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딱 일주일이다 (2)
복부 사진의 좌우가 바뀐 것 같았다.
‘사진을 잘못 찍었나? 아니면 마킹(marking)을 틀리게 한 거야?’
김지훈이 간호사를 보았다.
“간호사, 여기 이 환자 좌우 확실하게 표시해서 흉부하고 복부 사진 다시 찍어요.”
“왜요? 샘.”
“L 자가 반대쪽에 있네요. 방사선과에서 잘못 표시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다시 찍어요.”
간호사가 짜증을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샘, 요새 방사선과 기사가 새로 왔는데 실수를 너무 많이 하네요. 초짜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이런 것도 틀리네요. 이거 누구한데 말해야 하죠?”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누구한테 말하긴. 우리도 다 올챙이였습니다. 한창 바쁘고 일이 손에 안 익었으면 실수할 수도 있죠. 기분 나쁘지 않게 조용히 잘 말해요.”
“다들 샘 같으면 좋겠네요.”
핀잔인지, 칭찬인지 모를 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투리가 강하게 섞이면 지금도 헷갈렸다. 다만 쌤이 아니라 샘이라고 했으니, 핀잔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긴 했다.
잠시 후, 사진이 나왔다. 뷰박스에 사진을 건 김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라? 이게 뭐야? 간호사, 좌우 확실히 표시하라고 했죠?”
“네, 확실히 말했어요. 왜 그러세요? 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지훈이 전화기를 잡았다. 다행히 의국에 아직 홍재순이 있었다.
“선생님, 김지훈입니다. 응급실에 환자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야, 나 오늘 오프야, 인마. 니가 알아서 해. 아직도 적응을 못했어?)
역시나 목소리가 차갑고 삐딱했다. 의미는 다르지만 순간 울컥하는 것을 보니 적응을 못한 것은 분명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돌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들리면 난리가 날 것이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그저께 선생님이 낮에 보신 환잔데 다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간 홍재순이 낮에 서도진과 단둘이 환자를 보았던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었고, 내심 찜찜했던 환자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께면 왼쪽 배 아팠던 환자? 근데 왜?)
“아뻬 같습니다, 선생님.”
어이가 없는지 홍재순이 코웃음을 터트렸다.
(왼쪽이야, 인마. 정신 차려. 이 새끼가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말끝마다 욕이었다. 김지훈이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예. 왼쪽 맞는데 불완전 사이투스 인버수스 같습니다.”
(뭐? 사이투스 인버수스? 역위증이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말문이 턱 막힌 홍재순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정말 보기 드물게 총알처럼 달려왔다.
흉부와 복부 사진을 보는 홍재순과 서도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흉부 사진에서 심장은 정상적으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부 사진이 이상했다. 사진상에서는 왼쪽에 있어야 할 간이 오른쪽에서 보였다.
Partial Situs Inversus!
불완전 장 역위증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위와 소장, 그리고 대장도 뒤집혀 있다는 말이었다. 즉, 아뻬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 있는 의미였다. 선천적 기형으로 대단히 희귀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역위증이 아무리 희귀하다고 해도, 이 환자의 경우에는 사진만 제대로 보았어도 처음에 발견할 수 있었다.
실수를 하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X-ray는 정면에서 찍고 그대로 현상하기 때문에 좌우를 반대로 보게 된다. 즉, 환자의 왼쪽 부위가 사진상으로는 오른쪽에 위치한다. 간단히 말해, 심장은 왼쪽 가슴에 있지만 사진상에서는 오른쪽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X-ray 필름은 투명하기 때문에 뒤집어 걸어도 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따라서 좌우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 전 좌우를 L(left)과 R(right) 자로 반드시 표시한다.
역위증처럼 희귀한 케이스를 빠르게 잡아낼 목적도 있다. 그러나 장기의 위치가 바뀌는 경우는 드물다 못해, 방사선과 의사라고 해도 평생 동안 한 번도 못 볼 수 있었다.
그 탓에 사진을 걸 때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흉부 사진은 심장이 오른쪽에 위치하게 하고, 복부 사진은 간의 음영이 왼쪽에 위치하도록 걸게 된다. L 자나 R 자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응급실 인턴과 서도진, 그리고 내과 전공의와 홍재순까지 모두 L 자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아뻬였지만 명백한 실수란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런 케이스에서는 보호자들도 납득하기 마련이었다. 워낙 드문 질환인 데다, 제아무리 큰 병원 의사들이라고 해도 초기에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홍재순이 안색을 굳혔다.
