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자! 지금부터 달리자. 여긴 구미다 (1)
홍재순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꽤 오래전 일인 것처럼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이제는 다른 병원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다들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발전해 갔을 테지만, 홍재순의 변화는 경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 자체가 느린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수술 기구들이 손에 익었는지 때론 과감한 모습까지 보였다.
홍재순은 단순히 손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간만에 응급실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단체 교통사고였다. 온갖 외상을 입은 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가득했다.
김지훈이 서도진의 노티를 받고 내려갔을 때는 각과 전공의와 인턴들이 이미 환자 치료를 시작하고 있었다.
빠르게 환자를 분류하던 김지훈이 홍재순에게 응급실 상황을 노티했다. 하필이면 저녁 먹어야 할 때 환자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달리 홍재순이 김지훈과 서도진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 단체 TA(Traffic Accident)입니다. 저희는 환자 처리하고 나중에 식사하겠습니다.”
일이 년차가 모두 내려온 이상, 굳이 치프까지 환자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홍재순이 내려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손이 달리는 상황이 되자 팔을 걷어붙였다.
일반 외과 치프까지 가세하자, 그 어느 때보다도 환자들이 빠르게 정리됐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홍재순을 경원시했던 다른 과 전공의들의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고 있었다.
문제는 중상자들이었다.
김지훈과 서도진이 대퇴골을 포함한 다발성 골절로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에게 매달렸다. 수술적인 방법으로는 바이탈을 잡을 수 없기에 어떻게든 응급실에서 환자를 안정시켜야 했다. 더구나 외상으로 인한 기흉까지 동반돼 있었다.
김지훈이 변상훈 과장에게 노티를 한 후, 바로 흉부 도관을 박았다. 서도진에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신중하게 환자를 판단한 김지훈이 중심 정맥을 잡으라는 오더를 내렸다.
서도진도 처음인 모양인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중심 정맥을 잡았다. 다행히 천광호가 한 실수를 하지 않았고, 평소 김지훈이 하는 모습을 눈에 박았었는지 상당히 매끄러웠다.
빠르게 수액과 피가 공급됐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서도진의 어깨를 쳤다.
“도진아, 잘했다. 다음번에도 이렇게 해야 된다.”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서도진의 입이 쫙 찢어졌다.
어느 정도 바이탈이 안정되는 것을 확인한 후 다음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송동화 과장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한참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과장님, 웬일이십니까?”
“빤뻬리 하나 있다며? 그런데 왜 니들이 아니라 홍재순 선생이 노티를 해?”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홍재순을 보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다가온 홍재순이 응급실 차트를 들고 정식으로 노티를 하기 시작했다. 일이 년차가 모두 바이탈을 잡느라 정신이 없는 것을 보고는 직접 환자를 본 모양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송동화 과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응급실 환자 때문에 서도진 대신 인턴이 수술에 들어왔다.
한창 수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송동화 과장이 들어와 복부 CT를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피고는 말했다. 장 파열 이외에는 의심되는 소견이 없었다. 혈복강처럼 시간을 다투는 상황만 아니라면 이젠 때가 되었다.
“홍재순 선생님, 수술합시다.”
홍재순이 눈을 크게 뜨며 송동화 과장과 김지훈을 번갈아 보았다. 아뻬나 탈장을 제외한 수술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전공의가 된 후 처음이었다.
그만큼 손이 좋아졌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믿음을 주었고,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홍재순이 연신 긴 숨을 내쉬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맙다, 김지훈. 네 덕이야.’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 파이팅!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만 하세요.’
뜨거운 눈빛이 오고 갔다.
일반 외과 치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수술일 수도 있었지만 홍재순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뿌듯하기만 했다.
수술이 시작됐다.
홍재순이 막 집도의 자리에 섰을 때, 이용철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마취과 1년차가 당직이었기에 직접 수술 방에 나온 것이다.
“야! 홍재순, 니가 빤뻬리 하는 거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홍재순의 밝은 목소리에 다들 소리 죽여 웃었다.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을 보며 세컨도 아닌 써드 자리에 섰다. 집도의인 홍재순에게 신호를 하려면 옆에 서야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웃기만 했다.
길게 숨을 내쉰 홍재순이 메스를 들었다. 신중하게 복벽을 가르고 복막까지 열었다. 살짝 긴장한 탓인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송동화 과장은 지나칠 정도였지만 김지훈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집도를 하는 이상 발등을 밟는 것조차 조심해야 했다. 더구나 눈치를 보니 홍재순이 전과는 확연하게 다를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흠! 흠!”
때 아닌 헛기침 소리에 홍재순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입술을 꽉 깨문 홍재순이 어깨를 흔들었다.
‘동기들은 예전에 받은 수술에 불과하다. 2년차인 김지훈도 잘할 수 있는 수술이다. 긴장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난 잘해 낼 수 있다.’
무의식 속에서 다가오는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주문처럼 외운 말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손상된 부위를 찾아내고 주변 장기 손상을 확인하는 동안 홍재순의 손은 단 한 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송동화 과장이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소장 말단 부위 두 곳이 파열돼 있었다. 한 곳은 단순 봉합으로 끝날 정도였지만 나머지 한 곳이 문제였다. 파열 위치가 동맥에 근접한 데다 손상 정도가 심해 자를 수밖에 없었다.
순간 눈가를 좁히던 송동화 과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믿고 준 수술이다. 홍재순 선생님, 해 봅시다.’
송동화 과장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안 홍재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김지훈은 도리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홍재순이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과장님, 절 믿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 김지훈.’
