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40화 (340/1,329)

제6화 왠지 답답하다 (2)

한동안 통화를 하던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물론 김지훈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긴 했다.

‘개복술과 복강경을 이용한 담낭 절제술의 비교 고찰을 논문으로 쓰라니, 이게 뭔 일이야? 그럼 금경태 과장에게 검수를 받아야 하잖아? 어후! 그건 정말 자신 없는데.’

논문은 지도 교수와 끊임없이 만나서 상의해야 한다. 아무리 금경태 과장을 태연하게 본다고는 하지만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이혁민 교수의 결정이었다. 무엇인가 생각이 있겠지만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어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몸까지 절로 떨리며 최동빈에 대한 걱정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논문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떤 논문을 줄지는 교수들이 전적으로 결정하는 사항이었다. 다른 논문을 달라고 했다가는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이혁민 교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일단은 써야 한다. 그것도 서울에서 썼던 논문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이론의 최강자!

홍재순이라면 어떻게 해야 논문을 잘 쓸 수 있을지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부리나케 숙소로 달려갔다. 역시 홍재순이었다. 오프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도 교과서가 아니라 보통은 잘 모르는 수술을 앞두고 가끔씩 참조하는 책이었다.

파란색 형광펜이 책을 물들이고 있었다. 네 번째 읽는다는 의미였다.

‘아! 정말 대단해. 역시 이론의 최강자가 될 수밖에 없어.’

“무슨 일이야? 나 오늘 오프다.”

김지훈이 슬그머니 홍재순 옆에 앉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요. 제가 이번에 논문을 하나 받았는데 잘 쓸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혹시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논문이란 말에 금경태 과장이 떠오른 홍재순이 순간 눈가를 찌푸렸다. 기분이 확 잡쳤지만 김지훈이 자신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홍재순이 눈가를 비비며 표정을 감췄다.

“논문?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이 처음이야?”

“아니요. 두 번째 논문입니다. 첫 번째 논문 썼을 때 이것도 논문이냐고 이혁민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거든요. 이번에도 못 쓰면 절 죽이실 것 같습니다.”

홍재순이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천하의 김지훈이 논문 때문에 혼났다고? 대충 썼구나?”

“아닙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썼는데 혼났다니까요.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진지하기만 한 얼굴에 홍재순이 턱을 괴며 묘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결코 이론에 약한 김지훈이 아니었다. 그동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낸 오더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실력이 달리면 자연히 오더에도 문제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환자실 환자의 경우에는 그런 면이 매우 확실하게 도드라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낸 오더는 지적할 거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정말 논문을 쓰기 어려워하는 거야, 아니면 이혁민 선생님의 기준이 엄청 높은 건가. 도대체 뭐야?’

고민만 하기에는 김지훈의 표정이 절박하긴 했다.

‘그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나쯤은 모자라야 인간답지.’

홍재순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쉬운 방법은 없다. 논문도 기본을 지켜야 해. 일단 교과서부터 확실하게 읽고 내용을 숙지해. 그다음에 관련 논문을 찾아. 최소한 오십 개 이상은 읽어야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자 케이스를 찾아서 분석을 한 후에 기승전결을 잘 짜서 쓰면 끝나는 거지.”

“교과서에 논문 오십 개요?”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홍재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훈아, 잘 쓰고 싶다며. 오십 개는 최소한이야, 최소한. 그런데 논문 주제가 뭐야? 이혁민 선생님이 주셨으면 위장관 쪽이겠네.”

“어후! 그게 개복과 라파로(복강경)를 이용한 담낭 절제술의 비교 고찰이에요. 왜 간담도를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순간 홍재순이 눈가를 좁혔다.

“정말 이혁민 선생님이 주신 논문이야?”

“예. 방금 전에 연락 받았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전공의 논문도 우수한 경우에는 학회나, 혹은 전문의 시험 때 제출을 한다. 그때 제2저자로 지도 교수의 이름이 올라간다.

비록 배점이 적다고 해도 이것 역시 연구 성과의 일부이기 때문에 교수들도 신중하게 논문을 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가장 우수한 전공의에게 논문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었고, 이혁민 교수도 다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최근 금경태 과장과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홍재순이 눈가를 심하게 찡그렸다.

