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딱 일주일이다 (1)
하필이면 식사 시간에 딱 맞춰 빤뻬리 환자가 떴다.
아무리 여기저기 연락을 해도 홍재순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지만 최소한 홍재순의 숙소는 가 봐야 했다.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이 바로 치프였다. 그런데 언제 들어와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김지훈이 노크를 했다. 사람은 없고 오색 줄이 그어진 책과 수첩 하나만 보였다.
‘어휴! 주말 내내 붙어 있는다 싶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빤뻬리 환자도 있는데 이 시간에 또 어딜 간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송동화 선생님한테 바로 노티하고 말까?’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김지훈이었다. 아무리 홍재순이 싫다고 해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돌아서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책상 위에 놓인 수첩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만일 홍재순의 사적인 일들이 적혀 있다면 결코 훔쳐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첩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고 싶다는 유혹이 훨씬 더 강했다. 솔직히 홍재순의 머릿속과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문에 귀를 가져갔다. 주말인 탓인지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낡고 색이 바랜 한 권의 수첩.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무도 볼 사람이 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수첩을 열었다. 슥슥 수첩을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일기장이 아니었네. 하긴 요새 일기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피식 웃으며 거의 마지막 장을 펼치던 김지훈이 멈칫거렸다.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어들이 보였다.
<느린 손. 실수의 연속. 금경태. 논문.
선후배들의 눈빛. 무시. 자존심. 수술. 전문의.>
마치 낙서처럼 어지럽게 나열된 단어들이었다.
무언가 기분이 묘해졌다.
슬며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순간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떼지 못했다.
<송동화, 서도진, 유석재. 좋은 후배들이다.
김지훈. 부럽다. 정말 뛰어난 놈이다.
잘난 놈은 잘났다고 인정하자.
그런데 난 김지훈에게 왜 그럴까?
자존심? 나도 잘할 수 있을까? 불가능?>
서른이 훌쩍 넘은 사람의 말 못할 고민이었다.
군데군데 얼룩져 글자들이 번져 있었다. 바짝 말라붙은 눈물 자국처럼 보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이런 글을 썼기에 눈물까지 흘렸단 말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김지훈이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홍재순의 낙서처럼 휘갈긴 단어와 글 속에 숨어 있는 의미와 아픔이 흐릿하게 보였다.
홍재순도 이혁원처럼 가슴속 깊이 사연을 숨기고 있었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고, 하필이면 김지훈이 홍재순의 분노와 좌절, 그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응급실로 돌아온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턴이 손에 불이 나게 전화를 해 대며 열심히 홍재순을 찾고 있었다. 그 와중에 김지훈의 눈치까지 보고 있었다. 일반 외과 의국 분위기가 어떤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턴들까지 내 눈치를 보네. 후우! 도대체 이게 뭐냐. 수첩에서 본 게 정말 홍재순 선생님의 진심일까?’
고경아와 손일석의 말과 수첩에 적혀 있던 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홍재순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홍재순은 학교 선배이자 의국 선배였고, 나이까지 훨씬 많았다. 어떤 면을 보아도 김지훈이 조언을 하거나 도와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도리어 아는 척을 했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질 것이 빤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우습게도 금경태 과장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단 한 사람의 무관심과 사나운 눈길만으로도 얼마나 힘들 수 있는지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때 스승과 이혁민 교수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홍재순에게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결코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테이션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심각한 고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알게 된 이상 최소한의 노력을 해 보는 것이 맞았다.
아랫년차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2년차답게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그때 인턴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김지훈을 불렀다. 홍재순과 이제야 연락이 된 것이다. 너무도 조심스러워하는 인턴의 모습이 씁쓸하기만 했다. 어느 틈엔가 자신도 후배에게 홍재순과 똑같은 사람이 돼 있었다.
‘미치겠네.’
노티를 받고 내려온 홍재순이 차트를 확인하다 말고 난리를 쳤다.
“김지훈, 검사 결과 나온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 연락해? 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지.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야?”
다른 때 같았으면 두 눈 똑바로 뜨고 숙소까지 올라갔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반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대꾸 자체를 안 했을지도 몰랐다.
또다시 불안해하는 인턴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재순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김지훈은 치프와 후배들 사이에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구겨진 홍재순의 얼굴 때문에 의국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자신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마음을 다잡았다.
‘치프는 치프다. 난 2년차고, 내 밑에는 후배들이 있다. 딱 일주일만 노력해 보자.’
“죄송합니다, 선생님.”
정말 잘못했다는 것처럼 김지훈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순간 다소 의외라는 듯 홍재순이 눈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앞으로 확실히 해. 과장님께 노티는 했어?”
“아직 안 했습니다.”
홍재순이 혀를 차며 전화기를 잡았다. 치프가 당직인데 김지훈이 먼저 노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얼마 후, 응급실로 나온 송동화 과장이 보호자를 만난 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동안 주말까지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치프를 믿을 수 있어야 과장도 쉴 여건이 주어지는 구미 병원의 현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재순은 그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솔직히 믿을 수도 없었다.
빨리 수술을 끝내고 쉬고 싶었다. 김지훈을 퍼스트로 세우면 한결 편할 것이다. 홍재순도 송동화 과장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표정이 굳어 갔다. 그런데 김지훈이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과장님, 제가 세컨을 서야 하니까 인턴 선생에게 잠시 응급실을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스케줄 낼까요?”
2년차 입에서 스스로 세컨을 선다는 말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홍재순을 무시하고 김지훈을 퍼스트로 세울 수는 없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쓴 입맛을 다셨다.
