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24화 (324/1,329)

제10화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Ⅰ (2)

우연치고는 이런 우연이 없었다. 구미 병원에서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젓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치켜떴다.

‘어? 이거 이상한데. 혁원이가 중학교 때면 스승님이 음성에 오셨을 때하고 거의 시기가 맞네. 어라? 그러고 보니 스승님도 남의 일처럼 의료사고를 낸 의사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만일 그게 스승님의 일이었다면.’

우연치고는 너무 딱딱 들어맞았다.

이준영 과장은 12년 전에 음성에 왔다. 음성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가족들을 보지 못했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락을 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의료사고까지 거론하며 자만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를 했다.

어쩌면 의료사고를 낸 당사자가 바로 이준영 과장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일반 외과 의사이면서도 음성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설명이 됐다.

‘혁원이가 스승님의 아들? 그러면 그때 일식집에서 느꼈던 희한한 분위기가 말이 되네. 그럼 구미 병원에 오셨다는 말이 도는 이유가 혁원이 때문인가? 혁원이가 아버지를 엄청 원망하고 있으니까 그걸 풀기 위해서는 일단 얼굴을 봐야겠지.’

추측이 맞는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당장 고경아와 손일석에게 전화를 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연락할 궁리를 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머리를 마구 때렸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 있나. 만일 그게 사실이면 뭐 좋은 일이라고 말을 해. 스승님도 혁원이도 엄청 힘들 텐데,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잖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말 우연의 일치거나 억측이어야 했다.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절대 아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존경하는 스승과 아끼는 후배 사이의 숨겨졌던 사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닐 거야. 내가 혁원이가 스승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너무 해서 그런 걸 거야.’

눈가가 시뻘게진 이혁원이 김지훈을 보았다. 술기운인지, 아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술 한 잔 더 먹고 싶습니다. 사 주실 거죠?”

착잡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사 줘야지. 그런데 혁원아, 가족들에게 왜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의료사고 그게 보통 힘든 일은 아닐 거다. 아무 실수가 없어도 수술한 환자가 죽으면 정말 미칠 것 같거든. 에이! 그만하고 2차 가자. 혁원아, 오늘은 그냥 술 먹고 다 잊어.”

정말 급하게 마신 모양이었다. 아직 12시도 안 됐다. 식당에서 나온 김지훈이 비틀거리는 이혁원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맥주집으로 향했다.

“혁원아, 병원 일도 꿀꿀한데 시원하게 마시자.”

이혁원이 연거푸 잔을 비웠다.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야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고 있는 걸까?

이혁원이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자신의 속을 보였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이혁원이 또 잔을 비웠다.

10년이 넘게 쌓인 원망과 울분을 토해 냈다. 때론 격하게 흥분했고, 때론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로 분노했다. 슬픔과 아픔이 그 속을 헤집고 있었다.

김지훈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스승과 이혁원의 관계가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아버지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틀림없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지? 스승님은 도대체 어떤 사고를 내셨기에 가족하고도 연락을 끊으신 걸까? 혁원이가 보고 싶지도 않으셨나?’

술이 너무 과했다. 김지훈이 완전히 술에 취해 더 먹겠다는 이혁원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혁원이 병원으로 돌아가는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괜찮아요. 아버지 없이도 잘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이혁원의 말속에 숨은 슬픔과 아픔이 너무 크게 다가와 이준영 과장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믿음도 강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이혁원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뿐이었다.

“선생님, 형, 내가 나쁜 놈인가요? 아니죠. 아버지란 사람이 나쁜 사람이죠?”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혁원아, 형이 널 사랑하잖아.”

사랑! 그 말 때문이었을까?

이혁원이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소리가 삐져나왔다.

김지훈이 꺽꺽 울어 대는 이혁원의 어깨를 꽉 안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들썩이던 어깨가 잠잠해졌다.

“혁원아, 다 큰 놈이 울면 어떻게 해? 난 원망할 부모도 없어, 이 자식아.”

김지훈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형,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지랄을 해라, 이 자식아. 빨리 들어가자.”

얼추 2시가 넘었다. 술도 과했다. 이대로는 김지훈도 문제였지만 이혁원 역시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비틀거리는 이혁원을 잡고는 응급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순간 구세주가 보였다. 김지훈의 손짓에 천광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에휴! 홍재순 선생님 때문에 정말 괴로우신가 보네. 그래도 그렇지,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대. 이혁원, 이 자식은 또 뭐야?’

“광호야, 미안하다. 10퍼센트가 필요해. 난 오늘 혁원이랑 당직실에서 자야겠다. 혁원이 것도 부탁한다.”

입맛을 다신 천광호가 10퍼센트 포도당을 들고 왔다. 김지훈과 이혁원이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

어느새 금요일 아침이 밝았다. 10퍼센트 포도당의 위력은 대단했다. 김지훈이 활기차게 아침 일과를 마쳤다. 술 냄새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지만 거의 티가 안 날 정도였다. 다만 10퍼센트 포도당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워낙 술을 많이 마신 이혁원은 아직도 몽롱한 상태였다.

홍재순이 수술 방으로 향하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2년차라는 게 오프를 줬더니 술이나 처먹고 다니고. 에이! PK 저 자식은 또 뭐야? 이 새끼들을 그냥.”

