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33화 (333/1,329)

제3화 이젠 변해야 한다 (1)

2년차가 응급 수술도 모자라 정규 수술에서까지 세컨을 자청하다니,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김지훈이 목소리를 죽이며 그간 들었던 말과 함께 어제저녁에 있던 일을 말했다. 차마 수첩을 훔쳐보았다는 소리까지는 할 수 없었다.

송동화 과장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김지훈이 뭔가 핵심적인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홍재순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사실은 직감적으로 감지했다. 이유가 뭐가 됐든 반가운 일이었다. 홍재순이 자신이 아니라 김지훈에게 그런 말을 했단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했다.

‘참! 여러 가지로 사람 놀라게 하네. 그래, 고맙다. 니 덕분에 내 고민까지 해결이 되겠어.’

“둘이 그런 말을 나눴단 말이지? 나도 홍재순 선생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말이야.”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김지훈이나 서도진이나 각자 연차에 맞는 자신의 일이 있고, 배워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도진이가 계속 써드를 서야 하는데 조금 곤란하지 않겠어? 너도 그렇고, 응급실 문제도 있고 말이야.”

김지훈이 묘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전 상관없습니다만, 도진이가 문제긴 하죠. 하지만 홍재순 선생님이 변하지 않으시면 도진이가 퍼스트를 선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겁니다.”

“도진이가 이해를 할까? 그렇다고 홍재순 선생의 일을 말할 수도 없잖아.”

결국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앞뒤를 자른 채 김지훈이 세컨을 서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말에 서도진이 콧등을 찡그렸다.

아무리 1년차라도 써드를 서는 것이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지훈이 세컨을 서도 상관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어젯밤 김지훈이 홍재순과 단둘이 만났다. 예전 같았으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데, 어제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휴! 과장님까지 표정이 이상하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서도진을 본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주간 응급 수술은 원래 제가 세컨을 섰으니까, 정규 수술은 도진이가 병동 일을 하는 동안에만 세컨을 서면 어떨까요?”

서도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적당한 타협안이었지만, 어떤 병원에서도 전공의들이 이런 식으로 수술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홍재순이라는 존재가 묘하게 상황을 비틀고 있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나 도진이는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제 몫을 하고도 남지만, 홍재순 선생은 기회가 왔을 때 반드시 잡아야 하는 사람이다. 김지훈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어. 그나저나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정말 궁금하네.’

송동화 과장이 궁금한 속을 꾹꾹 눌렀다. 어쨌든 이제야 구미 일반 외과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다가왔다.

***

구미 일반 외과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변화의 시작에는 치프인 홍재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전공의 회진이 빨라졌다. 우습게도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회진 도는 속도가 느렸던 이유 역시 홍재순이 실수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수술에서 모자란 것을 환자나 이론에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 환자에 대해 100퍼센트 파악하지 못했어도 저나 도진이가 있잖아요. 혹시 잘 기억이 안 나시면 저희한테 당당하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그러시잖아요.”

의외로 수술까지 즐거워졌다.

세컨을 서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그저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홍재순의 손에 집중하며 머뭇거릴 때마다 어떻게 신호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다.

몸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자칫 실수를 막는 것이 아니라 유발할 수가 있었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그때마다 발등을 살짝 눌러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발등을 살짝 누르면 머뭇거리신 겁니다.”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발이 정말 고달파졌다. 홍재순이 머뭇거릴 때마다 발등을 얼마나 자주 밟았는지 발목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마음 놓고 밟으면 몰라도, 힘 조절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확 밟아 버릴까?’

하루아침에 고쳐질 일이 아니었다. 사소한 부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피부 봉합할 때도 머뭇거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급기야 김지훈이 대놓고 말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난리가 날 발언이었다. 그런데 홍재순은 눈가를 좁히며 고민스러운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정말 대단한 변화였고, 서도진의 놀라움과 의아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정규 수술과 주간 응급 수술은 당연히 세컨을 섰다. 하지만 야간에는 퍼스트를 서지 않으면 심심치 않게 수술을 받았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손이 펄펄 날아다녔다.

아직은 기본적인 수술만 받았지만 송동화 과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수술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하네.’