수술이 시작됐다.
낙상으로 인한 소장 파열이었다. 불과 10센티미터 내에서 세 곳이나 터졌다. 너무 좁은 범위에 다발성 손상을 입어 파열 부위만을 봉합할 수는 없었다. 소장을 일부 자르고 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홍재순의 느린 손은 문제였다. 2시간 정도면 끝날 수술이 무려 3시간이나 지나서야 끝났다. 송동화 과장이 답답한 콧소리를 내며 나갔고, 마취과는 아예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딱 한 사람만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불평불만이 안 터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취가 끝나고 환자를 회복실로 옮기던 김지훈이 힘차게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누구에게 한 말일까?
김지훈이 인사를 할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뿐이었다. 마취과 전공의가 있긴 했지만 동기였다. 더군다나 김지훈의 눈은 분명 홍재순을 보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홍재순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 자식이 작전을 바꿨나? 하긴 너도 이젠 힘들 거야. 그래야 변하는 건 없어. 어차피 너도 다른 놈들과 다를 바가 없잖아. 속으로는 날 무시하고 있겠지. 내 느린 손을 볼 때마다 낄낄 웃고 있겠지.’
사람은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홍재순이 숙소로 올라가기도 전에 김지훈의 목소리를 지웠다.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돌던 홍재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김지훈의 목소리가 유난히 활기찼다. 더구나 홍재순은 여전히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
아니었다. 사실 분위기가 워낙 안 좋아 그렇게 들릴 뿐, 다른 병원에서는 당연하게 들릴 목소리였다. 어떤 전공의의 목소리를 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극히 안 좋았던 분위기가 일상적인 일까지도 바꾼 모양이었다.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던지 회진이 끝나고 수술 방으로 향하던 서도진이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혹시 주말에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니, 왜?”
“근데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네요.”
“그래? 다행이네. 도진아, 우리가 얼굴 구겨야 후배들만 힘들어지잖아. 너도 서울에서처럼 웃으며 일해.”
서도진이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위가 안 바뀌는데 그게 마음대로 돼요?”
“노력해야지. 누가 뭐래도 우리가 몸담은 의국이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서도진이 해야 할 일은 물론 인턴 일까지 챙기면서도 목소리는 여전히 좋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던 서도진이 웃고 말았다.
‘지훈이 형이 웃으니까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그럼 나도 웃어야 되는데, 되나? 에이! 홍재순 선생님 얼굴이 펴져야 웃지. 난 거기까지는 못하겠다.’
결정적인 도화선일 수 있는 홍재순의 사연을 모르니 될 리가 없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서도진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안 나왔지만, 표정을 봐서는 온갖 욕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홍재순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김지훈은 웃고 있었다. 서도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정쩡했고, 송동화 과장은 다소 의아한 얼굴이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은 항상 터지기 마련이었다.
수요일 오후였다. 김지훈이 잠깐 송동화 과장이 시킨 일을 하는 사이 응급실에 환자 한 명이 온 모양이었다.
홍재순이 성질을 있는 대로 냈다.
“김지훈, 넌 어디 갔었어? 응급실까지 내가 봐야 돼?”
“죄송합니다. 과장님이 일 좀 시키셔서요.”
“확실하지. 핑계 대는 거면 알아서 해.”
순간 콧등을 찡그렸던 김지훈이 바로 얼굴을 폈다.
“예. 다음부터는 빨리 일 끝내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홍재순이 김지훈을 노려보다 코웃음을 치며 의국을 나갔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았다.
“무슨 환자가 왔었어?”
“왼쪽 아랫배가 아픈 환잔데, 내과에서 좀 이상하다고 봐달라고 한 환자입니다. 반사통까지 있어서 이상하긴 한데, 생각할 게 없더라구요. 그래서 홍재순 선생님한테 노티했더니 심한 장염이라고 하고는 끝냈어요.”
지그시 배를 누를 때 아픈 통증이 압통이다. 반면 반사통은 배를 누르던 손을 갑자기 뗐을 때 느껴지는 통증을 말한다. 심한 경우 환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통증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는 장 속이 아니라 밖으로 염증이 퍼졌다는 의미로, 복막염 진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소견이었다.
그러나 외상이나 기존 병력이 없는 환자였다. 또한 장염이 심한 경우에도 반사통이 가끔 나타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게다가 아무리 손이 느린 홍재순이라고 해도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치프가 그 정도를 감별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하루아침에 변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로도 화를 내니까 정말 힘드네. 웬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제길! 그놈의 수첩은 왜 봤을까? 설마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니겠지.’
나름 깊게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틀도 되지 않아 기운이 쫙 빠졌다. 솔직히 홍재순이 애먼 말을 할 때마다 속이 끓고 화가 날 정도로 욱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일주일만 참자. 딱 일주일이다. 나도 계속 저렇게 나오면 더 이상은 못해.’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어느새 금요일 오후가 됐다.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홍재순은 변하질 않았다.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5시쯤 응급실에 환자가 왔다는 연락이 왔다.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틀 전에 홍재순이 보았던 24살의 젊은 남자 환자였다. 왼쪽 아랫배에서 반사통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오른쪽이었다면 무조건 아뻬라고 할 경우였다.
‘내과에서 투약을 했는데도 증상이 더 심해졌단 말이지. 저 나이에는 다른 질환이 있기도 힘든데. 복부 CT까지 찍어 봐야 하나.’
다시 한 번 차트를 확인하고 환자를 진찰한 김지훈이 흉부와 복부 사진을 꼼꼼히 살폈다. 별다른 이상 소견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막 돌아서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