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21화 (321/1,329)

제9화 어디까지 참아야 하나? (1)

메스를 든 김지훈이 과감하게 배를 열었다.

통상 3~4센티미터면 충분했지만, 무려 10센티미터 가까이 절개했다. 리트랙터로 강하게 당기면 조직이 늘어나는 것을 감안할 때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명백한 오산이었다.

지방층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두꺼웠다. 피부와 지방층을 절개하고 근육이 보이기도 전에 수술 시야가 동굴처럼 변했다. 물렁물렁하고 연약한 지방 조직이 리트랙터 사이를 비집고 나와 시야를 더 가렸다.

수술을 진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해결 방법이 있기 마련이었다. 원칙을 잊지 않으면 해결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김지훈이 간호사를 보았다.

“리트랙터 제일 큰 걸로 네 개 가져오세요.”

통상 아뻬를 할 때 쓰는 작은 리트랙터 2개가 치워졌다. 그 자리를 큰 수술을 할 때나 쓰는 가장 큰 리트랙터가 차지했다. 그것도 양쪽이 아닌 상하좌우, 사방에서 당기고 나서야 시야가 확보됐다.

근육을 열었다. 시야가 슬슬 좁아졌다. 아직 복막도 못 열었는데 수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와 깊은 동굴로 변했다. 가장 큰 리트랙터 4개로도 배를 충분히 벌릴 수가 없었다.

송동화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수술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배를 더 확실하게 열어야 한다. 반면, 이 상태 그대로 진행할 수도 있었다. 단 확고한 자신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했다.

김지훈의 선택을 기다렸다.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훅 하고 숨을 내뱉었다.

‘웬만큼 더 열지 않고서는 시야 확보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 만일 터졌다고 해도 손가락과 기구만 들어갈 수 있으면 제거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자. 더구나 퍼스트가 과장님인데 고민할 이유가 없어.’

스스로의 능력을 냉철히 파악하고 자신과 퍼스트를 믿었다. 간호사에게 손을 내민 김지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포셉(forcep:수술용 집게) 주세요.”

메스가 아닌 포셉을 달라고 한 것은 복막을 열겠다는 말이었다. 송동화 과장은 물론 천광호도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복부를 더 절개할 줄 알았던 것이다.

순간 입을 벙긋거리던 송동화 과장이 말없이 포셉을 받으며 복막을 잡았다.

집도의는 김지훈이었다. 명백한 오판이나 실수가 우려되지 않는 한 맡겨야 했다. 그것이 수술을 준 외과 의사의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송동화 과장이 자신이 수술을 할 때보다 더욱 바짝 긴장을 했다.

복막을 잡은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을 보았다.

“선생님, 석션 준비해 주십시오.”

지나치게 불안해한 탓이었을까? 아뻬가 터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만일 염증으로 가득한 체액이 복막 밖으로 새어 나온다면 절개 창은 백이면 백 감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도리어 내가 당황하고 있었네. 이 정도 침착하다면 최소한 실수는 안 하겠지. 수술을 준 이상 일단 확실하게 믿고 가자.’

얼굴이 가볍게 상기된 송동화 과장이 복막에 석션기를 댔다. 김지훈이 복막을 여는 순간 고약하고 역겨운 냄새가 확 퍼졌다.

찌이이익!

이미 끈적끈적해진 고름이 묘한 소리를 내며 석션기로 빨려 들어갔다. 김지훈이 눈짓을 하며 석션기를 받아 들고는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찌이이익! 찌이이익!

생각보다 터진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조직 사이사이에 염증성 삼출액이 상당히 많이 고여 있었다. 한동안 석션을 한 김지훈이 마취과에 부탁해 무영등의 초점을 맞췄다.

‘이거 떡이 됐겠는데. 간만에 손가락을 쓰네.’

예상대로였다. 주변 조직과 터진 아뻬가 한 덩어리처럼 붙어 있었다. 이미 수술 전에 생각했던 경우 중 하나였다.