‘수술은 몰라도 이론과 내가 본 환자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L 자 하나 무시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김지훈, 우리가 다 놓친 걸 바로 본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답답하기만 했다. 차트를 보니 이미 복부 CT까지 필요한 오더는 다 낸 상태였다. 홍재순이 순간 갈등에 휩싸였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김지훈에게 넘길지, 아니면 최소한 책임은 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복부 CT가 나왔다. 그때 하필이면 송동화 과장은 물론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까지 응급실로 들어왔다. 퇴근 전에 환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외과 의사들에게는 몸에 익은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들이 모두 모여 있자 송동화 과장이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지훈아, 환자 있어? 간만에 퇴근 좀 정시에 하려고 했더니 오늘도 글렀나 보네. 무슨 환자야?”
홍재순이 김지훈을 보았다. 이런 케이스를 잡아냈으니 당연히 좋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가뜩이나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데 아예 쐐기를 박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김지훈이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치프는 치프고, 난 2년차다. 그리고 전공의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잖아.’
치프 앞에서, 혹은 윗년차 앞에서 아랫년차가 직접 과장이나 스태프들에게 노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원칙이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뒤로 물러나며 홍재순을 보았다. 노티는 당연히 치프가 해야 할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홍재순이 입가에 침을 바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당연한 일일 뿐인데도 기분이 묘해진 것이다.
‘한마디만 하면 내 실수는 바로 드러나고 과장들에게 칭찬이란 칭찬은 받을 케이스인데, 이 자식이 왜 이러지?’
어쨌든 김지훈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실수는 수술만으로도 충분했다.
“과장님, 불완전 장 역위증 환자로 판단됩니다.”
“역위증 환자?”
다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책에서만 보았던 질환을 직접 보게 될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환자를 진찰한 후, 흉부와 복부 사진 및 복부 CT까지 확인한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홍재순 선생님, 환자를 꼼꼼히도 잘 봤네요.”
“그러게. 이런 경우는 놓치기 십상인데 말이야. 야! 홍재순, 대단하네. 열심히 공부한다더니 보람이 있어.”
장성기 과장의 말에 변상훈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게 공부로 되는 일이야? 재순이가 원래 학교 다닐 때부터 좀 느려서 그렇지, 송 과장 말처럼 꼼꼼했잖아. 역시 공짜로 치프 되는 게 아니야. 장 과장, 안 그래?”
다들 흐뭇하게 웃었다. 홍재순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의사이자 후배였다. 마음 한구석에 아끼는 마음이 없을 수가 없었다. 다소 의도적이고 과장된 칭찬이었지만, 어엿한 외과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홍재순이 얼굴을 붉히며 김지훈을 찾았다. 김지훈 때문이었지만 얼마 만에 들은 소리인지 몰랐다. 평상시처럼 한발 떨어진 스테이션에서 서도진과 함께 오더를 내고 있었다.
순간 기분이 묘해진 홍재순이 어색하게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잠시 후, 보호자에게 충분히 상황을 설명한 송동화 과장이 수술 방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홍재순 선생님, 수술 들어갑시다. 오프지만 이런 케이스는 반드시 봐야겠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올린 꼴이었다. 도리어 홍재순은 환자를 놓친 의사였다. 김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지훈이 후다닥 달려와서는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선생님, 과장님 올라가셨는데 빨리 올라가시죠. 전 먼저 가서 수술 준비부터 하고 있겠습니다.”
홍재순이 복잡한 눈빛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그 뒤로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아직도 감탄을 하며 자신을 칭찬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빴다. 김지훈의 본심을 알 수 없었고, 결국에는 모두가 알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스스로 입을 열 수 없었고, 김지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아뻬가 반대쪽에 있는 까닭에 집도의는 세컨 자리에 서고, 퍼스트가 써드 자리에 섰다. 상당히 어색한 위치였다. 송동화 과장도 뭔가 어색한지 천천히 수술을 진행했다.
“홍재순 선생님, 역위증 환자에게 동반되는 기형이 또 있지 않아요?”
