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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344화 (344/1,329)

제8화 당연한 일일 뿐이다 (2)

정훈철은 자신의 말대로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날 밤, 시사 토론에서 산재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사업주들과 유착한 일부 공무원들의 문제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다루어졌다. 사회적 여파가 꽤 있었는지 다른 방송국에서도 경쟁적으로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메아리가 울렸다. 생각보다 무척 빠른 시점이었다.

구미 지역의 산재에 대한 공식적인 실태 조사를 한다는 당국의 발표가 나왔다. 사업주들에게 뒷돈을 받고 유착 관계를 맺었던 공무원들이 자체 감사에 이어 줄줄이 경찰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정훈철은 최동빈을 잊지 않았다.

수요일 늦은 밤에 정훈철이 마동식과 함께 나타났다. 깜짝 놀란 김지훈이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자 정훈철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주치의 선생님이시죠? 죄송하지만, 조용한 곳이 필요한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최동빈 환자 때문입니다.”

“아! 예, 그러시죠. 마침 병동 의국이 비어 있습니다.”

정훈철을 중심으로 최동빈과 오성미, 그리고 마동식과 김 부장이 마주 앉았다. 김지훈이 구석에 앉아 딴청을 피우면서도 눈빛을 반짝였다.

“마동식 사장님,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빨리 진행하죠. 공사 중 안전은 회사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 사고는 야간에도 강행해 특히 문제가 많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추가 보도를 할 필요가 있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동식의 눈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주먹을 꽉 쥔 채 치밀어 오른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정훈철과 최동빈을 노려보던 마동식이 입을 열었다.

“그럼 확실히 약속을 지키는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산재 처리도 빠르게 돼야 할 겁니다. 그게 조건이니까요.”

마동식이 이를 악물며 김 부장에게 눈짓을 했다. 한 장의 종이와 두툼한 봉투였다. 정훈철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후 봉투를 잡았다. 쓰윽 눈대중으로 얼마 정도 되는지 가늠을 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만족할 만한 수준일 것 같군요. 그럼 최동빈 씨는 액수를 확인하시고, 다시는 이번 사고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으시면 됩니다.”

미처 생각도 못한 일이었는지 최동빈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성미도 두 손을 꼭 잡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돈 봉투에 얼마가 들었는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훈철이 미소를 지으며 돈 봉투를 쓰윽 밀었다. 액수를 확인한 최동빈과 오성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생각보다 훨씬 금액이 큰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은 끝이 아니었다.

“최동빈 씨, 이건 회사에서 응당 지급해야 할 피해 보상금입니다. 물론 사적인 보상이기 때문에 본인 과실만큼의 액수는 차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산재 보험에서 보상을 하는 것과는 별개니까 잊지 마세요. 그게 바로 법입니다.”

김지훈이 입을 쩌억 벌렸다. 산재 처리도 모자라 개인적으로 보상금까지 받아 낼 줄은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문득 대의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도 좋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훈철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최동빈이 각서에 도장을 찍고 돈을 수령했다. 정훈철도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추가 보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마동식이 두 장의 각서를 움켜쥐며 일어났다.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각서를 받은 이상 이제 공은 다시 자신에게로 넘어왔다.

“최동빈, 이렇게 끝나진 않아. 정 PD, 나 마동식을 건드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 내 뒷조사를 했으면 그 정도는 각오했겠지?”

분명한 협박이었다. 그런데 정훈철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또 만나지 맙시다. 어찌 됐든 오늘 일은 고맙습니다. 그럼 시간도 늦었는데 조심해서 가세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마동식에게는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랬다. 문을 열던 마동식이 순간 멈칫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개새끼!”

나잇값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체면이란 체면은 다 찾으면서 끝까지 입에 욕을 달았다. 행동이 바를 리도 없었다. 문 닫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자리였다. 그깟 소음 따위에는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할 정도로 묘하기만 했다.

“어이쿠! 깜짝이야. 김지훈 선생님, 문 부서졌으면 나한테 연락하세요. 바로 고쳐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정훈철의 농담에도 최동빈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오성미가 눈가를 훔치다 말고 울먹였다.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만 흘렸다.

“최동빈 씨,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산재 처리까지 돼야죠.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회복에만 신경 쓰세요.”

오성미가 입을 열려 하자 정훈철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환자분이 빨리 가셔야 저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최동빈이 천천히 일어났다. 말없이 정훈철의 손을 잡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정훈철이 답답한지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게 법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지, 결코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 고마운 일로 변한 세상은 건강한 곳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처럼 이 사회도 너무 많은 곳이 곪아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고작 투정이었다.

“형, 그동안 왜 전화를 안 받으셨어요? 걱정했잖아요.”

“지훈아, 외부 압력에서 자유로우려면 아예 잠적을 하는 게 최고야. 한데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귀라도 막아야지. 이번 보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인마? 마동식 아버지 힘이 제법 세더라. 사방에서 난리를 치는데. 어이구!”

한동안 정훈철의 무용담이 이어졌다. 그 짧은 기간에도 곤란할 정도로 상당한 압력을 받은 모양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만 짓고 있던 김지훈이 문득 든 생각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 근데 마동식 저 사람 상당히 질이 안 좋던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 순순히 돈을 줄 사람이 아닌데.”

