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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326화 (326/1,329)

제11화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Ⅱ (2)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정말 자존심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일이었다. 실력이 달려 같은 연차에게 수술을 빼앗겨도 화가 날 판에 아랫년차가 자신을 제치고 퍼스트를 섰으니, 홍재순의 기분이 어떨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홍재순의 손이 느린 탓이었지만 어쨌든 어색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이런 일까지 터져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김지훈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서도진이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어차피 바이탈이 흔들리거나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는 앞으로 선생님이 계속 들어가셔야 할 텐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에휴! 나도 모르겠다. 내가 홍재순 선생님 입장이면 기분이 정말 안 좋을 거야. 외과 의사가 자기 손 탓하기 쉽지 않잖아. 게다가 치프고.”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홍재순의 손을 빠르게 만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미 3개월을 꼼짝없이 이렇게 보내야 할 판이었다. 답답하기만 한 일이었다.

담낭 절제술에서 퍼스트를 선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8시까지 홍재순에게 하루 종일 시달렸다. 이젠 별 시답지 않은 일로도 인상을 썼다.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었다. 홍재순이 의국에 있으면 앉기도 불편했다. 교과서에 줄을 죽죽 그어 가며 공부를 하다가도 아랫년차들이 쉬는 모습만 보면 눈길이 사나워졌기 때문이다.

주간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가 학을 뗐다. 홍재순의 말투와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불과 이틀 만에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정규 수술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고마웠다. 오죽하면 주간에는 응급 수술이 뜨지 않기를 바랄 정도였다. 야간에 아무리 바빠도 홍재순이 없다는 사실 자체로 마음이 편안했다.

홍재순이 당직인 수요일은 악몽이었다. 밤 10시까지 오더를 내는 통에 시달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오늘도 응급 수술을 하던 중 세컨도 제대로 못 선다고 핀잔을 먹었다. 김지훈도 더 이상은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직 이 주도 안 됐는데 끝까지 가는구나. 씨펄! 수술이나 잘하면서 태우면 말이라도 못하지.’

그래도 환자가 최우선이었다. 중환자실 환자는 여전히 불안했고, 김지훈은 응급 수술이 뜨면 세컨을 서야 했다.

결국 서도진이 오프까지 반납하고 중환자실 킵을 했다. 그런데 칭찬은 못해 줄망정 중환자실 환자 치료를 제대로 못한다고 화를 냈다.

“서도진, 킵은 멋으로 해? 이따위로 볼 거면 그냥 오프 가, 이 새끼야. 김지훈, 넌 수술을 들어갔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1년차한테 맡기면 땡이야? 에이!”

홍재순이 사라지자 얼굴이 벌게진 서도진이 씩씩거렸다.

“선생님, 저 오프도 반납하고 킵하는데 저러면 안 되잖아요? 과장님도 이 정도 속도면 불안하기는 해도 회복이 빠르다고 하셨는데 왜 저래요?”

김지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치프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누구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즐겁고 화기애애해야 할 의국 분위기가 싸늘하기만 했다.

그렇게도 수술이 좋았건만, 도리어 그게 스트레스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불과 열흘 만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아랫년차나 동기들이 잘못하면 비록 화를 낼지언정 결국에는 서로를 다독이고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치프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홍재순의 경우에는 아예 기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하기만 했다.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김지훈이 서도진에게 고갯짓을 했다.

“내가 킵할 테니까 올라가 쉬어. 혹시 수술 뜨면 그때 다시 내려오고.”

그 말을 끝으로 김지훈이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환자만 보았다. 얼굴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서도진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지훈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말 화가 난 것이다.

서도진이 조용히 중환자실을 빠져나갔다.

‘지훈이 형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건데 큰일 났네. 이러다 정말 홍재순 선생님하고 한판 붙는 거 아냐?’

불안하기만 한 시간이 지났다.

김지훈이 어떤 상태인지 홍재순이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 목요일 아침에도 여전히 김지훈의 신경을 긁었다. 그동안 대답만은 꼭꼭 했던 김지훈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게 홍재순을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 아니, 한마디로 시베리아 벌판이었다. 인턴들까지 눈치를 보았다.

오후 회진에는 송동화 과장마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를 했다.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얼굴들 펴. 이래 가지고 환자 볼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김지훈과 서도진의 입만 열렸다. 눈가를 찡그리며 인상을 쓰는 홍재순의 모습에 김지훈이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이젠 과장님 말씀까지 무시를 하는 거야?’

목요일은 김지훈이 오프였다. 역시 오더를 다 내고 나니 밤 10시였다. 그런데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중환자실 환자 때문이었다.

“도진아, 중환자실 환자 호흡 어때?”

“이제는 파이팅을 조금씩 합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혈압과 혈당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패혈증까지 거의 다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호흡 문제가 걸렸다.

‘호흡 모드를 바꿀 수 있을까?’

가능할 수도 있었지만 폐 기능을 갑작스럽게 악화시킬 위험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의사의 지속적인 관찰과 손이었다.

‘오늘 밤 상황을 지켜보고 내일 아침에 모드를 바꿀 수 있을지 결정하자.’

당장이라도 홍재순이 없는 곳에서 머리라도 식히고 싶었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응급 수술이라도 뜨면 환자를 볼 사람도 없었다. 오프를 포기하는 것이 맞았다.

“도진아, 오늘 중환자실 환자 내가 볼 테니까 밀린 일이나 확실히 해 놔. 내일 아침에 말 듣지 말고.”

“선생님이 킵하신다고요?”

“뭘 그렇게 놀라? 너도 어제 오프 반납했잖아.”

“오늘은 홍재순 선생님이 당직이잖아요?”