김지훈이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배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송동화 과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을 넣은 채 눈가를 좁히는 모습이, 터진 아뻬를 주변 조직과 박리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두 번의 경험으로는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야? 아뻬가 터졌다고 해도 이렇게 떡이 된 케이스는 상당히 드문데, 마치 많이 해 본 것 같네. 이 자식, 자신감만이 아니라 판단도 무척 빠르게 하네.’

잠깐 고민을 하는 사이, 김지훈이 다시 석션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터진 아뻬와 주변 조직이 분리됐고, 그 사이에 숨었던 고름을 제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 김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동맥 잡겠습니다.”

송동화 과장이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퍼스트를 서는 것을 보며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손이 보통 빠른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판단해도 이 정도면 4년차가 돼도 보이기 힘든 속도였다.

따가각! 따가각!

김지훈이 손가락과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만으로 동맥을 잡았다. 염증이 심해 조금만 힘이 과해도 찢어질 정도로 조직이 흐물흐물했다.

송동화 과장이 상당히 신중하게 타이를 했다. 리트랙터를 직접 당겨 동맥이 타이 된 부분을 확인한 김지훈이 이번에도 감각만으로 아뻬를 잡았다.

따가각! 따가각!

거의 썩은 것처럼 심하게 변색된 아뻬가 제거됐다. 맹장의 염증도 너무 심해 아뻬를 자르고 남은 부분이 너덜거렸다. 이대로 놔두면 자칫 괴사가 진행돼 맹장에 구멍이 날 수도 있었다. 보강이 필요했다.

신중한 표정으로 맹장을 살피던 김지훈이 가장 큰 니들 홀더를 잡았다. 롱포셉을 이용해 맹장을 적절하게 누르며 아뻬가 제거된 주변 부위를 실로 떴다.

송동화 과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수술이든 가급적 가까운 거리에서 수술 부위를 다루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손쉬웠다. 수술 기구가 길고 클수록 손에 전해지는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수술 시야가 나쁜 상황에서도 가장 긴 니들 홀더를 아주 능숙하게 사용했다.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손재주가 보통이 아니네. 어떻게 벌써 수술 기구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놀랄 사이도 없이 맹장 조직 봉합을 끝냈다. 확실하게 보강됐는지 신중하게 확인한 김지훈이 배 속을 세척했다. 이런 경우 아무 생각 없이 세척을 하면 도리어 배 속 전체로 염증을 퍼트릴 수 있었다. 김지훈이 스포이트를 이용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을 씻어 냈다.

다시 한 번 수술 부위를 확인한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을 보았다.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 모두 끝났다. 수술을 계속 진행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배 속에 드레인을 3개나 넣었다. 염증이 워낙 심한 탓이었고, 송동화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중요 과정이 모두 끝나고 이제 배를 닫는 과정만 남았다.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전공의에게 수술을 주면 퍼스트를 섰다고 해도 스태프들은 여기까지만 참여했다. 일종의 관례였지만 굳이 더 이상 관여할 이유도 없었고, 특히 1년차들의 경험을 위해서라도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케이스가 워낙 특별해 끝까지 퍼스트를 서려던 송동화 과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뛰어난 김지훈의 실력에 아직도 정신이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여기까지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걸린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속도였다. 자신이 해도 이 시간 내에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렇게만 가면 송재덕 과장님도 따라잡겠네.’

그뿐이 아니었다. 손을 놀리는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장갑을 벗던 송동화 과장이 창문 너머로 힐끗 비친 그림자에 홍재순을 떠올렸다. 자금까지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송동화 과장의 의도가 통했을까?

김지훈이 천광호와 함께 배를 닫기 시작했다. 꼼꼼하고 세심한 손길로 감염을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다 했다. 두꺼운 지방층에는 드레인까지 꼽았다.

