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25화 (325/1,329)

제11화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Ⅱ (1)

차가 밀린 탓에 서도진이 밤늦게 도착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도진이 오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호되게 혼났다. 왜 늦었는지 이유는 묻지도 않았다.

“너 뭐 하다 이제 내려와? 이번 주는 나까지 당직인 거 몰라? 2년차나 1년차나. 쯧! 주말이라고 농땡이 부리지 말고 내일 아침까지 환자 확실하게 파악해.”

김지훈에게까지 애먼 불똥이 튀었다. 함께 병동으로 올라가던 서도진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선생님, 홍재순 선생님이 아랫년차들을 말도 안 되는 일로 무지하게 괴롭힌다는데 정말 그런가 봐요.”

솔직하게 말할 일이었다. 그래야 서도진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각오는 해야 할 거다.”

“들은 말이 사실인 모양이네요. 그러면 손도 되게 느리겠네요. 근데 혹시 선생님한테는 더 저러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천광호보다 욕을 더 먹었고, 함께 들어간 수술에서는 고생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난 아랫년차 아니냐? 그런데 꼭 본 것처럼 말한다?”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자 서도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들은 말로는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수록 더 심하게 대한대요. 선생님들 1년차 때 신현수 선생님도 알게 모르게 꽤 고생을 했다는 말이 있어요.”

“현수가? 하긴 그 자식이 성격 이상한 정갑수라고 하더라.”

서도진이 깜짝 놀랐다.

“그 정도예요?”

“아니. 내가 보기엔 그냥 손이 느린 정갑수야. 거기다 치프 아니냐. 그게 배로 힘들게 해. 도진아, 내가 이런 말했다고 괜히 티내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커버할 테니까 넌 절대 나서지 마. 자기 말에 토 달지 말라는 사람이니까 입 꾹 다물고.”

서도진은 상당히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욱하면 참지를 못했다. 잘못하면 3년차 치프와 1년차가 싸우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김지훈으로서는 절대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도진에게 김지훈이 다짐을 받았다.

“내 말 명심해. 학교 다닐 때처럼 선배들에게 덤비면 아무리 니가 잘못한 게 없어도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어찌 됐든 홍재순 선생님은 우리 과 치프고, 문제를 제기해도 내가 해야 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콧등을 찡그리며 대답을 하던 서도진이 피식 웃었다.

“선생님, 혹시 홍재순 선생님이 일이 년차 때 엄청 탔다는 거 알고 계세요?”

“저렇게 손이 느리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 정도가 아니었나 봐요. 선생님들 말로는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대요. 근데 자기가 그렇게 탔으면 후배들에게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잘못한 일로 태우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고 그러더라구요. 오늘도 그렇잖아요. 내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라 버스가 늦은 걸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에요.”

서도진의 하소연에 김지훈이 어깨를 툭 쳤다. 홍재순이 얼마나 탔는지 몰라도 서도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긴 군대에서도 선임에게 많이 당한 놈이 후임을 더 갈구기 마련이긴 했다.

손일석에게 들어야 할 말을 서도진이 하고 있었다. 혹시 더 아는 것이 있는지 물으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서도진이 환자를 몰고 온 모양이었다.

12시쯤 내려가 아침이 될 때까지 응급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밤 동안에 수술이 두 개나 떴다. 김지훈이 어김없이 세컨을 섰고, 처음 홍재순의 손을 본 서도진이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었다.

“선생님, 과장님까지 들어오시는데 세컨을 서세요? 그럼 난 계속 써드를 서야 되는 거예요?”

“정규 수술은 세컨이지만, 낮에 뜨는 응급 수술은 몽땅. 홍재순 선생님 당직 때는 야간에도 그렇게 해야 돼.”

헉! 소리가 터졌다.

“홍재순 선생님 당직 때면 일주일에 최소 3일에, 주말까지 당직이 걸리면 5일이네요?”

“아니, 주중에는 수목 이틀만 고생하면 돼. 왜냐고? 나도 너처럼 주중 오프는 하루다.”

서도진이 할 말을 잃었다.

토요일 밤부터 시작해 일요일까지 정신없이 지나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서도진은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김지훈도 틈만 나면 잠을 청해야 했다. 급기야 자정을 넘어서 결정타까지 맞았다.

고혈압에 당뇨까지 있는 고령의 환자가 급성 담낭염으로 내원한 것이다. 이미 패혈증 징후까지 보였고, 환자 상태가 지극히 불량해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혈압 강하제와 인슐린까지 써 혈압과 당을 조절하고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 시간은 물론 마취 시간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송동화 과장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홍재순 선생님, 이번 수술은 김지훈하고 들어갈 겁니다.”

홍재순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자신의 손을 생각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또다시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더구나 김지훈은 같은 연차도 아닌 2년차였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김지훈과 하시죠. 단, 이번 수술은 제가 안 들어가려고 한 게 아닙니다. 약속은 확실하게 지켜 주셔야 합니다.”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과장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더구나 말투까지 삐딱했다. 존대만 빼면 그냥 후배에게 하는 말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홍재순 선생님, 다른 병원에서는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좋을 일이 없습니다.”

“지금은 뭐 좋은 일이 있나요?”

홍재순이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졌다.

수술이 시작됐다. 환자 상태가 안 좋아 이용철 과장이 직접 나왔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송 과장님, 환자 상태가 상당히 안 좋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생님.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송동화 과장이 빠르게 배를 열었다. 간을 제치자 퉁퉁 부은 담낭이 보였다. 담낭루를 해야 할지, 아니면 담낭 절제술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환자 상태를 고려할 때 원칙적으로는 담낭루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퍼스트가 2년차라고 보기 힘든 김지훈이었다.

‘어차피 한 시간 이내라면 절제를 하는 게 훨씬 나은데.’

