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것이 바로 의국이다 (2)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데요?”
전문적인 용어를 써 가며 뭐라고 복잡하게 설명을 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엔진 점화 플러그를 조절하는 ECU가 고장 나며, 사기통 차가 이기통 오토바이로 변했다는 말이었다. 수리비는 20만 원 언저리였고, 수리는 월요일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상태로는 못 몰고 다닌다는 거죠?”
정비소 주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폐차시킬 거면 몰아도 됩니다.”
우어어어!
꿈과 희망이 깃든 양수리는 어쩌란 말인가?
이럴 수는 없었다.
때마침 고경아가 가방을 메고 정비소에 도착했다.
뭔가 가득 들어 있는 가방을 보는 순간 난감과 실망이 교차했다. 어디까지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고경아는 분명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의 차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무너지며 양수리는 멀리 사라졌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고경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정비소를 나오던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 주말 오프는 3주 후에나 받을 것이다.
차는 또 언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때는 양수리에 갈 수 있을까?
당장은 골뱅이가 유일한 선택이었다.
술기운이 오른 김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경아를 보았다. 꼭 양수리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가방까지 들고 나온 고경아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죽어도 애먼 곳에서는 잘 수 없단다. 어떤 달콤한 말도 소용없었다.
양수리나 시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달콤한 입술에 만족하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우리 내일 영화 보러 가는 건 어때요.”
일요일 오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구미행 버스를 타야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영화 보고 밥 먹은 후, 간단히 커피 한잔하면 끝이었다. 분명 즐거운데 정말 지랄 맞은 주말 오프라는 것 역시 확실했다.
눈물을 머금고 서울 병원 2년차 숙소로 올라갔다. 이경석이 깜짝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이했다.
이러저런 얘기들을 하던 중 자연스럽게 홍재순이 거론됐다.
“홍재순 선생? 어이구! 난 모른다. 나랑 학교 동긴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네. 학교 다닐 때는 순둥이였는데 지금은 정말 많이 변했더라. 지훈아, 너도 잘 알 거 아냐?”
이경석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마도 많이 당하고 산 것 같았지만 차마 얘기를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 힘들긴 해요. 형, 그런데 진짜 사람이 변한 거예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변한 거야. 학교 다닐 때 동기나 후배들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땐 욕 안 먹었다. 매사가 느려서 그렇지, 도리어 좋은 선배라는 소리 많이 들었었어. 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네.”
이경석에게 많은 말을 들었다. 그간 들었던 말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홍재순이 술이라도 할 줄 알면 탁 터놓고 말을 해 보고 싶었는데, 한 잔도 못 먹는 놈이다. 핑계긴 하지만 나도 방법이 없더라. 어쩌냐. 그래도 지훈이 니가 후배니까 참아. 아니면 그놈의 느린 손 좀 고쳐 보든지.”
슬슬 다가오는 술기운과 졸음에 김지훈이 어느새 코를 골고 있었다. 이경석이 차 열쇠를 빙빙 돌리며 피식 웃었다.
‘홍재순 때문에 힘들 텐데 차까지 말썽이냐. 지훈아, 고생 좀 해라. 삼 개월 그거 금방이잖아.’
다음 날 아침 일찍 고경아와 만나 데이트를 했다.
언제 연락이 됐는지 정훈철 부부와 함께 점심까지 먹었다. 잊지 않고 항상 연락을 하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고경아가 분개를 하며 홍재순의 만행을 두고 열변을 토했다. 정훈철과 한수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김지훈은 말이 없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뼛속까지 나쁜 놈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혹시 정갑수라면 모를까?
그렇게 주말 오프가 지나갔다.
김지훈이 구미로 가는 내내 잠을 잤다. 비몽사몽간에 양수리의 푸른 강물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고경아와 결정적인 순간까지 가기만 하면 그 직전에 바로 눈이 떠졌다. 꿈속에서도 이루기 어려운 사랑에 한숨만 나왔다.
그 때문인지 도통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간신히 주말에 온 환자들을 파악하고 또 잤다. 한 번 밀려오기 시작한 잠이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이번 주까지 만이다. 어떤 사연이 있든 변하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각오를 단단히 한 김지훈이 홍재순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회진을 돌고 정규 수술을 들어갈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회진을 도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았다. 은연중 자꾸만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서도진도 신경 쓸 만한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딱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홍재순이 뭔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후에 응급실로 탈장 환자가 왔다. 일찍 왔으면 아무 탈도 없었을 텐데, 주변 사람들 말만 듣고 지켜보다 응급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병을 키웠다. 탈장 주머니로 빠져나온 장이 정복되지 않아 괴사 위험에 빠진 것이다.
김지훈이 당연한 듯 세컨을 섰다.
제대로 병을 키웠다. 배 밖으로 빠져나온 장의 일부가 목이 졸려 이미 썩어 가고 있었다. 장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늘도 시간이 꽤 걸렸다. 홍재순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그런데 송동화 과장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김지훈도 여느 때처럼 똑같이 홍재순에게 인사를 했다. 수술실을 나가던 홍재순의 눈빛이 묘했다.
‘뭐지? 왜들 이러는 거야?’
예전에 간혹 가물에 콩 나듯 있었던 일이었다. 며칠 이러다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송동화 과장이 확실히 달라졌다. 비록 아뻬나 탈장 같은 기본적인 수술이었지만, 홍재순에게 하루에 하나 꼴로 수술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인지 그때마다 김지훈에게 퍼스트를 서라고 하며 자신은 참관만 했다.