송동화 과장이 피부 봉합을 시작하기 직전에 수술실을 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지방층이 두껍고 감염의 우려가 큰 상처는 조밀하게 봉합해서는 안 된다. 촘촘하게 봉합할수록 지방층에 고이는 체액이 빠져나오지 못해 염증이 생길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열 바늘 이상을 봉합해야 했다.

김지훈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니들 홀더를 천광호에게 넘겼다. 의외이기도 하고 우스울 수도 있지만, 1년차들이 수술 부위를 봉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팔다리를 봉합하는 것과 배를 봉합하는 것에는 미묘한 감각의 차이가 있었다.

“광호야, 시작해.”

“감사합니다, 선생님.”

꾸벅 인사를 한 천광호가 열심히 봉합을 했다. 마지막 한 바늘이 남았을 때 김지훈이 천광호의 손을 막았다.

“광호야, 마지막 한 바늘은 미래의 우리 과 꿈나무에게 주자. 어때?”

천광호가 이혁원을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

“예, 선생님. 이혁원,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니들 홀더(봉합용 기구)를 받아 든 이혁원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삼겹살에 대고 백날 해 봐야 사람의 몸에 딱 한 땀 뜨는 것만 못했다. 기분과 느낌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꽉 다물고 눈에 힘을 준 이혁원이 신중하게 바늘을 찔렀다. 한 바늘 꿰매는 데 참 오래도 걸렸지만 학생치고는 제법이었다.

이혁원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 모습에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인턴이었으면 맞아 죽었겠지만 아직 학생이니까 봐준다. 그래도 삼겹살이 아깝지만은 않네.”

처음엔 다들 똑같기 마련이었다. 이런 과정을 하나둘 거치면서 의사가 되는 것이다.

수요일 정규 일과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오후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그런데 송동화 과장이 눈가만 찌푸린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금경태 과장과 통화를 하며 들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홍재순한테 큰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송 과장도 내가 정갑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들었을 거 아냐? 그러니까 전문의 시험만 칠 수 있게 하면 돼. 최소 기준이 사십 개니까 수술 건수 이삼십 개 사이만 채워.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채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홍재순에게는 기대할 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성향을 생각할 때는 무척 의외였다.

도대체 그 대가로 금경태 과장이 얻게 될 이득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송동화 과장이 홍재순을 찾았다.

일반 외과 의사라는 자부심이 있는 한 금경태 과장의 말대로만 할 수는 없었다. 밉든 곱든 홍재순은 일반 외과 전공의였고, 최대한의 능력을 만들어 주는 것이 과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후, 홍재순이 들어왔다.

“홍재순 선생님, 금 과장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수술 건수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

이미 어떤 내용인지 환히 알고 있는 것처럼 홍재순이 바로 대답을 했다.

“금 과장님 말씀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수술 개수만 채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그렇게 해서 전문의가 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최소한 기본적인 수술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잖아요?”

홍재순이 눈가를 찌푸렸다.

“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제가 말한 게 있는데 잊으신 모양입니다. 제 아버님이 치질 전문 병원을 하세요. 서울시 의사회 회장도 하신 분이고요. 전 그냥 치질 수술이나 하면서 아버님 병원에 근무하면 됩니다.”

송동화 과장이 콧등을 찡그렸다.

금경태 과장이 신경을 쓰는 이유가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시 의사회 회장을 역임했다면 의사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금경태 과장의 관심은 홍재순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힘에 있었던 것이다.

홍재순의 말속에서도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마음 편하게 가고자 하는 유혹이 생겼지만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치질 수술은 다른 문제가 안 생기나요?”

“전문 병원을 하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나 말고도 그런 문제를 처리할 의사는 많습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일반 외과 의사들이 환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그럼 왜 일반 외과를 했어요? 전문의가 아니어도 수술은 할 수 있잖아요. 나이도 많은데 쓸데없이 사 년이란 시간을 도대체 왜 허비하는 겁니까?”

홍재순이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잔뜩 인상을 쓰다 말고 무슨 생각인지 피식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