“부분 역위증은 대부분 특별한 기형이나 이로 인한 증세를 보이지 않지만, 비장이 없거나 아니면 도리어 여러 개가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다행히 비장이 정상적인 위치에 하나만 있었습니다.”
홍재순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 야! 근데 그걸 다 외우고 있었어요? 참! 대단하네.”
드물게나마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희귀한 질환이었다. 그런데 동반 기형까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론은 끝내주네. 아!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데, 그런 시간이 나올까?’
잠깐 샛길로 샜던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역위증 환자의 내장 위치와 홍재순의 손이 겹쳤다. 위치가 반대여서 그런지 전보다 더 느렸지만, 그만큼 머뭇거리는 느낌도 강하게 다가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술이 끝났다. 하지만 송동화 과장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빠르게 할 수술도 아니었고, 홍재순이 간만에 치프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다시 한 번 차트를 살폈다.
그 순간 홍재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응급실 차트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었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송동화 과장이 나간 후, 홍재순이 조용히 차트를 펼쳤다. 자신이 본 응급실 차트가 맨 뒷장에 꽂혀 있었다.
누가 이랬을까?
김지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환자를 회복실로 옮기고 있었다. 실제로 김지훈 역시 왜 응급실 차트를 뒤로 뺐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든 생각일 뿐이었다.
‘도진이하고 간호사들 입단속한 게 잘한 일이겠지?’
어쩌면 실수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혔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일을 잘해 왔던 사람도 실수 하나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 하물며 홍재순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할 타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잘한 일일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주말이 왔다. 드디어 오프를 갈 수 있게 됐다.
은근히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응급실에 아뻬가 또 온 것이다.
‘이 동네는 아뻬가 새끼를 치나. 정말 많네. 에휴! 세컨 서기도 지겹다.’
아무리 적응을 하고 싶어도 홍재순의 느린 손에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노티를 하고 수술 준비를 할 무렵 송동화 과장이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럴 때 첫 수술을 주면 홍재순 선생도 마음이 조금은 변하겠지. 어제 환자 본 것처럼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고, 이제부터는 아랫년차들까지 챙기면 좋겠네요. 다행히 환자 케이스도 정말 좋네.’
“홍재순 선생님, 수술합시다. 김지훈, 퍼스트 서.”
한 달이 다 되도록 홍재순에게는 수술을 주지 않았던 송동화 과장이었다. 김지훈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면 홍재순의 표정은 묘했다.
‘역위증 환자 때문에 수술을 주는 거겠지? 제길! 이것도 김지훈 이 자식 덕이네. 그래. 수술 건수만 채우면 되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자.’
약간의 긴장 속에 수술이 시작됐다.
비쩍 마른 남자 환자였다. 케이스가 워낙 좋아 홍재순의 느린 손으로도 제법 빠르게 배가 열렸다. 잠시 머뭇거린 홍재순이 신중하게 아뻬를 찾았다.
끝부분이 빨갛게 부어오른 아뻬가 술술 끌려 나왔다.
아주 쉽게 절제할 수 있는 케이스였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숨을 내쉬었다.
“아뻬 잘 익었네. 홍재순 선생님, 외래에 급한 환자가 있어서 보고 올 테니까 수술 진행해요. 김지훈, 퍼스트 잘 서.”
“예, 선생님.”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홍재순의 손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수술 기구에 잡힌 아뻬를 이리저리 보며 머뭇거리던 홍재순이 천천히 동맥이 주행하는 조직을 박리했다.
깨작깨작! 느릿느릿! 조물락조물락!
동맥을 분리할 때가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과정이라지만 지금은 눈에 환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과감하게 동맥을 잡고 자르고 묶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겁을 낸다고 느껴질 정도로 느려도 정말 느렸다.
서도진이 답답한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김지훈이 옆구리를 툭 치며 눈을 부릅떴다.
‘표시 내지 마.’
‘죄송합니다, 선생님.’
따가각!
마침내 홍재순이 동맥을 잡았다. 김지훈이 아뻬로 이어지는 부분을 잡자 홍재순이 조심스럽게 동맥을 잘랐다. 살짝 피가 묻어 나왔다.
“타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 본 과정이었다. 김지훈이 익숙한 손길로 잘린 동맥 주위를 실로 감쌌다. 이제 매듭을 지어 묶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미처 매듭을 짓기도 전에 기구가 툭 하고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