서로 벌레 보듯 경원시하던 때가 불과 열흘 전이었다. 그런데 이젠 시간이 나면 김지훈과 홍재순이 함께하고 있었다. 오늘도 의국에 앉아서 따르륵 소리를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홍재순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은 한 손으로도 어색함을 느끼는데 김지훈은 양손을 모두 쓰는 연습을 했고, 상당히 매끄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양손 쓰는 연습을 왜 하냐고요? 라파로(복강경 수술)를 하려면 왼손도 오른손 못지않게 써야 하더라구요.”

홍재순이 쩝쩝 입맛만 다셨다.

‘재수 없는 놈.’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놈이었다.

정말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 더 있었다. 역시 다른 병원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드디어 저녁을 함께 먹기 시작한 것이다. 오후 회진이 빨라지고, 오더 내는 시간이 대폭 줄어든 덕분에 시간까지 넉넉해졌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삼겹살에 때론 보쌈까지.

김지훈이 서도진과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불과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확 변했다. 즐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홍재순 때문에 더 놀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결정타가 남아 있었다. 놀랍게도 홍재순이 주말 오프를 반납한 것이다.

김지훈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선생님, 이건 아닙니다. 주말까지 세컨을 설 수는 없습니다. 제발 오프 가세요.”

“내가 세컨을 설 테니까 걱정 마, 인마.”

헉!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홍재순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치프가 세컨을 서면서도 김지훈의 손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송동화 과장이 아니라 김지훈을 보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다. 홍재순이 수술을 받을 때마다 김지훈이 퍼스트를 섰다. 그 때문에 자신의 손을 척척 맞춰 주고 있는 김지훈의 손이 훨씬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의국 분위기가 좋아진 것처럼 홍재순의 손도 미세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분명히 느리긴 했지만 머뭇거리는 시간이 상당히 짧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수술 시간이 단축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지훈, 정말 잘했다. 고맙다. 니 덕분에 홍재순 선생이 변하고, 나도 기분이 정말 좋다. 치프가 변하니까 확실히 몸이 편해지네.’

송동화 과장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서도진까지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 송동화 과장이 퍼스트를 서자 홍재순이 세컨을 자청했다. 그러고는 1년차인 서도진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무엇이든 보고 배우겠다는 다짐이었다.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마구마구 터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요일 저녁이었다.

서도진이 오프를 간 직후, 20대 후반의 여자 환자가 내원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진찰을 했다. 아뻬가 터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홍재순에게 노티를 한 후 보호자를 찾았다.

까만 얼굴에 쫙 찢어진 눈이, 한눈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허벅지가 웬만한 장정 허리통만큼이나 굵었다. 문신만 있으면 딱 조폭이었다. 그러나 김지훈도 이런 면에서는 만만한 담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환자분과 어떻게 되십니까?”

김지훈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결혼할 사이입니다.”

의외로 보호자의 목소리가 꽤 점잖았다.

“그러세요? 친보호자 분하고는 연락이 안 되시나요? 환자분 맹장이 터진 것 같아서 가급적 빨리 수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 동의서는 친보호자에게 받아야 해서요.”

보호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째진 눈이 더욱 가늘어지자 인상까지 아주 나빠 보였다.

‘인상 죽이네. 직업이 뭘까?’

살짝 눈가를 찡그리던 김지훈이 보호자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환자의 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간 틈을 타, 오래간만에 부산으로 놀러 온 참이었다. 이미 약혼한 사이라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런데 도착한 직후부터 환자가 슬슬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타지에 와 물을 갈아 먹으면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웃고 잘 지냈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제부터 슬슬 심해지는 복통을 호소하던 환자가 서울로 돌아가던 중 아예 까무러치고 말았다. 결국 고속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구미로 들어와 김지훈이 있는 병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대충 사정을 설명한 보호자가 물었다.

“서울까지 올라갈 여유는 없습니까?”

“글쎄요. 일단 항생제 쓰고 급히 가시면 되긴 할 텐데, 복막염이 더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수술이 더 커질 수가 있는데, 그건 의사라고 해도 확답을 못 드리는 문젭니다. 그리고 보호자 문제도 마음에 걸리네요.”