‘이혁민 선생님이 아니라 금경태가 준 논문일 가능성이 높아. 그 인간이 지훈이처럼 뛰어난 전공의를 지나칠 리가 없어. 제길! 혹시 지훈이도 나 같은 꼴을 당하는 거 아냐?’

얼굴만 찡그릴 뿐 아무 말도 없자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고민스럽네.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대충 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내 상황을 알려 봐야 나만 병신이라고 자인하는 꼴이고.’

한동안 고민하던 홍재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공의 전체가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할 존재가 바로 금경태 과장이었다. 김지훈을 이용할 것이란 근거도 없었다. 일단은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 것이 맞았다.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게 다니까 잘 써 봐. 그리고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감사합니다, 선생님.”

손가락을 꼽으며 홍재순이 말한 방법을 상기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언제든 물어보라는 말이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또 다른 기회였다.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술은 물론 이론에도 밝아야 한다. 그동안 실무에 치여 공부를 등한시했다. 사실 일반 외과 의사가 알아야 할 산부인과 질환까지 꿰고 있는 홍재순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최동빈 환자를 볼 때도 다발성 손상에 대한 깊은 지식에 감탄을 하곤 했었다.

‘겸사겸사 이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야.’

마음을 굳힌 김지훈이 홍재순을 보았다.

“선생님, 최동빈 환자는 괜찮겠죠?”

“문제가 많지. 한두 군데 다친 게 아니잖아.”

“앞으로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홍재순이 자연스럽게 비장과 소장을 절제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설명했다. 더불어 동반된 손상들의 예후와 치료 방침까지 술술 흘러나왔다.

각 과를 막론한 홍재순의 이론에 감탄이 또 터져 나왔다.

‘정말 이론은 끝내주네.’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설명을 들으니까 흐릿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명확해지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서 말인데요. 시간 되시면 이론 좀 가르쳐 주세요.”

“뭐? 무슨 소리야?”

“저도 2년차 후반인데 공부 좀 해야 될 때가 됐잖아요. 논문 쓰는 것도 계속 지도해 주시면 더 좋고요.”

홍재순이 흠칫 놀랐다.

“지금 나보고 이론을 가르쳐 달라는 거야? 교과서 열심히 읽으면 되잖아. 뭐가 또 필요해?”

“그럼 강의는 왜 받아요? 그냥 혼자 교과서나 읽고 말지. 그리고 선생님은 아랫년차 챙겨 줘야 할 치프시잖아요.”

홍재순의 표정이 묘해졌다. 치프라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항상 들었던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분명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다.

그간 솔직히 수술을 못했기 때문에 이론에 매달렸다. 치프가 되고 나서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반면 김지훈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자식! 날 정말 치프라고 생각하는구나. 고맙다. 정말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홍재순이 헛기침을 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시간이 없잖아?”

“시간이요? 오더 내고 밥 먹고 나면 남는 게 시간입니다. 평일에는 수술만 안 뜨면 특별하게 할 일이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선생님, 혹시 귀찮아서 핑계대시는 거 아닙니까?”

김지훈이 가자미눈을 뜨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홍재순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너 지금 나보고 평일 오프 가지 말라는 거야?”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순간 당황했지만 김지훈도 만만하게 볼 놈은 아니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후배를 위해서 시간을 조금만 내시면 안 될까요? 오프 중 하루만이라도 투자해 주세요. 그리고 저 때문에 좋아지신 것도 있잖아요.”

김지훈이 끝말을 얼버무리며 홍재순의 손을 가리켰다.

감히 치프의 약점을 대놓고 거론해?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지만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홍재순은 도리어 김지훈의 그런 태도를 좋아했다. 이젠 둘 사이에 허물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홍재순이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알았어. 그럼 내가 오프를 하루만 갈게. 대신 확실하게 집중해야 돼. 나 성격 더러운 거 감안해야 된다. 알지? 환자나 수술 빼고 다른 데에 정신 팔거나 졸면 죽어. 최소한 하루 두 시간이다.”

“옙! 알겠습니다, 선생님.”

“좋아. 그리고 도진이는 빼. 아직은 시간 나면 잠부터 자야 할 년차인 건 알지? 오늘부터 시작하자.”

그 자리에서 결정이 났다.

