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43화 (343/1,329)

제8화 당연한 일일 뿐이다 (1)

그렇다. 결국 돈이 문제다.

“이 정도면 한동안은 걱정 없을 거야. 단, 뉴스에 자네는 물론 사장님이나 우리 회사 이름이 나오면 안 돼. 그게 조건이야.”

이 모든 게 다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돈이면 무조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마동식은 물론 김 부장까지도 말이다.

이제야 최동빈의 입이 열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막습니까?”

“그동안 TV도 못 봤어? 다 이니셜 아냐. S 건설, K 부장, 이렇게 나오는 거하고 실명이 나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자네 입에서 실명이 나왔다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빠져나갈 생각 말아. 어떻게 할 거야?”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최동빈은 눈앞에 놓인 두툼한 돈 봉투에 갈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손만 뻗으면, 전화 한 통화만 하면 가질 수 있는 돈이었다.

어려운 선택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유리한 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동식으로서는 도대체 무엇을 고민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 부장이 고개를 흔들며 재촉하려는 순간, 마동식이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최동빈, 너 내일 아침까지만 시간을 준다. 만일 그때까지 답이 없으면 니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밟아 줄 거야. 니가 내 얼굴에 먹칠을 하고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마동식이 김 부장의 손에 들려 있던 돈 봉투를 빼앗다시피 낚아챘다. 그러고는 최동빈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니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었어? 기회를 줬을 때 잡아. 난 일단 화가 나면 상대가 여자나 아이라고 봐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랬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어.”

한참 만에야 최동빈의 입이 열렸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휠체어 바퀴를 잡고 있는 최동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들먹여도 한마디 대꾸를 하지 못했다. 비겁함인지, 아니면 가족에 대한 걱정인지, 혹은 유혹과 갈등인지 스스로에게도 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돈이란 놈은 그만큼 무서웠다.

병동으로 향하는 최동빈을 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동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동식과 김 부장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가족의 삶보다 자신의 체면과 명예가 중요하다는 마동식의 말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치미는 화를 꾹꾹 눌러 참던 김지훈이 돌연 주먹을 쥐었다.

“하여튼 두 발 달린 짐승은 믿으면 안 된다더니, 이게 무슨 망신이야. 지금까지 먹여 주었으면 그 은혜를 알아도 부족한 거 아냐? 벌레만도 못한 놈. 김 부장, 내가 이 시간에 저따위 놈을 만나야겠어? 너 일 똑바로 하라고 그랬지.”

돈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다. 사업주와 직원 간에는 일종의 상하 관계를 맺어야 한다지만, 인간적으로는 모두 동등한 존재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상식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벌레, 짐승, 은혜라니!

모든 사업주들이 마동식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흙탕물로 만든다고 했다. 마동식은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회의 암이었다.

당장이라도 마동식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했다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부르릉!

대형차 한 대가 지나갔다. 뒷좌석에 거만한 자세로 앉은 마동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도 체면을 중시한다는 사람의 입에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욕이 터졌다. 정당한 방법 대신 온갖 비열한 수단으로 부를 쌓은 자의 표본이었다.

‘후우! 서연이 아버님 같은 분도 계신데 저런 사람도 있었네. 돈이 정말 중요하지만, 그전에 사람이 먼저 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개만도 못한 새끼. 넌 인간도 아니야! 이 개자식아! 아니, 넌 개도 부끄러워하겠다.’

욕하는 모습이 정말 싫었지만 저절로 욕이 나왔다. 멀리 사라지는 차를 향해 냅다 주먹 감자를 날렸다.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것뿐이라니 답답하기만 했다.

최동빈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가족과 돈을 택하든, 무엇을 택하는 간에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일에 일조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훈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이면 한수임이라도 받아야 할 시간인데 연결 음만 들렸다.

가슴속에 바윗덩어리 하나가 매달린 것 같았다. 너무도 답답해 고경아에게 전화를 했다.

