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어디까지 참아야 하나? (2)
마치 웃기지도 말라는 것 같았다.
“전문의 자격증이 필요해서요. 우리나라가 어디 일반의를 의사 취급이나 하나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일반 외과를 했어요? 그럼 편한 과를 해야죠. 아니, 최소한 목숨과는 거리가 먼 과를 택했어야죠. 가뜩이나 손이 모자란 과에 왜 들어옵니까?”
“제 아버지가 일반 외과 의삽니다. 우리 집안이 모두 그래요. 그러니까 나도 일반 외과 의사가 될 수밖에 없어요. 죄송하지만, 과장님은 그냥 금 과장님 말씀대로만 해 주십시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홍재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든 송동화 과장이 가슴을 진정시켰다. 학교 다닐 때 쌓은 정 때문인지 자꾸 미련이 남았다.
“홍재순 선생님, 내가 기억하기로는 1년차 초반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왜 치프까지 되어서 전문의만 따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홍재순이 고개를 저었다.
“절 잘못 보신 거죠. 원래 그랬습니다. 새삼스럽게 신경을 너무 많이 쓰시네요.”
송동화 과장의 말문이 턱 막혔다. 홍재순의 말대로 원래부터 그랬다면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답답하기만 한 가슴속에서 온갖 말이 맴돌았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과장인 자신까지 비웃는 것 같은 눈초리,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일반 외과 의사의 자부심.
열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던 송동화 과장이 거칠고 굵은 콧소리를 냈다.
“좋습니다. 금 과장님 말씀대로 수술 건수 이십 개 정도는 채워 드리죠. 단, 지금처럼 일한다면 아뻬 하나도 못 줍니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이세요.”
“자격이요? 과장님, 저 치픕니다.”
“치프요? 연차가 올라가면 당연히 치프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무 일정까지 바꿔 가면서 구미로 보낸 이유를 생각하세요.”
“과장님, 내가 원해서 온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왜 보냈겠어요? 치프는 치프다워야 합니다. 열정도,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잖아요. 2년차인 김지훈이 도리어 치프 같다는 거 알아요?”
홍재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가 2년차보다 못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회진도 제대로 안 돌고, 응급 수술이라고 수술도 들어오지 않는 치프는 치프로서 대접할 수가 없어요. 오늘 김지훈이 수술하는 거 봤죠? 똑같은 수술을 준다면 더 잘할 수 있겠어요?”
송동화 과장이 홍재순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흥분한 탓도 있었지만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 병원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심만 아니었으면 홍재순에게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전문의 시험을 볼 자격조차 따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
홍재순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송동화, 김지훈이 더 치프 같다고? 너나 금 과장이나 똑같아. 니들 눈에는 잘난 놈들만 보이지. 웃긴 놈들. 이제 와 뭐가 어째? 열정? 수술? 지랄을 하고 있네. 난 전문의만 되면 끝이야. 다신 네놈들 얼굴을 볼 이유도 없어.’
송동화 과장이 금경태 과장의 뜻과 다른 생각을 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미로 온 이유가 무엇인지 홍재순도 잘 알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는 치프라고 해서 봐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은 학교 후배인 송동화 과장이 유일한 줄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전문의는 반드시 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무너져 버릴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치프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하세요. 하는 걸 보면서 수술을 주든지 말든지 할 겁니다.”
홍재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금경태 과장님의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홍재순이 이를 악물고는 병동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송동화 과장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선배,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송동화 과장의 표정이 착잡하기만 했다.
***
홍재순이 갑자기 변했다. 회진을 돌며 모든 환자를 다 보았고, 오더도 직접 냈다. 느린 것은 여전해 꼬박 2시간이 넘도록 오더를 냈지만 깜짝 놀랄 일이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딱 삼 일 천하였네. 근데 왜 갑자기 이러시지?’
치프는 오더를 내고, 1년차는 받아 적기만 하기 때문에 2년차인 김지훈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간간이 천광호의 입이 막히면 그때 몇 마디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오더까지 왜 이렇게 고민을 하시나.’
답답한 마음에 무심코 탁자를 톡톡 치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날벼락이었다.
“김지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지루해?”
홍재순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욕까지 해 댔다. 다른 과 전공의였으면 당장 되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1년 동안은 봐야 할 치프다. 이유가 뭐가 됐든, 이럴 때는 일단 자세를 낮추는 것이 좋았다.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란 새끼가 치프가 오더를 내는데 딴짓을 해? 내가 우습게 보여? 너 죽어 볼래?”
“주의하겠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새끼가 수술 하나 받더니 보이는 게 없나. 이씨!”
잘하면 주먹까지 날아들 태세였다. 김지훈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동안 김지훈을 노려보던 홍재순이 남은 오더를 냈다. 그 탓에 밤 10시가 넘어서야 일과가 모두 끝났다. 오늘도 저녁 먹자는 소리는 없었다.
김지훈이 턱을 괴며 눈가를 비볐다.
‘뭐야? 갑자기 회진에 오더까지 내더니 왜 저래. 후우! 성질 나 미치겠네. 씨펄! 이러다 내가 먼저 사고치는 거 아냐?’
종잡을 수가 없었다. 별일 아닌 일에도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해 더욱 답답했다.
이건 아랫년차 잘되라고 태우는 게 아니라 갈구는 것에 불과했다. 아니면 미워하든지.
