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이젠 변해야 한다 (2)
“다낭성 난소 같은데.”
난소에 커다란 물혹이 달려 있었다. 문제는 물혹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매끄러워야 할 난소 표면이 물혹들로 뒤덮여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다.
“다낭성 난소요?”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다낭성 난소라는 질환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이 다였기에 어떤 질환인지 희미하기만 했다.
어쨌든 이런 경우에는 산부인과를 부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취과가 산부인과에 연락하는 사이, 김지훈이 별생각 없이 물었다.
“이거 제거해야 하나요?”
홍재순이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은 10~20퍼센트에서 보이는데 이게 불임과 난임의 주요 원인이고, 치료 원칙은 약물 치료야. 그냥 두고 보다가 다른 증상이 생기거나, 만일 임신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치료를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증상으로는…….”
홍재순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들 깜짝 놀랐다. 일반 외과 전공의가 산부인과 질환을 상세하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수술과는 달리 자신감까지 철철 넘쳤다.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설마 산부인과 질환도 공부하세요?”
“김지훈, 책 좀 봐라, 인마. 교과서 뒤에 보면 일반 외과 의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산부인과 질환까지 다 나와 있어.”
오래간만에 정곡을 찌르는 핀잔을 들었다. 물론 이젠 농담으로 받아들이고도 남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어색하게 웃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감탄을 했다.
“야! 진짜 이론에는 최강자십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부인과 치프가 왔다. 홍재순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물혹이 너무 큰 데다 개수까지 많아 임신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선생님, 확실합니까?”
“추가 검사가 필요하겠지만, 경험적으로 이 정도 소견을 보이면 99퍼센트야. 약물 치료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순간 수술실이 조용해졌다. 이제 20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할 사람까지 있는 환자였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여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것이다.
더구나 약혼자도 문제였다. 결혼할 사람이 임신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파혼을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어두운 안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보호자에겐 설명을 해야 하는데 이걸 어쩌나.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약혼자에게 말을 해도 될까? 아니지. 아직 부부가 아니니까 환자 본인에게 먼저 말을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
김지훈의 생각에 모두들 동의를 했다.
곧 수술이 재개됐고, 손쉽게 아뻬를 제거했다. 홍재순이 조금이라도 머뭇거릴 때마다 김지훈이 눈짓을 했다. 그 덕인지 생각보다 빨리 수술이 끝났다.
부인과 문제로 중단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40분 내에 끝났을 것이다. 김지훈이 아뻬를 할 때 걸리는 시간과 비교하면 아직 일이십 분 정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홍재순에게는 대단한 발전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임기응변이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면 가능하다지만, 왼손을 저 정도로 사용해? 도대체 뭘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거야? 설마 여기서 더 놀랄 일은 없겠지?’
홍재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론과 실전은 확실히 달랐다. 사실 소장이 멀쩡한 이상 누구라도 난소 병변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확인할지는 집도의의 손에 달린 문제였다.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보던 홍재순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지훈이 손을 반만 따라갈 수 있다면 원이 없겠네. 후우! 더 노력하자. 난 반드시 해낼 수 있어.’
그때 송동화 과장이 홍재순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시계를 가리켰다.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는 말일 것이다. 홍재순의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걸렸다.
반면 김지훈은 심난하기만 했다. 불임을 선고받은 것과 다름이 없는 젊은 여자 환자 때문이었다.
정말 예쁘기도 했지만 활발하고 성격까지 좋은 환자였다.
“환자분, 빨리 움직일수록 회복이 빠릅니다. 방귀가 나오면 물부터 시작하고, 문제가 없으면 죽을 먹어도 될 때 퇴원하셔도 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자가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꽤 아플 텐데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인상과는 달리 약혼자도 정이 많은 사람인지 환자의 팔을 잡은 모습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단 하루 만에 가스가 나왔다.
“야! 정말 빠르시네요. 내일 아침에 장 소리가 잘 들리면 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환자가 더 열심히 움직였다. 당연히 장 소리가 잘 들렸다. 불과 이틀 만에 물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게 물을 마신 환자가 생긋 웃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에 미음 드시고, 괜찮으면 점심에 죽을 드셔도 되겠습니다.”
“정말이요? 고마워요, 선생님.”
짝짝짝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물개가 박수 치는 것 같은 모습이랄까?
약혼자의 눈가와 입가가 쫙 찢어졌다.
‘에휴! 웃어도 인상이 무섭네. 사람은 좋지만 처음부터 알 수는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만났을까?’
시커먼 얼굴에 쫙 찢어진 눈에 인상 더럽게 보이는 남자.
생머리에 활기차고 성격까지 좋은 어여쁜 여인.
확실히 조합이 맞질 않았다. 그래서 천생연분은 따로 있다는 말이 있을 것이다.
피식 웃으며 돌아서던 김지훈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이제는 사실을 말해 줄 때가 됐다.
다음 날 저녁, 예정대로 죽을 먹은 환자가 또 박수를 쳤다. 영락없는 물개 박수였다.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던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언제 서울로 올라가시겠습니까?”
“부모님도 곧 돌아오실 텐데 우리야 빠르면 좋죠. 선생님, 내일 퇴원하면 안 될까요?”
“사정이 있으시니까 가능할 겁니다. 과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짝짝짝짝짝!