고경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는 김지훈을 묵묵히 받아 주었다. 마동식과 김 부장이라는 인간들을 향해 쌍욕까지 하는데도 말이다.

(지훈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될 거예요.)

고경아의 침착한 목소리에 간신히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은근히 궁합이 맞는 모양이었다.

금요일 저녁, 홍재순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내일은 서도진이 서울로 가야 하는 날이었다. 김지훈과 홍재순은 천안으로 가기 때문에, 언제 또 볼 수 있을지는 내년 스케줄이 나와야 알 수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쯤은 마음 놓고 쉬어도 좋을 것이다. 김지훈의 묘한 눈빛에 홍재순이 씨익 웃었다.

“도진아, 오늘은 나하고 지훈이가 당직 설 테니까 마음 놓고 마셔. 그동안 수고했다.”

서도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술 냄새를 맡은 다른 과 전공의들까지 가세하자 자리가 점점 왁자지껄해졌다.

함께 웃고 떠들던 김지훈이 어두운 창문 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즐거운 반면, 누군가에게는 괴롭기만 한 밤일 것이다.

서도진이 다음 근무지로 떠났다. 후임으로 온 서도훈은 환자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토요일 저녁의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똥마려운 강아지 새끼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시계를 보던 김지훈이 병동 의국에 놓인 작은 TV를 켰다. 그동안 생각이 날 때마다 정훈철에게 연락을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후우! 왜 내가 떨리고 걱정이 되지?’

띠띠띠! 띠이이이!

9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뉴스가 시작됐다.

과연 예정대로 보도가 될까?

숙소 휴게실에서 봐도 되지만 왠지 최동빈과 같은 공간에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선택을 했든 최동빈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만일 두툼한 돈 뭉치를 선택했다면 아마도 오늘 보도는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으레 나오는 그날의 사건 사고들이 지나갔다. 두 손을 모은 채 긴장된 표정으로 뉴스를 시청하던 김지훈이 답답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뉴스가 거의 끝날 시간이 됐는데도 산재에 대한 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후우!”

눈가를 비비며 털썩 의자에 기댄 김지훈이 까닭 모를 한숨을 터트렸다.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며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귀가 번쩍 열리는 말이 들렸다. 드디어 산재의 문제점에 관한 보도가 시작됐다. 그것도 심층 보도였다.

무심코 지나쳤던 산재 환자들의 이면에 숨겨진 아픔을 이제야 알았다. 일부 공무원들의 유착과 사업주들의 횡포까지 낱낱이 보도됐다. 언론의 속성일 수도 있었지만, 좋은 말이라고는 정말 단 한마디도 없었다.

구미 병원이 보였다. 병원 이름은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분명했다. 김지훈이 TV 앞으로 바싹 몸을 기울였다.

[산재를 당한 분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빠지는지 잘 보셨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막상 그런 분들을 보기는 쉽지 않죠.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한 분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지금까지 보도해 드린 내용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분을 만나 보겠습니다.]

화면이 변하는 순간 김지훈의 가슴이 턱 막혔다.

최동빈의 얼굴이 나왔다.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도, 음성을 변조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최동빈은 절실하게 필요한 돈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한 것이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병실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난데없는 고함 소리가 병동을 쩌렁쩌렁 울렸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최동빈, 너 이 새끼!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인생 끝난 줄 알아, 이 개새끼야! 처자식이 굶어 죽어도 좋다, 이거지? 그래, 어디 해 보자. 산재 처리? 내가 있는 한 꿈도 꾸지 마!”

마치 자기 집 안방인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고개를 빼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김지훈이 그 앞을 휙 지나쳐 곧바로 최동빈의 병실로 들어갔다.

얼굴이 시뻘게진 김 부장이 또 소리를 질렀다. 평범한 얼굴 뒤에 숨은 본성은 잔인했다.

“왜 말을 못해? 이 새끼야! 오성미, 너도 두고 봐.”