“지훈아, 구린 구석이 있는 놈에게 잃을 것까지 많다고 생각해 봐. 자식들이 다 아버지 사업체를 하나라도 더 물려받으려고 혈안이 돼서 서로 얼굴도 안 보는 집안이야. 여기까지는 어떻게 막을 수 있지만, 이 이상 문제가 더 커지면 탈락이야. 그런 상황에서 마동식이 돈을 아끼겠어? 나라도 쓴다.”

“어? 형, 그럼 돈으로 책임이 모두 끝나는 거예요?”

정훈철이 묘하게 웃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난 추가 보도만 안 할 뿐이다. 그런데 말이야, 공무원 세계는 조금 달라요. 고위직으로 불똥이 튀게 되면 희생양이 필요하겠지? 과연 유착한 공무원만 달랑 징계하는 것으로 끝날까? 꽤 윗선의 신경까지 건드렸으니까, 마동식도 저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

언뜻 정훈철의 아버지도 권력 속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권과 반대편이라면 이번 일은 대단한 호재일 수도 있었다.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늦어 정훈철이 밥도 못 먹고 떠났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가자미눈을 떴다.

‘마동식, 그런 사람은 확실하게 벌을 받아야 되는데.’

바람이자 염원이었다. 그것이 정당한 일이었다.

정훈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게 관련된 검은돈이 발각됐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전광석화처럼 후속 조치가 진행됐다.

마동식이 운영하던 회사가 박살이 났다. 그동안 산재 처리를 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조사에 이어 세무조사까지 두드려 맞았다.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동식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운영하는 회사들까지 철저하게 조사를 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들의 잘못된 행동이 집안을 뿌리째 흔들리게 한 것이다.

사실 그 때문일 수도 있지만, 분명 불법적인 일이 있기에 조사를 받을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최종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훈철의 말대로 돈과 권력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이 흐지부지 지나갈 수도 있었다. 마동식이 사법 처리된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메아리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울리고 있었다.

김지훈에게는 아직도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바로 최동빈의 산재 처리 여부였다.

확실히 윗선의 책임까지 거론된 모양이었다. 목요일 오후 노동부에서 직접 나와 빠른 해결을 약속했다. 빨라도 너무 빠른 일 처리였다.

최동빈과 오성미가 누구부터 찾았을지는 빤한 일이었다.

“선생님, 드디어 됐습니다.”

“와! 축하합니다. 정말 축하합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최동빈의 손을 잡으며 환호를 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지, 결코 축하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안 홍재순도 함께 축하해 주었다. 물론 다소 의아해하긴 했다. 김지훈이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최동빈이 왜 김지훈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를 말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쁜 일이 이어졌다.

이번 보도를 접한 신동석 이사장이 구미 병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구체적인 상황을 들은 뒤, 최동빈이 부담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받지 말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아울러 빠른 시일 내에 구미 병원에 산업 의학과를 개설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공단 지역 근로자들의 작업 여건에 대한 연구.

중금속 등을 포함한 유해 요소에 대한 연구와 중독 방지.

산업 재해에 대한 역학 조사.

등등을 수행하는 산업 의학과는 구미에 정말 필요한 과였다. 의료 기관과 의사들이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이제야 구체화된 것이다. 근로자들의 건강은 결코 개인의 몫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장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병원장과의 통화를 끝낸 신동석 이사장이 창밖을 보았다.

‘이번에도 정훈철 PD 작품이란 말이지. 그런데 최동빈이란 환자가 김지훈의 환자였어? 김지훈, 장례식장부터 이번 문제까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교수들이 다 인정을 할 정도로 실력까지 뛰어나다고 했나?’

신동석 이사장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천천히 뒤적였다. 금경태 과장부터 구미의 송동화 과장까지 망라한 일반 외과 교수들에 대한 파일이었다. 개개인의 전문 분야와 능력에서 실적까지 병원이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전공의 이름이 보였다.

김지훈, 신현수.

단 2명이었다.

한참 동안 김지훈과 신현수에 대한 보고를 읽던 신동석 이사장이 피식 웃었다.

‘허허! 병원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현수를 잡아먹을 수도 있겠어. 현수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해야겠다. 난 결코 너를 두고 무리한 인사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인재는 더더욱 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내게 금경태는 일시적인 패에 불과하지만, 네게 김지훈은 영원한 라이벌이자 평생을 함께할 친구였으면 좋겠구나.’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김지훈이 이대로만 커 간다면 자식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의사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지훈은 반드시 꽉 잡아야 할 인재였다. 그것은 분명 일종의 딜레마였다.

다른 서류를 집은 신동석 이사장이 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혁민 교수가 제출한 1996년도 일반 외과 운영안이었다.

‘아직 일이 년은 금경태의 힘이 필요한데.’

밤이 깊도록 신동석 이사장의 고민이 이어졌다. 병원 운영을 책임지는 이사장으로서 일반 외과라는 과 하나만을 볼 수는 없었다.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는 진평호 일가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설립자 집안이다. 아버지의 업적을 자식이 무너트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병원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결코 이사장 자리를 내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기적처럼 해결됐다. 무엇보다도 최동빈이 웃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살려 낸 것만큼이나 행복했다.

더구나 내일은 회식이다. 그것도 등심이다.

그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회식도 제대로 못했다.

구미를 떠나는 마지막 날 밤에 회식을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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