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것이 바로 의국이다 (3)
한 잔도 못 먹는 술을 억지로 먹은 탓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금경태 과장과의 일까지 떠오른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2년차 앞이었다.
말문이 콱 막힌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키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홍재순이 자신의 최대 약점을 스스로 말했다. 그것도 외과 의사에게는 치명적인 문제를 말이다.
요령껏 피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술 한 잔 마시고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술기운으로 할 말이 아니었다.
“실수는 누구나 합니다. 과장님도 예외가 아닐 겁니다.”
“그래? 그럼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역위증 환자도 그렇고, 동맥을 놓친 것도 나야. 그런데 넌 입단속까지 했어. 솔직하게 말해. 그 속에 있는 게 도대체 뭐야? 동정이야?”
어떻게 말을 끌어가야 할지 점점 난감해졌다. 결국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선생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이 상황이 싫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 말투도 정말 마음에 안 듭니다. 회진도 그렇고, 선생님 당직 날 오더를 늦게 내시면 짜증까지 납니다.”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그렇게 내가 싫은데 왜 그러는 거야?”
“선생님이 제 선배시고, 같은 의국원이기 때문입니다. 손이 느린 건 어떨지 모르지만, 나머지는 다 고칠 수 있는 것들 아닙니까? 학교 다닐 때는 모두가 좋아하는 선배셨다고 들었습니다.”
홍재순이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주물렀다. 오직 손이 느리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못 먹는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말았다. 확 올라오는 술기운의 힘을 빌렸다.
“그래. 손이 느린 게 핵심이야. 노력한다고 고쳐지지 않는 느린 손, 바로 그게 문제야. 너처럼 잘난 놈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대 모르겠지. 제길! 하여튼 이 말 하나는 하고 싶다. 노력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내가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어. 그리고 오늘 한 말도 잊어.”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홍재순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손이 느린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면 고쳐야 한다. 아니, 외과 의사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홍재순에게는 그 사실 자체가 절망일 것이다. 이대로 홍재순을 보낼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늦지 않았다고?”
“손이 문제라면 고치면 되지 않습니까?”
“고쳐? 어떻게? 타고난 문제를 무슨 수로?”
홍재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내야 했다. 방법은 멀리 있지 않았다. 모든 답은 배움과 원칙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승에게 배운 것이 바로 답이었다.
문득 홍재순의 손에서 본 두려움이 기억났다.
“선생님,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모르지만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이 수술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홍재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스태프들도 고치지 못한 손이었다. 이제 2년차에 불과한 김지훈에게 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었다.
“말해 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손이 느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게 보입니다.”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래. 난 두려워. 실수를 할까 봐 두렵고, 남들이 얼마나 손가락질을 할지 생각만 해도 두려워. 그래서 무엇이든 생각하고, 또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홍재순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앉고 말았다.
“그렇다 치자. 그걸 어떻게 고쳐?”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과장님과 함께 수술을 들어간 동료들을 믿으시면 됩니다. 수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홍재순이 눈가를 찌푸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김지훈은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훌륭하게 막았다. 어쩌면 누구도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생각이 홍재순에게도 동료를 불신하게 했는지 몰랐다.
“그렇다고 느린 손이 빨라지진 않아.”
“노력은 해 보셨습니까? 손이 느린 것이 아니라 기구를 익숙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전 외과 의사라면 수술 기구가 마치 내 손과 하나인 것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노력이라는 말에 인상을 쓰던 홍재순이 갑자기 움찔거렸다.
분명히 최대한 노력을 해 왔다. 자신보다 더 노력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김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르륵! 따가각!
간간이 들었던 소리였다. 무슨 소린지 궁금해 서도진에게 물었었다.
‘따르륵 하는 그 소리요? 수술 기구를 항상 가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다루는 연습을 하시는 겁니다. 인턴 때부터 저러셨어요. 양손을 다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예요. 그래서 손이…….’
서도진이 눈치를 보며 얼버무렸지만, 그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손이 빠르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땐 화만 냈었다. 김지훈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생각도 못했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빠른 놈이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난 정말 최선을 다했던 걸까? 수술 기구를 손에 익히고 두려움을 버린다면 손이 빨라질까? 이제 와 그런다면 후배들이 날 어떻게 볼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홍재순을 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아랫년차의 조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더구나 외과 의사에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손 문제였다. 그러나 내친걸음이었다. 스승에게만 배운 것이 다는 아니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존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이혁민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능력이 없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가진 능력을 썩히는 것은 죄악이다.”