일을 하느라 중환자실도 못 내려온 서도진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었다. 홍재순이 상당히 서두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지훈이 원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정말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날 밤,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김지훈이 울고 말았다.

홍재순은 이론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태우는 재주는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

스승과 교수들도 모자라 치프에게까지 타야 하는 걸까?

“김지훈, 정신 안 차려? 방금 전에 읽은 부분이잖아. 그거 다시 설명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니가 써야 할 논문과 관련된 부분이면 더 집중해야 되는 거 아냐?”

5분도 지나지 않았다.

“어휴! 수술만큼 책에도 집중 좀 해라. 가르쳐 달라는 건 너였어. 분명히 나 아니다. 그리고 졸면 죽는다고 했지? 가서 세수하고 와.”

스승인 이준영 과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나도 다섯 번 읽으면 그냥 외울 수 있다고요. 첫날부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김지훈이 찬물에 머리를 담그며 소리 없이 외쳤다.

2시간 만에 파김치가 됐다.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30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멍청히 천장을 보던 김지훈이 머리를 마구 때렸다.

‘이런 바보가 있나!’

서로를 이해하기 전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새 까먹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꼴이었다.

***

세상에는 참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서로를 의지할 가족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30살의 젊은 남자 환자, 최동빈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은 살아갈 수 있는 힘이자 삶의 희망이었다.

강인하고 단단한 의지로 온몸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이겨 냈다. 하루하루가 지나며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회복을 보였다. 예상보다 빨리 물을 먹기 시작했다. 이 추세로 간다면 정상적인 식사를 할 날도 멀지 않았다.

아내의 입가에 더욱 환한 미소가 걸렸다. 중환자실의 분위기에 겁을 먹으며 항상 울먹이던 어린 딸도 아빠의 손을 잡으며 해맑은 웃음을 보였다. 그것은 남편이자 아빠에게는 더없는 힘이었다.

마침내 최동빈이 밥을 먹었다. 요추의 압박 골절만 아니었으면 퇴원을 해도 될 정도였다.

‘야! 사람의 의지라는 게 정말 대단하네. 한 달은 봐야 한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병원을 옮겨도 되겠어.’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최동빈이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복부 사진이나 청진 소견상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증상만으로는 단장 증후군(Short Bowel Syndrome)이 의심됐다. 1미터 정도 절제해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희한한 일이었다. 비장을 절제하고 동반 손상이 많았던 탓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지정 병원으로 이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서도진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진아, 소장 절제 후 초기에는 흔히 이런 경우들이 있는 데다 거의 대부분 다 적응을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의사들도 내심 걱정을 할 판인데 환자나 가족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성미의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깊어져만 갔다. 홀로 있을 때면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도 어두운 안색에 걱정이 된 김지훈이 환자의 부인을 찾았다. 아마도 환자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보호자분,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 보입니다. 환자분 때문에 그러세요? 비장하고 소장 일부를 절제하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습니다. 복통하고 설사도 곧 좋아지고, 요추 골절도 잘 이겨 내실 거예요.”

환자의 아내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대개는 의사의 말에 걱정을 덜고 얼굴을 펴기 마련인데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걱정이 너무 지나쳐 보였다.

그렇다면 치료비 때문일까?

돈 문제라면 일개 전공의가 상의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 김지훈이 나직하게 혀를 차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비보험 때문에 그러나? 아니지. 일을 하다 다쳤으니까 그런 비용도 회사에서 지불해야 하는 게 맞잖아. 70퍼센트 과실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정말 환자에게 치료비까지 내라고 한 거야? 정말 산재 처리가 안 되는 건가?’

은근히 걱정이 됐지만 오지랖이 너무 넓어도 탈이 난다.

그동안 김 부장과 마동식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환자나 보호자를 만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만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면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김지훈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최동빈과 오성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불과 이틀 후에 우연히 뜻밖의 말을 들었다. 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설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최동빈이 병실에 없어 어디에 있는지 찾은 것뿐이었다.

‘운동 중인가? 저녁에는 쌀쌀할 텐데 실내에서 하지.’

별생각 없이 병동 끝까지 걸어갔다. 외부로 통하는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무심코 문을 닫으려던 김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귀를 기울였다. 외부로 통하는 계단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성미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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