선배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기는 악어와 정갑수 이래로 처음이었다. 푹푹 한숨을 내쉬던 김지훈이 물끄러미 천광호를 보다 말고 어깨를 흠칫거렸다.
“광호야, 너 오프잖아. 빨리 가.”
“예? 지금 10시가 넘었어요, 선생님. 그리고 아까 오더 내면서 오늘까지 해야 할 일도 많이 나왔구요.”
“그건 내가 해 줄 테니까 오프나 가. 저녁이라도 맛있는 거 사 먹어. 아니면 내일 일에 지장 없게 술 한잔하든지. 혁원이 너도 빨리 가.”
주저하던 천광호가 김지훈이 눈을 부라리고서야 오프를 갔다. 혼자 남은 김지훈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욕까지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만일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선배고 뭐고 멱살잡이를 할지도 몰랐다.
홍재순이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파악부터 했다.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날 밤, 빤뻬리 하나가 떴다.
아무리 홍재순이 일을 안 한다고 해도 노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일이 년차가 오프일 때는 홍재순이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야간이라 내려올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홍재순이 떡하니 응급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수술까지 들어갈 태세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하루도 안 돼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 놀랄 노 자였다.
수술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낮에도 안 들어갔던 사람이 야간 수술을 들어간다고? 그럼 앞으로 회진에, 오더에, 당직까지 전부 다 챙기겠다는 거네. 이래야 치프답기는 하지만 정말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야.’
어쨌든 홍재순이 지금이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그때 홍재순이 스케줄을 작성하는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김지훈, 수술 들어와.”
“저요? 선생님, 제가 들어가면 응급실은 누가 커버합니까?”
“1년차는 뭐 하고?”
김지훈이 순간 당황했다.
“광호는 오늘 오프 갔습니다.”
“오프를 갔어? 새끼들, 챙길 건 꼬박꼬박 챙기고 앉았네. 중간에 환자 있으면 그때 나가서 봐.”
누가 오프인지도 모르는 홍재순이었다. 반대로 1년차가 당직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김지훈을 수술에 들어오게 했다면 그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구미도 인력이 모자라 최근에 화이트 가운을 채용했다. 따라서 송동화 과장과 홍재순, 그리고 인턴까지 3명이 들어가면 됐다. 그런데도 들어오라고 한 것은 김지훈에게 세컨을 서라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갑갑하고 답답함을 넘어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로 덤비는 것 역시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나 치프의 권한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답답하네.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결국 세컨을 서야 했다. 말도 안 했는데 이혁원이 인턴 대신 졸래졸래 수술 방으로 따라 들어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자식! 넌 내가 확실하게 찜했다. 혁원아, 무조건 일반 외과 하는 거야. 안 하기만 해 봐. 죽는다.’
수술실에 들어온 송동화 과장이 묘한 눈빛으로 홍재순을 보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치프가 들어왔는데 넌 왜 들어왔어? 그리고 오늘 광호가 오프잖아. 응급실은 어떻게 하고?”
누가 오프인지 과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2년차가 응급실을 놔두고 세컨을 설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말을 했다가는 또 꼬투리를 잡을 것이다.
김지훈이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수술이 보고 싶어서 들어왔습니다. 응급실에 환자 오면 인턴 선생에게 먼저 보라고 했고요. 급하면 그때 화이트와 자리를 교대하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송동화 과장이 미심쩍은 눈으로 김지훈과 홍재순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수술을 좋아해도 인턴에게 응급실까지 맡기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홍재순 때문에 통상적인 경우보다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김지훈이 그런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누구 생각인지 빤했다. 마무리를 할 때 앞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 상당히 힘들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편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아랫년차들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병원에서도 아랫년차들을 꽤 괴롭혔다고 들었는데 여기서도 이래야 하나? 홍재순 선생, 정말 그렇게 일이 하기 싫은 거요? 후우! 그래도 당직이라고 응급 수술에 들어왔으니까 이번은 넘어갑니다.’
송동화 과장이 집도의 자리에 서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수술실에서 이렇게까지 힘든 적은 없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이왕 들어간 수술이었다. 세컨이 아니라 써드를 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고는 필사적으로 수술에 집중했다. 오늘따라 참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보던 대로였다. 송동화 과장은 앞서 나가고, 홍재순은 천천히 뒤를 따랐다. 한마디로 맥이 끊기고 있었다.
이는 매우 큰 문제였다. 퍼스트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집도의가 수술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유발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수술은 진행됐다.
리트랙터를 당기며 한참 소장을 봉합하는 과정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재순의 손이 이상했다.
‘느린 게 아니라 자꾸 머뭇거리는 것 같네. 설마 수술하는 게 두려운 건가? 일이 년차 때는 수술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일이 없잖아.’
느린 것과 머뭇거리는 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미는 확연히 달랐다. 만일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홍재순의 손이 원래는 이 정도로 느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의 시선이 자꾸 홍재순의 손에 쏠렸다. 묘한 곳에 관심을 뺏긴 탓인지 시간은 빨리 갔다. 마무리만 남았다.
홍재순과 마주 선 김지훈이 보조를 하며 손에만 집중했다.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단순 봉합인데도 불구하고 머뭇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하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환자를 회복실로 옮긴 후 오더를 내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일 생각이 맞는다면 홍재순이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만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