물개 박수가 터지고, 약혼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쫙 찢어진 눈이 더욱 가늘어진 것으로 보아,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김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시 약혼자가 병실을 나간 사이, 김지훈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해야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이럴 때가 의사로서는 가장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술 중에 우연히 난소에 물혹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물혹이요? 어머! 그런 게 나한테도 있었나요? 친구들 중에서도 몇몇 애들이 물혹 있다고 산부인과 다니고 그랬는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사실 별일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 탓에 도리어 설명을 하기 힘들었지만 반드시 알려 주어야 할 질환이었다.
“환자분, 음! 당황하지 마시고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물혹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반드시 서울에 가시면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다낭성 난소라고 하시면 잘 진찰해 주실 겁니다.”
“다낭성 난소요?”
눈을 동그랗게 뜨던 환자가 갑자기 웃음을 잃었다. 김지훈의 얼굴에 서린 걱정을 본 것이다. 여인의 직감은 무서웠다. 그렇게도 밝았던 환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전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 잘 모릅니다. 서울 올라가셔서 진찰 받으실 때 설명 잘 들으세요.”
그냥 소견서에 산부인과 질환 여부를 첨부만 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혹시 그냥 지나칠까 봐 말을 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날 밤 늦게 환자가 김지훈이 의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고는 바로 찾아왔다.
역시 다낭성 난소라는 질병이 문제였다.
환자 본인에게 수술 중에 본 대로 정확하게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의사의 의무였다. 나이도 적지 않았고,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기에 무작정 숨길 수만도 없었다. 또한 환자의 알 권리이기도 했다.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된 줄 알았을 정도로 우측 난소에서 발견된 물혹이 컸습니다. 나머지 혹들도 작지는 않았습니다.”
환자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만들어졌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임신 때문에 꽤 고생을 했어요. 저도 그럴까요?”
여성들 중 10~20퍼센트에서 발견되는 질환이었다. 꽤 흔한 병이었지만 불임과 난임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다면 당연히 걱정해 주었을 것이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꽤 흔한 병이고, 문제없이 사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별문제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서울 가시면 검사만 잘 받으세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환자의 알 권리가 중요하다지만, 차마 불임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어떤 문제가 있는 병인지 알고 있다면,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게다가 의사가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면 모르기도 힘들 것이다. 환자의 얼굴이 김지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두워졌다.
다음 날, 송동화 과장이 퇴원을 허락했다.
환자가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지난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약혼자와 함께 퇴원 준비를 했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약혼자에게 솔직히 말할까? 약혼자는 불임의 가능성이 높은 여인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사실을 알고도 결혼을 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는 사랑을 한다면 불임이라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랐다.
김지훈이 병원을 나서는 환자와 약혼자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경아 씨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까?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그렇게 김지훈에게도 묘한 숙제를 던진 박용근과 전은주가 퇴원을 했다. 전은주가 병원 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환한 웃음 속에 얼핏 슬픔이 스쳤다.
김지훈이 갑자기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고경아가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사랑해요, 경아 씨.”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약간은 가빠진 것 같은 숨소리만 들렸다.
김지훈이 오래도록 전화를 끊지 못했다.
두 번째 주말 오프였다.
마지막 전화 덕분인지 고경아가 군소리 없이 김지훈의 말에 동의를 했다. 양수리를 1박 2일로 간다. 온갖 기대와 희망이 장작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고경아를 만났다.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멀쩡하게 보이는 차를 보며 이젠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철석처럼 믿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미처 100미터도 가기 전에 커피 한잔한다고 차를 세우는 순간 악몽이 벌어졌다.
부르릉! 털털털털! 부다다다! 푸르르!
아무리 키를 돌려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밝게 빛나던 헤드라이트 불빛이 희미해지다 이내 사라졌다.
차 앞에 서서 끙끙대는 김지훈을 보던 슈퍼 주인이 다가와 중얼거렸다.
“배터리가 나갔네. 점프 뛰면 되는데, 이 시간에 연락이 될까? 안 될 거야.”
오늘따라 정비소도 일찍 문을 닫았다. 사방팔방으로 전화를 했지만 받는 곳도 없었다.
‘으으으! 신이시여, 도대체 내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들부들 떨던 김지훈이 냅다 차바퀴를 걷어찼다. 너무 세게 찬 모양이었다. 눈물이 핑 돈 김지훈이 발을 잡고 뒹굴었다.
어우우우! 양수리!
‘손일석, 너 죽었어. 절대 돈 못 준다, 이 자식아!’
이번에도 이모네 골뱅이를 먹었다. 오프 때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경아가 울고 있는 김지훈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써야지, 이 늑대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배터리 충전을 하고 한 시간 정도 주행을 해야 한다는 말을 따라 충실히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그리고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럴 때 시간은 정말 겁나게 빨리 흐르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구미로 내려오는 내내 울었다.
비록 차가 또 말썽을 부렸지만, 분명 다른 때처럼 고경아와 웃으며 즐겁게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모를 일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김지훈에게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젊고 건장한 사내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이젠 입술 정도는 쉽게 허락할 정도로 둘 사이에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제는 사랑을 확인할 때가 됐다.
손과 입술만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는 갈증과 목마름을 부를 뿐이었다.
늑대라고 해도 좋았다. 속이 온통 시커멓다고 해도 좋았다.
그것은 사랑이 준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플라토닉 러브?
난 그런 거 몰라.
개에게나 줘 버려.
김지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