최동빈이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TV를 가리켰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해 주고 싶었던 말들이 또렷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동빈이 오성미의 손을 꼭 잡았다. 오성미가 한 살배기를 업은 채 겁에 질려 울음이 터진 현주를 온몸으로 안았다.

마동식이 최동빈을 노려보며 입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게 니가 하고 싶은 말이야? 뭐? 나 같은 사람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병신 새끼가 따로 없네. 너 따위가 영웅 행세를 하면 세상이 변할 것 같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마동식이야.”

더 이상 들을 필요조차, 아니 가치 자체가 없는 말이었다. 더구나 병실 안이었고, 다른 환자들까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김지훈이 마동식과 김 부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환자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나가 주십시오.”

“김지훈 선생, 지금 상황이…….”

“상황이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여기가 당신들 회사인 줄 알아요? 어떻게 환자들이 있는 앞에서 이런 행동과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단호한 눈빛과 목소리였다.

마동식이 있는 자리였기에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던 김 부장이 김지훈을 노려보았다. 마주친 눈빛이 섬뜩했다. 김 부장이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김지훈은 고함을 지르면 꼬리를 내리는 샌님 의사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당장 나가 주세요. 사장과 부장이라는 사람들이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찾던 체면은 어디 간 겁니까?”

김지훈이 마동식을 노려보며 병실 문을 가리켰다. 마동식의 눈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돈으로 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막돼먹은 짓을 해도 돈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며 헤헤 웃어 대는 게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개 직원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이다. 더구나 평소 안중에도 없던 전공의 따위까지 나서고 있었다.

“최동빈, 넌 끝났어. 김지훈 선생, 당신도…….”

“계속 소리를 지를 겁니까? 경찰을 부를까요? 아니면 내 손에 끌려 나가고 싶습니까?”

정말 그럴 기세였다. 얼굴이 시뻘게진 마동식이 바득바득 이를 갈며 병실을 나갔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김 부장이 잽싸게 사라졌다.

병동을 울리던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었다.

의국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가슴을 진정시켰다. 현주와 한 살배기 둘째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최동빈과 오성미가 들어왔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니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사람들 참 못됐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러는 겁니까?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환자분은 안정을 잘 취하셔야 합니다. 참! 오늘 설사는 몇 번이나 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최동빈의 눈빛과 말이 묘했다. 비밀로 한다면서 정훈철이 무언가 귀띔을 한 모양이었다. 잠시 시선을 주던 김지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 한 잔을 타 오성미 앞에 놓았다. 최동빈에게 커피 종류는 아직 금물이었다.

“사장과 부장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나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힘든 일을 하셨습니다.”

최동빈이 의외로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회사의 말대로 하면 조금은 더 편해지겠죠. 하지만 다음에 누군가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사람은 또 얼마나 힘들까요. 현주 엄마가 이해해 준 것이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산재 처리는 잘되겠죠?”

“정 PD님이 신경을 써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김 부장이 서류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처리가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빨리 결정이 나질 않겠습니까? 그리고 선생님께서 먼저 연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 PD님이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하셨지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감사와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최동빈과 오성미였다. 그들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눈앞에 놓인 이득을 취했다면 산재 문제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거창한 이념이나 구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들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원동력일지도 몰랐다.

최동빈과 오성미의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분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을 하신 거죠. 그 용기가 부럽네요.”

최동빈과 오성미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지금뿐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행복해 보였다.

환자의 치료는 육체에만 국한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렸다. 마음까지 치료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사일 것이다. 평생을 노력해도 힘든 일이겠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이었다.

수술과 이론을 배운다고 열심히 노력해 오는 동안 혹시 환자에 대한 마음을 잊은 것은 아닌지 반성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실제로 그랬던 것 같았다.

‘후우! 제가 도리어 고맙습니다. 비록 경우는 다르지만, 덕분에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마음을 다시 찾은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헤치고 나오면 깨닫는 것이 많은 법이다. 자신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해도 배워야 할 것이 있다. 하물며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환자와의 관계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지훈은 최동빈과 오성미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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