“만일 여기서 수술하게 되면 며칠이나 입원을 해야 합니까?”

들을수록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목소리였다.

“일주일에서 열흘은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별문제 없으면 삼사 일 후에 퇴원하고, 서울에 올라가셔서 입원을 다시 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머리를 맞댔다. 통증이 너무 심한지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펴지 못했다.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 모습에 덜컥 겁이 난 모양이었다. 보호자가 김지훈을 찾았다.

“여기서 수술을 받았으면 합니다. 부모님이 해외에 계시니까 동의서는 제가 쓰면 안 될까요?”

김지훈이 혼자 결정하기에는 난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송동화 과장과 홍재순이 오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곧 동의서를 받고 수술 준비를 했다.

“지훈아, 터진 것 같지 않아? 홍재순 선생님, 어때요?”

홍재순이 또 머뭇거렸다. 김지훈이 슬며시 옆구리를 툭 치자 바로 입이 열렸다.

“예. 덩어리가 만져집니다. 아무래도 터져서 떡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죠? 선생님은 오늘 낮에 수술 하나 했으니까 퍼스트 서시고, 이 환자는 지훈이 줍시다.”

송동화 과장도 이미 홍재순이 김지훈과 수술을 할 때 상당히 편안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더구나 단순 아뻬가 아니라 복막염이 의심되는 아뻬는 어떻게 수술하는지 보고 눈에 익히기를 바랐다. 이참에 손가락이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아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술이 시작됐다. 여자치고는 다소 마른 체격이어서 쉽고 빠르게 배를 열었다.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홍재순이 송동화 과장과 수술을 할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뜻밖에도 머뭇거리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송동화 과장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나보다 지훈이가 더 편하고 믿을 만한 거야?’

누군가 아쉬워하든 말든 수술은 진행됐다.

맹장을 확인한 후 아뻬를 찾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분명히 덩어리가 만져졌는데, 달랑 빨갛게 잘 익은 아뻬만 올라온 것이다. 겉에서도 만져지던 덩어리는 어디로 간 걸까?

참관을 하던 송동화 과장이 입술을 모으며 말했다.

“어? 단순 아뻬네. 그럼 만져진 건 뭐냐?”

반드시 종물처럼 만져졌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다른 병변이 동반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리트랙터로 배를 끌어 올리며 수술 부위에 무영등의 초점을 맞췄다. 작은 절개 창 사이로 보이는 부분까지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롱 포셉을 이용해 가능한 부위까지 소장을 끄집어냈다. 아뻬에 인접한 부분에 염증 소견만 보일 뿐 깨끗했다. 아뻬 주변에서 덩어리로 오인될 부분은 없었다.

송동화 과장이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집도의는 김지훈이었고, 수술 진행은 전적으로 집도의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병변을 찾지 못하거나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그때 수술에 들어가도 늦지 않는 상황이었다.

‘김지훈, 잘 찾아봐.’

“롱켈리하고 거즈 한 장만 주세요.”

거즈를 4분의 1 크기로 접어 롱켈리에 물린 후, 신중하게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당겼다. 바싹 마른 거즈에 축축한 장기들이 들러붙은 채 슬슬 끌려나왔다.

이미 확인한 소장들이었다. 소장은 길이가 긴 데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장기였기에 끽해야 5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절개 창을 완전히 막아 버릴 판이었다. 다른 장기를 확인하는 데 상당히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퍼스트도 수술 부위에 손을 넣을 수는 없었다. 절개 창이 너무 작아 도리어 시야만 가릴 것이다.

송동화 과장의 눈가가 좁아졌다.

‘이대로는 다른 부위를 확인할 수가 없을 텐데 소장을 어떻게 처리할까?’

나직한 콧소리를 낸 김지훈이 왼손으로 롱 포셉을 잡았다. 시야를 가리는 소장을 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왼손잡이처럼 자연스럽게 기구를 다루고 있었다.

계속해서 끌려나오는 소장들을 롱 포셉으로 밀어 시야를 확보한 김지훈이 우하복부 깊은 곳까지 거즈를 물린 롱켈리를 넣었다. 드디어 뭔가가 걸려 나왔다. 덩어리처럼 만져진 병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지켜보던 홍재순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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