“가진 능력?”
뭔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 김지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손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죠?”
홍재순이 눈가를 비볐다. 손이 원래부터 느릴 리가 없다는 말이 묘하게 들렸다.
허탈했다. 타고난 손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반박할 수가 없어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그렇게 보여?”
“당연합니다. 머뭇거리지만 않으셔도 지금보다 몇 배는 빨라질 겁니다.”
웃기는 일이었다. 말 몇 마디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실수를 감싸 주고, 치프로 대해 주는 김지훈의 말이었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이제까지 해 온 것처럼 한다면 정말 방법이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김지훈의 눈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 속에는 어떤 자만도, 무시하는 빛도 없었다. 이런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인 아버지의 말도 생각났다.
홍재순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구미에서 처음으로 근무를 같이했다. 잘난 놈이라는 소문만으로도 싫었다. 수술하는 모습을 보며 시기와 분노를 느꼈다. 당연히 술자리는커녕 밥도 같이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모든 것은 아니지만 속을 내보이고 말았다. 이제 와 후배에게 손을 내민다고 해서 더 이상 창피를 당할 일도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온지도 몰랐다.
홍재순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빛을 굳혔다. 희한하게도 평생 처음으로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 술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렵고도 어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자존심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김지훈, 날 도와줄 수 있겠어?”
“말씀만 하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수술 기구 좀 빌려줘. 그리고 수술을 할 때 내가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내게 말을 해 줘. 설사 내가 예전처럼 반응한다고 해도 두려워하거나 짜증 내지 말고 지적을 해 달란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홍재순이 마음을 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바라 왔던 것처럼 의국 분위기도 좋아지고, 자신도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홍재순의 변화가 반가웠다.
“알겠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겠습니다.”
“고맙다.”
홍재순이 머리를 감싸 쥐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면 불과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마음과 마음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말이 길어져야 또 다른 오해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홍재순이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인생 뭐 있나? 다 먹고살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닌가!
김지훈이 머리를 긁으며 삼겹살을 가리켰다.
“선생님, 배도 고프고 상당히 아까운데요.”
분위기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놈의 말이었다. 허물없는 사이에서만 가능한 말일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욕부터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왠지 김지훈의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다. 뜬금없이 아주 예전 후배들이 이런 말을 하면 도리어 미안해했었던 기억까지 났다.
‘그래. 앞으로도 날 이렇게 대했으면 좋겠다. 나도 치프다운 치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마.’
홍재순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럼 먹고 가자.”
“선생님, 도진이도 부르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될 말이었다. 확실히 김지훈이 눈치가 아주 빠른 놈은 아니었다. 아니면 너무 성급한 성격일지도 몰랐다. 홍재순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우리 둘만 먹자. 차근차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너랑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다.”
지글지글 노랗게 익어 가는 삼겹살이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김지훈과 홍재순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말과 당사자의 말은 꽤나 차이가 있었다. 각자 보는 눈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이었다.
하늘이 돕는지 그렇게 많던 응급 수술도 뜨지 않았다. 급기야 홍재순이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홍재순과 함께 병원으로 돌아오던 김지훈이 어깨를 쭉 폈다.
‘그래. 이게 바로 의국이지. 홍재순 선생님, 파이팅입니다. 내일부터 힘차게 달려 보죠.’
신 나게 웃던 김지훈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에휴! 선생님, 솔직히 저 세컨 서기 싫습니다.”
홍재순이 미안한지 웃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과장님께 말씀드리고, 도진이에게도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무슨 양해를 구해?”
“정규 수술에도 당분간은 세컨을 서겠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해도 되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김지훈이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고맙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한 기분에 홍재순의 얼굴이 벌게졌다.
김지훈이 맥주 몇 캔을 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로 들어갔다. 휴게실이 오래간만에 떠들썩해졌다. 서도진도 꼽사리를 껴 맥주 한 모금을 얻어 마셨다.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김지훈을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음 날, 김지훈이 정규 수술 사이에 잠시 쉬고 있던 송동화 과장을 찾았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2년 동안 자신의 관념 속에 갇혀 있던 홍재순이었다. 하루저녁 사이에 마음이 변했다면 언제든 다시 마음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밀어붙여야 돼.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면 안 돼.’
“과장님, 죄송하지만 정규 수술에도 제가 세컨을 섰으면 합니다. 허락하시면 도진이에게는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송동화 과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