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27화 (327/1,329)

제11화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Ⅱ (3)

가뜩이나 안 좋았던 분위기가 엉망으로 변했다.

홍재순이 김지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고, 때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김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재순이 뭐라고 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더가 나오면 묵묵히 일을 하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절대 함께 있지 않았다.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 서도진이 전전긍긍했다.

‘지훈이 형이 이러는 거 처음 보네. 도대체 무슨 말까지 나온 거야? 설마 지훈이 형을 때리진 않았겠지?’

다행히 금요일과 주말은 홍재순이 오프였다.

토요일 오후 홍재순이 오프를 가고 나서야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그래야 거기가 거기였다.

김지훈이 하루 종일 얼굴을 굳힌 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탓인지, 서도진과 인턴이 김지훈의 눈치만 보았다.

고경아와 통화를 하면서도 김지훈의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쌍욕까지 들은 생각이 나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 김지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경아 씨, 욕까지 하다니 그게 말이 돼요? 아무리 치프라고 해도 할 말, 안 할 말이 있지.”

(어머머! 솔직히 걱정은 했는데 그 정도였어요? 다들 불쌍하고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네요.)

고경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지훈이 소리를 질렀다.

“불쌍하고 안타까워요? 홍재순이?”

고경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 씨,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 봐요. 홍재순 선생님도 원래는 안 그랬어요.)

“경아 씨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사람 본바탕이 어디 가요? 원래 그런 사람이지, 아니긴 뭐가 아냐.”

(지훈 씨, 난 홍재순 선생님이 1년차일 때부터 봤잖아요. 처음에는 정말 열심히 하셨고, 백 일 당직 중에도 항상 웃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점점 변해 가더라구요.)

“변해요? 아니,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해요?”

(그냥 우리끼리 한 말인데 느린 손이 제일 문제였나 봐요. 수술 중에 몇 번 실수를 했고, 그래서 첫 집도도 제일 늦게 했을 거예요.)

김지훈이 흠칫거렸다.

“실수라니요?”

(제가 아는 건 하난데, 아뻬 수술 중에 동맥 타이하다가 실을 끊어 먹었어요. 그때 집도를 한 선생님이 4년차였는데 아주 난리가 났었어요. 결국 수술 방에서 쫓겨났다니까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그건 내가 직접 봤어요. 하여간 그 이후로 별것도 아닌 일에 얼마나 심하게 혼이 나던지, 오죽하면 우리가 불쌍하다고 했겠어요. 그리고 홍재순 선생님 동기들이나 지훈 씨 연차들도 잘한 거 없어요.)

“우리는 후밴데,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어머! 다들 은근히 무시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어요. 특히 신현수 선생님은 아예 선배 취급도 안 하는 것 같던데요?)

뜻밖의 말에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1년차 때의 신현수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동기나 선배들도 그랬다니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안에서 보는 것보다 밖에서 보는 눈이 훨씬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람이 변했다는 거예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건 나도 모르죠. 분명한 건 2년차가 돼서 다시 서울에 왔을 때는 그렇게 순하고 착했던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홍재순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을지 몰랐다.

은근히 씁쓸해진 김지훈이 화제를 돌렸다. 한동안 다른 얘기를 하는 사이 마음이 좀 풀렸다.

(지훈 씨, 홍재순 선생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혹시 마음으로 대하면 다시 돌아올지 알아요? 파이팅!)

“고마워요, 경아 씨. 사랑해요.”

찜찜했다. 하지만 홍재순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항상 사실이 되는 모양이었다.

한 주 내내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중환자실 환자가 무사히 회복돼 병실로 올라갔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당연히 치료 방침을 두고 몇 차례 살벌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국 김지훈을 꺾진 못했다.

그게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홍재순이 김지훈을 아예 인간적으로 깔아뭉갰다. 물론 중환자실 환자가 별 탈 없이 좋아졌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것이 원인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참자, 참자, 참자.’

김지훈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참을 인(忍) 자를 가슴속에 새겼다. 피스라는 말로는 도저히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웃기는 일까지 생겼다. 홍재순이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처럼 송동화 과장에게는 도리어 더 싹싹하게 굴었다.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진짜 못됐네. 홍재순 선생님, 제발 나잇값이라도 하세요. 정말 우스워 보입니다.’

결국 김지훈의 감정도 갈 데까지 갔다. 동기였으면 주먹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고경아의 말을 들으며 생겼던 마음이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송동화 과장이 조용히 김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나도 대충 사정은 짐작하고 있다만 치프하고 문제 일으켜서 너한테 좋을 일이 없어.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당분간은 힘들어도 니가 좀 참아.”

송동화 과장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의국원들을 잘 살피는 것 또한 치프의 역할이었다. 비록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좋아졌지만 홍재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눈에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과장이 직접 의국원들 간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금경태 과장의 말까지 생각하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분위기 탓인지 송동화 과장은 누구에게도 수술을 주지 않았다.

또다시 주말이 왔다. 이번 주는 김지훈이 오프를 갈 차례였다. 고경아를 만날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런데 홍재순이 김지훈의 가슴에 아예 불을 질렀다. 주말 오프를 서도진부터 보낸 것이다.

4주 연거푸 주말 당직을 서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뜨거운 불덩이를 토해 내야 했다.