김지훈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세컨보다는 퍼스트를 서는 것이 훨씬 재밌고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수술이 거듭될수록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확실히 두려워하는 거야. 실수를 두려워하는 걸까?’
실수는 홍재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집도의와 퍼스트의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실수를 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김지훈이 홍재순과 손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실수에 대비해 더욱 집중해야 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술 몇 번 한다고 실력이 확확 늘지는 않는다. 홍재순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퍼스트를 선 덕에 한결 수술이 덜 지루하긴 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서도진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재순의 태도가 상당히 이상해진 탓이었다.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말투가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특히 눈에 보이게 김지훈을 괴롭히던 모습이 사라졌다.
“선생님, 홍재순 선생님이랑 말 좀 하셨어요?”
“왜?”
“지난주하고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아서요.”
김지훈이 웃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랬다. 이대로만 가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아직은 멀었지만 그래도 치프처럼 수술을 받고 있는 홍재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시간, 홍재순이 전화기를 붙잡고 누군가와 오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전적으로 자신을 믿어 주고 힘을 준 유일한 사람, 바로 아버지였다.
송동화 과장이 금경태 과장의 말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김지훈은 또 왜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제는 혼자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나이가 훌쩍 지난 지 오래였지만 너무 지친 모양이었다.
(재순아, 난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너를 믿고 지지할 거야. 지금 당장 수련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괜찮다. 하지만 네 말을 들어 보니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것 같구나. 잘 생각해서 결정했으면 한다. 때론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우연치 않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 게 인생이야.)
그날 홍재순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정말 오래간만에 분노와 시기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있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만큼 비겁한 일도 없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 사실 하나만은 분명했다.
목요일 오후 회진을 돌고 난 후, 홍재순이 뜻밖의 말을 했다.
“김지훈, 너 오늘 오프지? 오더 빨리 내고 진달래 식당으로 와. 도진이한테는 말하지 말고.”
단둘이 보자고 했다. 당직인데도 오더를 김지훈에게 맡겼다. 무언가 시간을 아낄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반가운 일이었다. 최소한 대화를 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오더를 내고 진달래 식당으로 향했다.
혼자 구석에 앉아 있던 홍재순이 김지훈이 들어오자 삼겹살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김지훈이 소주잔을 채웠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이 잠겼던 홍재순이 소주를 탁 털어 넣었다.
어색하면서도 묘한 분위기에 김지훈이 술잔만 멀뚱멀뚱 보았다. 그깟 술 한 잔에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문득 이제야 이경석의 말이 생각난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을 전혀 못한다고 했는데 어쩌려고 술을 마시지? 그리고 오늘 당직이잖아.’
홍재순이 술잔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송동화 과장은 손이 느리다고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다. 치명적인 실수까지도 감싸 준 후배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전공의가 된 이후 가장 즐겁고 행복한 주였다. 처음 전공의가 됐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는 나도 희망에 부풀었었는데.’
그러나 느린 손과 연이은 실수는 모든 것을 뒤틀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지적을 받았다. 때론 모멸감을 느낄 정도였다. 점점 실수가 두려워지며 가뜩이나 느린 손이 더욱 느려졌다. 급기야 선배는 물론 동기와 후배들의 눈길도 달라졌다.
그래도 참고 최선을 다했지만 점점 도가 지나쳤고, 한 번 무너진 자존심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았다. 그 탓인지 홍재순도 변해야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금경태, 아버지 병원이 있으니까 수술은 기본만 하고 논문만 잘 써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 놓고 그따위 짓을 해? 당신한테 필요한 것은 내 아버지의 지위뿐이었어.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되니까 날 이용만 하고 끝내겠다고? 송동화 과장에게 말해 준다는 것이 고작 수술 개수를 채우는 거였단 말이지.’
홍재순이 이를 악물었다. 금경태 과장에게는 어떤 도움을 받은 적도 없었다. 도리어 어렵기만 한 상황에서 금경태 과장이 먼저 호의를 보였다. 일반 외과를 책임지는 사람이었기에 믿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금경태 과장을 냉정하게 대하는 순간 돌아온 것은 냉대와 무시였다.
급기야 논문을 쓰는 일까지 자신을 이용했다. 전공의들을 교육하고 이끌어야 할 과장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남은 것은 불신과 증오와 분노뿐이었다.
그때부터 일반 외과 의국이라면 이가 갈렸다. 전문의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전공의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생각할지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들 역시 자신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구미에 와 김지훈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김지훈은 정말 날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어. 나와 친해진다고 해서 득이 될 일도 없잖아.’
한참이 지나서야 홍재순의 입이 열렸다.
“김지훈, 너 나한테 왜 이래?”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넌 왜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냐고 묻는 거야. 넌 화도 안 나고, 배알도 없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연히 수첩을 본 일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지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김지훈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같은 의국원이 아니었으면 악어처럼 무시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 수밖에는 없었던 이유와 사연이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서운할지 모르지만 솔직한 생각이었다.
“선생님, 전 2년차고 선생님은 치프십니다.”
“고작 그게 이유야? 난 날 대하는 네 태도가 왜 변했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2년차인 전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홍재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자신을 무시했던 전공의들 역시 같은 의국원들이었다. 같은 의국원이라는 사실이 이유가 된다면 그들 역시 김지훈처럼 행동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르게 자신을 대했다.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당연히? 너 내 손 봤잖아. 그런데도 내가 치프로 보여? 아뻬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정말 치프로 보여?”
홍재순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