“죄송합니다.”

어쨌든 과음을 한 것은 잘못이었다. 고개를 푹 숙여 홍재순의 화를 피한 김지훈이 이혁원에게 쉬라고 했다. PK라고 일과를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 남은 김지훈이 병동 일을 마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들은 얘기를 다시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사실이라면 가슴속에 묻을 일이었다. 어쩌면 술 때문에 별개의 일이 뒤엉켰을지도 몰랐다. 잘못된 추측이기만을 바랐다.

‘잊자! 내가 틀린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지. 난 애초부터 아예 몰랐던 일이야.’

가슴속에 담긴 무거운 생각만 아니면 전과 동일한 일상이었다. 오늘도 홍재순에게 말도 안 되는 일로 탔다. 주간 응급 수술이 뜨자 당연한 것처럼 세컨을 서야 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눈이 저절로 홍재순의 손으로 향했다. 정말 느린 것인지, 두려움에 주저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말 혼란스럽네. 에이! 근데 내가 왜 이런 일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거야? 어차피 변할 것도 없잖아.’

이혁원에게도 전과 다름없이 대했다. 다시 꺼낼 이야기도 아니었고, 이혁원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태도가 변하긴 했다.

‘혁원이 저 자식이 전번 수술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인 것 같네. 1년차들을 생각해 보면 저랬던 놈들이 대개 우리 과를 지원하던데. 그러면 스승님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하지? 에이! 이런 생각하면 안 돼.’

아니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도리어 사실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승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김지훈의 마음속에 이준영 과장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은 간다.

토요일 오후, 이혁원과 천광호가 구미 병원을 떠났다.

전공의들 교대야 항상 있는 일이기에 천광호는 당연한 것처럼 보냈다. 하지만 이혁원은 달랐다. 내년에 인턴으로 들어와도 근무 지역이 다르면 보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가슴 아픈 사연까지 알아 버렸다.

“잘 가라, 혁원아. 내년에 꼭 보자.”

꾸벅 인사를 한 이혁원이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죄송한데 그저께 술 먹으면서 제가 한 말 아무한테도 말씀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술 먹으면서 무슨 말을 했는데? 그냥 우리 병원 얘기밖에 더 했어? 너 뭐 실습 중에 잘못한 거 있구나. 자식!”

마음 편하게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지훈이 시치미를 뚝 떼자 이혁원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넌 내 말만 명심해. 우리 과 안 하면 죽는다.”

마침 응급실에 환자가 있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응급실로 향했다. 특별한 환자는 아니었다. 가볍게 환자를 보고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았다. 바람도 쐬고 고경아에게 전화를 할 겸 밖으로 나왔다.

그때 가방을 메고 병원 밖으로 나가는 이혁원이 보였다.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혁원의 어머니가 확실했다.

‘인사를 해야 되나? 아니지. 인사를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는데?’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무심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머니와 만난 이혁원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척 격앙된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엄청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저 자식 지금 어머니를 보자마자 성질을 내는 거야?’

김지훈이 고개를 길게 빼고는 이혁원의 뒤를 쫓았다.

아주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보였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이준영 과장의 차가 분명했다. 그 앞에서 이혁원이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차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멀리서 보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스승, 이준영 과장이었다.

김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제야 스승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졌던 어두운 그림자가 무엇 때문인지 확실히 알았다.

이혁원이 매몰차게 등을 돌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입가를 가린 채 이혁원의 팔을 잡았다. 이준영 과장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켰다.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억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스승과 어머니, 그리고 이혁원은 가족이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서서 아버지를 봐, 인마. 최소한 왜 떠났는지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분명 너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스승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셔.’

일 분이 한 시간처럼 흘렀다. 커피가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무는 순간 이혁원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이준영 과장의 차가 떠났다. 가족이 다시 모이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준영 과장은 자신의 실수로 어머니를 잃었다. 그 어머니는 다름 아닌 이혁원을 아들보다 더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죽음을 안 이혁원이 받은 충격은 몇 달이 지나도 웃음을 찾지 못할 정도로 컸다.

할머니를 죽인 아버지.

어린 나이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몰랐다. 또 다른 충격을 줄 수가 없어 차마 이혁원의 어머니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 세월이 어느새 10년이 넘은 것이다. 이제는 그 사실을 이혁원도 알아야 할 때였다.

과연 이혁원은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심각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은 애써 웃었다.

‘잘될 거야. 스승님도 혁원이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잖아. 그렇지 않았다면 스승님은 구미 병원에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혁원이는 괴로워하지도 않았겠지.’

구미에 있는 내내 궁금할 것이다. 이준영 과장은 사적인 말을 할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승의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무표정해도, 김지훈은 스승의 목소리와 얼굴만 보아도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이 때문이었다.

고경아와 통화를 했다. 그간 짬짬이 시간을 내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했다. 일상적인 대화만 오고 갔다. 이준영 과장에 관한 일은 물론 홍재순에 대한 일까지 함구했다.

‘스승님과 혁원이 문제는 분명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홍재순 선생님? 에휴! 뭐 좋은 일이라고 떠벌리나.’

이제는 일에 집중할 때였다. 그런데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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