‘오프를 주는 것이 아무리 치프의 권한이라고 해도 더 이상은 못 참는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한계에 다다른 김지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홍재순을 찾아갈 참이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서로 흥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끓어오르는 가슴을 도저히 식힐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뒤로 밀린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깜짝 놀란 서도진이 김지훈을 막아섰다.

“선생님.”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김지훈만 보고 있었다.

순간 소리를 지르려던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서도진의 얼굴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보였다.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홍재순과 똑같은 짓을 서도진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치프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도진이한테 고스란히 주고 있었나? 바람막이가 돼야 할 내가 도리어 후배들을 괴롭히고 있었잖아.’

시간을 보니 오프 가란 지가 벌써 30분이 넘었다. 1년차에게 오프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는 김지훈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김지훈 자신 때문이었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참아야 했다. 홍재순과 멱살을 잡고 싸운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도리어 상황만 더 악화시키거나, 최악의 경우 징계까지 먹을 수도 있었다.

‘그래. 니가 뭔 죄냐. 미안하고 고맙다.’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서도진의 어깨를 툭 쳤다.

“도진아, 빨리 오프 가. 인마.”

“선생님, 마음 푸세요. 죄송합니다.”

“니가 왜 미안해?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그리고 우리야 치프가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더 있냐.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

“에이! 오프 안 갈래요.”

“왜 안 가? 인마.”

“선생님, 그냥 저랑 틈틈이 놀면서 마음 푸시죠. 솔직히 갈 데도 없고 만날 여자도 없는데요, 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서도진도 오프를 가지 않을 기세였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난 밥 먹으러 갈 테니까 빨리 사라져. 만일 올라왔을 때 얼굴 보이면 다음 주 주중 오프는 아예 없다. 자식! 너 때문에 내가 웃는다.”

김지훈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홍재순을 욕하면서 정작 자신도 후배들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반성할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고마웠다. 선배 때문에 꼬인 마음을 서도진이라는 후배 때문에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경아와 통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프를 못 간다는 말에 고경아가 광분을 했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요? 전에 내가 한 말 다 취소예요. 아무리 자기가 치프라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고경아와 함께 욕을 한 바가지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씩씩거리며 병원으로 들어서자마자 방송이 나왔다. 손일석이었다.

(지훈아, 나다. 잘 못 지내지? 누구 때문에 힘들지?)

목소리가 발랄했다. 고소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놈의 주둥아리를 어떻게 할까?

“그래, 인마. 죽을 맛이다. 너도 죽고 싶지?”

(어허! 왜 이러시나. 하긴 그럴 것이다. 근데 말이야, 유석재 선생님이 한마디만 전하란다.)

“뭔데?”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네. 혁원이 봤지? 추가로 얻은 정보 있으면 내놔. 그 자식은 무슨 비밀 첩보원도 아니고 가족 관계를 아는 놈이 없어. 하오문 애들이 이렇게 무능력하게 보일 줄은 몰랐다.)

순간 뜨끔했다. 하지만 언젠가 이혁원과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때 손일석에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고경아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고작 일주일 봤어. 그것도 PK였는데 뭘 알아냈겠어? 다른 과 돈 데다 홍재순 때문에 정신이 없다.”

(오! 홍재순 선생님이 아니고 홍재순? 야! 김지훈이 많이 큰 거냐, 아니면 홍재순 선생님이 지독하게 구는 거냐.)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유석재 선생님이 뭐라고 했는데! 나 응급실 가야 되니까 빨리 말해.”

누구보다도 김지훈을 잘 아는 손일석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훈아,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니. 잘 들어. 힘들어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단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수술 중 실수 몇 번 하고, 손 느리다고 어마무시하게 타고, 수술도 거의 못 받았고, 선후배들이 다 무시했고. 하여튼 그렇단다. 파란만장하대.)

“파란만장? 그렇다고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미 아랫년차라고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나직해졌다.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눈치가 빠삭한 손일석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정갑수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만일 제때 말리지 못했다면 정갑수는 곤죽이 됐을 테고, 김지훈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뭔 일이 있었구나. 지훈아,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설마 너 주먹 쥐는 건 아니지? 그러면 절대 안 된다. 옛날에 양아치 패듯이 그렇게 때리면 정말 사고 난다. 홍재순 선생님은 곧 죽어도 치프야, 인마. 잊지 마.)

“이 자식이 누굴 깡패로 아나.”

(그래. 어떻게 하니. 니가 참아야지. 하긴 유석재 선생님도 홍재순 선생님 욕 안 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것 같다고 하더라. 에휴! 의국원이 몇 명인데 달랑 한 명만 이해를 하냐. 참 인생 희한하게 사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손일석과 통화를 하고 난 김지훈이 코웃음을 치다 말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유석재는 빈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오늘은 고경아도 화를 냈지만 전에 한 말을 생각하면 유석재의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야. 원래는 안 그런 사람인데 주변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야? 그러면 후배한테는 더 잘해야지. 제길! 괜히 들었나? 신경이 꽤 쓰이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숨겼던 본성이 나타난 건지, 아니면 실수와 느린 손, 그리고 의국원들의 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람이 변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가 뭔지 알면 뭐할까?

홍재순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김지훈도 변할 마음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구미 일반 외과 의국을 대표하는 치프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주말이 갑갑하고 냉랭하게 지났다. 단 한 끼도 같이 먹지 않았다. 일반 외과 전공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도리어 그게 마음이 편했다.

일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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