“홍재순 선생님?”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치프에 대한 불신이 물씬물씬 묻어났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흔들고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밤새 환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직실에서 쉬며 수시로 상태를 살필 생각이었다.

삐이익! 삐이익!

인공호흡기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환자가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파이팅이었다.

강제적으로 밀어 넣은 호흡과 자발 호흡이 충돌한 것이다.

중환자실 간호사가 급히 달려왔지만 김지훈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조용히 환자만 지켜볼 뿐이었다.

삐이익! 삐이익!

1분이 지나서야 다시 경고음이 울렸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자발 호흡은 분당 육칠 회 정도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중 파이팅을 할 정도로 강한 호흡은 단 한 번뿐이었고, 나머지 호흡은 기계에 순응할 정도로 약하다는 의미였다. 아직은 강제 호흡 모드를 유지하는 것이 맞았다.

잠시 호흡기를 떼고 가래를 빼 준 김지훈이 환자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 환자가 다시 잠에 빠져들자 규칙적인 모니터 소리만 들렸다.

의자에 기대앉아 차트를 뒤적이며 지금까지의 검사 결과를 확인한 김지훈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비교적 안정적이라고는 하지만 혈압과 혈당은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기를 했다. 그나마 강력한 항생제 덕에 패혈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침까지 한 차례 파이팅이 더 발생했다. 역시 1분에 한두 번을 넘기지 못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에 모드를 바꿔 보는 게 안전하겠다. 인력이 부족한 주말에 바꾸기는 너무 위험해.’

마음의 결정을 한 김지훈이 오늘 나온 검사들을 쭉 확인했다. 환자는 확실히 회복되고 있었다. 드레인으로 나오는 삼출물로 판단할 때 수술 부위 역시 염증 없이 잘 아물고 있었다. 이 상태로만 가면 호흡기에만 신경을 써도 좋을 정도였다.

그때 웬일인지 홍재순이 서도진과 함께 환자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김지훈의 의아한 눈짓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서도진이 흉부 사진을 걸었다.

홍재순이 팔짱을 낀 채 흉부 사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검사 결과를 뒤적이며 고민하더니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중간 모드로 바꿔.”

“예? 선생님, 지금은 무리입니다.”

“무리라니?”

“자발 호흡이 있지만 아직 숨을 제대로 쉴 정도까지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근력이 너무 약합니다.”

홍재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말에 토를 다는 것도 모자라 이젠 오더까지 안 받아?”

“선생님, 그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 환자 모드를 바꾸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어? 바이탈 안정적이고, 산소 포화도가 99퍼센트 이상이야. 그리고 흉부 사진도 깨끗해. 패혈증 소견 역시…….”

홍재순이 인공호흡기 모드를 바꿀 수 있는 경우를 말하기 시작했다. 김지훈과 서도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오색 치프 홍재순!

공연히 책에 다섯 번씩이나 줄을 긋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아니, 책을 통째로 외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줄줄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잘 들었어? 수술만 잘하면 일반 외과 의사야? 킵한다고 멍하니 앉아 있지만 말고 그 시간에 공부를 해. 아니면 그냥 잠을 자든지.”

대단했다. 어떤 누구도 홍재순만큼 이론에 해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의 생각은 달랐다.

“원칙은 맞습니다만, 이 환자는 호흡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근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가 없습니다. 파이팅조차 일 분에 한두 번일 뿐입니다.”

“그래서 못하겠다는 거야? 잔말 말고 당장 바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홍재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꿔! 치프가 내리는 오더야!”

갑자기 터진 고함에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홍재순이 눈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환자 치료에 관한 문제를 두고 화를 내다니, 김지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 치료는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경과를 따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서로 충분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건 자존심 문제도 아니고, 화를 낼 일도 아니잖아. 이러다 잘 회복되는 환자가 다시 나빠질 수도 있어.’

만일 패혈증에 만성 질환을 앓은 환자 상태가 다시 나빠진다면 결과는 치명적일 것이다. 물러날 수도 없고, 물러나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홍재순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감수해야 했다.

“주말이 지나고 모드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원칙이 아닙니까?”

홍재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지금 오더를 안 받겠다, 이거지.”

“안 받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경과를 보자는 겁니다. 사실 중환자실 환자에 대한 판단은 킵을 한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내린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단순히 오늘 나온 검사 결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합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홍재순에게는 그 말이 킵을 안 했으면 말을 말라는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홍재순이 서도진을 보았다.

“김지훈, 치프인 내가 킵까지 해야 돼? 서도진, 너도 강제 호흡을 유지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환자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김지훈이었다. 더구나 오프까지 반납하고 밤새 킵을 했다. 그것도 2년차가 말이다.

신뢰는 연차가 높다고 해서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도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손이 느리다고 이론까지 무시해? 이제 1년차밖에 안 된 새끼한테도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위아래가 뭔지도 모르더니, 김지훈 이 새끼도 똑같은 놈이었어.’

홍재순이 순간 이성을 잃었다. 수술에 이어 이론적인 문제까지 김지훈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홍재순이 김지훈을 당직실로 불렀다. 서도진마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고함 소리가 문밖까지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지훈의 목소리까지 커졌다. 결국 치프와 2년차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만 것이다.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쌍욕까지 들렸다.

‘어후! 정말 왜 저러지? 김지훈 선생님 말대로 하는 게 맞잖아. 주말을 앞두고 무리하지 말라는 말도 모르나? 설마 주먹질까지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안절부절못하던 서도진이 인상을 쓰며 문을 열려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잔뜩 인상을 쓴 홍재순이 아무 말도 없이 나갔다. 김지훈이 머리를 감싸 쥔 채 한숨만 내뱉고 있었다. 두 눈이 시뻘겠다. 킵을 한 탓인지, 아니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탓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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