홍재순이 눈가를 찡그리며 잠시 머뭇거렸다. 신호를 주려던 김지훈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수술 과정을 상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에휴! 지금까지 수술 전에 어떻게 수술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안 했네. 송동화 선생님이 언젠가는 이런 수술을 줄 것이란 생각을 했어야 하는 건데.’
파열된 소장을 봉합할 때의 원칙은 반드시 점막을 연결해야 한다는 것과 혈류가 원활한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론에 관한 한 홍재순을 따를 전공의는 없었다. 송동화 과장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홍재순의 손이 움직였다.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합을 시작했다.
송동화 과장이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아뻬조차 두려워 실수를 하던 홍재순이 빤뻬리 환자를 집도하고 있었다. 두려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오직 수술 부위에만 눈을 고정한 채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도 느릿하긴 했지만 확신에 찬 손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최고의 써전(Great Surgeon)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조건이 있을 것이다.
수술과 이론은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물론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과 자세는 기본 중의 기본일 것이다.
환자를 이해하고, 수없이 많은 경험을 쌓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뿐일까?
허경발 명예 교수는 과연 그 모든 것을 갖추었을까?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질과 성품을 가졌다고 해도,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무심코 지나친 조건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료들이었다.
‘맞아.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없어. 일석이와 현수에게 한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었어. 각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서로를 믿고 의지할 때, 최고의 써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거야.’
어느새 첫 번째 파열 부위의 봉합이 끝나 가고 있었다. 홍재순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를 믿고 응원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두 글자 속에 포함된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다.
‘그래. 수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환자 역시 혼자 치료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내 자신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최고의 팀을 만들어야만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닐까?’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가슴속에 꼭꼭 새긴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홍재순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세계를 엿본 것 같았다.
그때 수술실 문이 다소 거칠게 열렸다. 서도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노티를 했다.
“과장님, 응급실에 낙상으로 인한 헤모뻬리와 빤뻬리가 동반된 환자가 왔습니다. 중심 정맥을 잡고 수혈을 하고 있습니다만, 바이탈이 잡히질 않습니다.”
송동화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며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환자 상태 빨리 확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 과장님, 혹시 모르니까 미리 수술실 하나 더 부탁드립니다.”
이용철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방 하려고? 인원이 되나?”
인턴에 화이트 가운까지 다 해도 6명이었다. 아뻬라면 몰라도 동시에 빤뻬리를 2개 하기에는 인원이 부족했다. 더구나 바이탈까지 흔들리는 환자였다.
“인원이 모자라도 환자가 급하면 어떻게든 빨리 잡아야죠.”
맞는 말이었지만 무리인 것도 사실이었다.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지훈이까지 내려가면 바이탈은 잡겠지. 재순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이제는 천천히 하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홍재순이 살짝 고개를 까딱이고는 수술에 집중했다.
응급실로 내려간 김지훈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환자 상태를 파악했다. 중심 정맥을 통해 수액과 피는 충분한 속도로 주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혈압은 70 정도에서 잡혔고, 소변이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환자의 의식이 흐릿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는 시간을 끌어 봐야 환자만 위험해진다. 출혈을 잡지 못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겠어. 제길! 마취는 견딜 수 있을까?’
검사 결과와 사고 경위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건물 공사를 하던 중 3층 높이에서 떨어진 환자였다. 안전 장비라고는 헬멧이 다였다. 고층에서 공사를 하면서 안전 띠 하나 착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는데, 아직도 안전은 뒷전인 모양이었다.
“도진아, 보호자는 왔어?”
서도진이 급히 보호자를 찾았다.
등에는 한 살배기를 들쳐 업고, 한 손으로는 5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눈에는 오직 남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뿐이었다.
왈칵 화가 치밀었다.
다친 남자만의 잘못일까?
안전을 위해 공사 현장을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 회사와 공무원들에게는 얼마나 큰 책임이 있을까?
답답해진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김지훈이 상황을 설명했다.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한마디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수술 중 사망할 수 있다는 말에 환자의 아내가 넋이 빠진 얼굴로 주저앉았다.
“도진아, 수술 동의서 받고 수술 준비 최대한 빨리해. 서둘러. 이러다 수술 방도 못 가겠다.”
환자의 아내가 손을 달달달 떨며 수술 동의서에 지장을 찍고 있었다. 완전히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콧등을 찡그린 김지훈이 복부 CT와 차트를 챙겨 들고는 다급히 수술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막 첫 번째 부위 봉합이 끝났다. 이제 더욱 까다롭고 어려운 두 번째 손상 부위가 남았다.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해소한 홍재순이 손상된 소장 부위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때 김지훈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손에는 빨간 볼펜으로 작성한 수술 스케줄이 들려 있었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김지훈, 바이탈이 잡혔어?”
“아닙니다, 선생님. 바이탈이 잡히질 않습니다. 복부 CT상 비장파열과 다른 부위의 추가 손상이 의심됩니다. 혈관 손상이 동반된 것 같습니다.”
“뭐? 그래서?”
“지금 대량으로 수액을 공급하고 수혈까지 하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의식까지 나빠 인투베이션을 한 상태입니다. 최대한 빨리 열어야 합니다.”
김지훈의 말은 분명했다.
테이블 데쓰(Table Death), 즉 수술 중 사망을 각오하고 배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용철 과장은 물론 송동화 과장의 안색까지 변했다.
아무리 환자 상태가 나쁘다고 해도 수술을 하다 말고 다른 환자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훈의 판단이었기에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 지훈이 판단이 그렇다면 지금 빨리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지훈, 보호자에겐 설명했어?”
“예. 수술 중 사망할 가능성까지 설명했습니다.”
김지훈의 말에 이용철 과장이 잠시 고민을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외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테이블 데쓰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 환자 빨리 올려. 간호사, 수술 준비 빨리합시다.”
수술 방이 부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