식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마음은 없었다.
불현듯 김지훈과 송재덕 과장에게 부끄러워졌다. 같은 일반 외과 식구라는 사실 하나로 홍재순을 챙겼다. 그런데 자신은 서울로 발령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가장 중요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 살았다.
금경태 과장의 말을 떠올리자 그 점이 더욱 극명해졌다. 더구나 인사만큼 원칙이 중요한 부분은 없다. 개인적인 친분만으로 무리하게 서울로 올라가면 그만한 부작용이 뒤따를 것이다. 천안에서와는 달리 서울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구영선 교수를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마음과 능력으로 만든 인맥이 아니면 모래성에 불과했다.
‘라인이고 뭐고 저런 놈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너 정도면 금경태 과장님이 아니더라도 끌어줄 분들이 많을 거다. 나도 김지훈 너를 보면서 느낀 게 많다. 원칙대로 가자. 능력이 되면 올라가는 거고, 안 되면 될 때까지 더 노력하는 게 맞아.’
김지훈을 보는 송동화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갑자기 뭔가 개운해진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팍팍 들어갔다. 마치 회식을 이제 시작한 것처럼 술잔을 비웠다. 은근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우리 등심 2인분에 딱 소주 한 병만 더 먹자.”
우리는 무슨!
소주는 송동화 과장의 입으로 사라지고, 등심은 당연히 김지훈이 깨끗하게 해치웠다.
홍재순이 가공할 먹성에 입만 벌렸다.
위대한 놈!
그렇게 회식이 끝났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참 동안 말도 없이 고민스러운 표정만 짓던 홍재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걱정이 서린 것 같았다.
“지훈아, 혹시 금경태하고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어?”
헉! 금경태 과장님도, 금 과장도 아닌 금경태?
아무리 나쁜 감정을 가졌다고 해도 일반 외과 전공의라면 최소한 남들 앞에서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더구나 같은 과 전공의 앞에서는 더욱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홍재순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은연중에 적대감까지 보이고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재순 선생님하고도 무슨 일이 있었나?’
“솔직히 송동화 선생님 말씀을 잘 모르겠어요. 금경태 과장님이 나한테 신경을 쓸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 근데 예전에 너 찍혔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어? 내가 잘못 들은 거야?”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홍재순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다면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단 말이지. 지훈이에게는 금경태가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너무 뛰어나서 자기 밑에 두려는 걸까? 어쨌든 찍었던 사람에게 다시 신경을 쓴다면 상당히 득이 되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겠지. 무슨 이득이 있는 걸까?’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더구나 김지훈은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준 후배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고, 치프로 대접해 주는 유일한 후배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경고는 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혹 김지훈을 통해 자신의 말이 금경태 과장에게 전해진다고 해도 후회할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김지훈은 절대 입빠른 놈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지훈아, 금경태를 조심해. 너한테 잘해 주고 신경을 쓸 때는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게 너한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수도 있어. 금경태는 자신의 이득만 중요한 사람이거든. 내 말 잊지 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선생님도 금경태 과장님과 안 좋은 일이 있으셨어요?”
‘선생님도’라는 말을 놓치지 않은 홍재순이 흠칫 놀랐다.
“너도 무슨 일이 있었어?”
‘눈치 하나는 빠르시네.’
뭐 좋은 일이라고 말을 할까!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머리만 박박 긁었다.
홍재순은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결국 숙소에서 마주 앉고 말았다.
사실 금경태 과장이 새삼 왜 이러는지 김지훈도 궁금하긴 했다. 만일 비슷한 일을 당했다면 홍재순은 혹시 짐작하는 바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쉽게 할 말도 아니었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김지훈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과 홍재순이 일반 외과 전공의가 아니었다면 주저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봐도 잘못한 일은 없었다. 의국원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스승님과 이혁민 선생님이 말씀을 안 하고 계셔서 나도 말을 아꼈지만, 홍재순 선생님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지금은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네.’
김지훈이 고심 끝에 자신의 일을 털어놓았다. 물론 장례식장에 국한된 상황만 말했다.
홍재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김지훈과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연신 헛웃음을 터트리며 뜸을 들이다 말고 눈빛을 굳혔다.
‘너도 정말 화도 나고, 어이가 없었겠구나.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온 거야? 생각 이상으로 강한 놈이었네. 그래. 내가 당한 일을 확실히 아는 게 너한테도 좋겠다. 그래야 또 안 당하지.’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네. 역시 돈, 명예, 알량한 권력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래도 넌 금경태한테 돈이라도 뺏고 찍혔지. 난 멀쩡한 내 논문만 뺏겼어. 그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김지훈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논문이라니요?”
탄식처럼 낮고 우울한 소리가 들렸다.
“후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우스워지더라. 내가 한창 힘들어할 때 그 인간이 먼저 손을 내밀었어. 물론 우리 집안 때문이었는데 그땐 몰랐지. 손이 느리면 이론이라도 강해야 한다며 논문을 하나 쓰라는 거야. 자기도 기대하는 게 없었던지 남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래도 그게 고마워서 정말 열심히 썼어.”
“그럼 그 논문을 빼앗았단 말이에요?”
“아니, 그걸 보더니 어느 날 간담도에 관한 논문을 하나 더 주더라구. 솔직히 과장에게 인정을 받는 면이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더라. 정말 전 병원의 모든 케이스를 다 찾아서 죽자 사자 썼다. 근데 그게 무슨 논문이 됐는지 알아?”
“어떻게 됐는데요?”
홍재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