순간 고민에 휩싸인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눈가를 잔뜩 좁힌 채 신중한 눈으로 담낭을 보고 있었다.

“지훈아, 뗄까? 시간이 되겠어?”

“이 정도면 절제술을 해서 확실하게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절제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케이스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담낭루를 한다고 더 이득이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김지훈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이미 여러 경우를 상정하고 판단을 했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대단한 놈이네. 자신이 있다는 소리지?’

송동화 과장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 절제하자.”

담낭 절제술이 시작됐다.

송동화 과장은 오직 자신과 김지훈의 손만을 믿었다.

염증으로 조직이 무척 약해져 있었기에 송동화 과장의 손은 신중했고, 김지훈은 정확하게 퍼스트를 섰다.

빠르게 담낭이 간에서 분리됐다. 담낭 동맥을 찾고 묶었다. 총수담관과 연결된 담낭 관을 확실하게 박리한 후 잘랐다.

수술 과정은 간단했지만 실제로는 살얼음판이었다. 조그만 실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수술 시간과 마취 시간이 늘어나는 순간, 환자의 생명은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는 곧 수술 팀의 판단 착오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삐! 삐! 삐! 삐!

모니터 소리만이 울리는 가운데, 수술 팀 전체가 끝까지 고도의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마취과도 초비상이었다. 혈압은 극히 불안정했고, 임시로 검사한 혈당마저 치솟았기 때문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힐끗 시계를 본 이용철 과장이 슬며시 일어났다. 불안한 환자 상태에 신경을 쓰느라 수술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마취과가 자꾸 수술을 기웃거려야 수술 팀만 불안하게 할 뿐이기도 했다.

‘지금쯤에는 배를 닫기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빠르지? 송 과장이 무리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수많은 수술을 본 이용철 과장이었다. 담낭 절제술이 가장 확실한 치료법이긴 했다. 하지만 담낭루보다 시간이 더 걸린 다는 점이 이 환자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패혈증 환자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도 사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내밀던 이용철 과장이 흠칫 놀랐다.

“과장님, 배 닫습니다.”

복막은 이미 봉합한 상태였다. 이용철 과장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급히 환자를 깨우기 시작했다. 도리어 마취과에 문제가 생겼다. 수술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환자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봉합이 끝나고 드레싱까지 마쳤다. 수술은 원하던 시간 내에 완벽하게 끝났다.

그때가 돼서야 환자가 눈을 떴다. 그러나 의식만 돌아왔을 뿐 스스로 호흡을 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예상은 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환자 상태가 더 나빴기 때문이다.

기관 내에 삽관한 튜브를 빼지도 못하고 중환자실로 옮겼다. 수술 후 필요한 검사들이 나갔다. 서도진이 오더를 내는 동안 김지훈이 인공호흡기 앞에 앉아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인공호흡을 하는 방식은 크게 강제 호흡 모드와 자발 호흡 모드로 나뉜다. 자발 호흡이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해도 호흡수가 적거나 폐활량이 너무 부족할 때는 강제 호흡을 시킨다.

반면 자발 호흡 모드는 환자가 스스로 호흡을 하긴 해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에는 호흡 능력이 충분하지 않을 때 시행한다. 여기에 완벽하게 호흡 상태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중간 모드가 또 하나 있다.

김지훈이 환자의 체격과 호흡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강제 호흡 모드로 세팅을 했다. 수시로 비지에이(aBGA:동맥혈 가스 분석)를 내보내 호흡이 적절한지 체크했다.

네 번째 비지에이 결과를 받아 든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소포화도가 98퍼센트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호흡수와 폐활량 등을 적절하게 맞췄다는 말이었다.

오더를 다 내고 드레싱을 한 서도진이 인공호흡기를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강제 호흡 모드로 분당 호흡수 15회, 일 회당 공기량(폐활량)이 3000cc 정도로 세팅하셨네요. 잘 봐 둬야겠네.”

“도진아, 너도 잘 알겠지만 인공호흡기 조절은 교과서보다 경험이 더 중요해. 내가 본 중에 가장 힘든 게 인공호흡기야. 이게 말이야. 이상하게 감이랄까, 뭐 그런 게 필요하거든.”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기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면 대개는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렇지. 항상 말하지만 그래서 원칙을 지켜야 돼. 절대 서두르지 말고 최대한 안전을 추구한다. 숨 못 쉬면 삼 분 내에 사망 아니냐. 불안하면 환자가 힘들어해도 하루 이틀 더 인공호흡기를 유지하는 게 좋아.”

한참 동안 환자 상태를 지켜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도진아, 환자가 파이팅도 못하네. 고혈압에 당뇨에 패혈증까지 겹쳐서 그런 것 같은데, 이걸 어쩌냐.”

서도진이 피식 웃었다.

“오자마자 킵(keep)이네요.”

“신경 많이 써야 될 것 같다.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며칠은 너나 나나 잠 편히 자기는 글렀다.”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벽 3시에 홍재순이 나타난 것이다. 서도진이 낸 오더를 유심히 살피고는 인공호흡기 모드까지 꼼꼼하게 보았다.

“산소포화도는 어때?”

“예. 마지막 검사에서 98퍼센트 나왔습니다.”

서도진의 대답에 홍재순이 힐끗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김지훈, 수술 잘됐어? 뭐 했어?”

“담낭 절제술을 했습니다.”

순간 흠칫 놀란 기색을 보인 홍재순이 눈가를 좁혔다.

“담낭루가 아니고?”

“예. 다행히 한 시간 정도 걸려서 담낭루를 했을 때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니가 퍼스트 섰으니까 1년차한테 다 맡기지 말고 번갈아 가면서 킵해.”

중환자실을 나가는 홍재순이 찬바람을 풀풀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