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20화 (320/1,329)

제8화 득인지? 실인지? (2)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오늘도 어김없이 밤중에 아뻬가 하나 또 떴다. 응급실까지 바쁜 탓에 아침부터 정신없이 회진 준비를 했다. 정규 수술이 시작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일은 정규 수술이 없어 스케줄을 챙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도 병동 일은 오롯이 김지훈의 몫이었다. 치질 수술만 3개라고 방심할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또 점심시간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속았어. 치프처럼 일하는 게 아니라 이건 뭐 인턴 일까지 해야 되다니, 이게 말이 돼? 그냥 남들 하는 만큼만 해 주면 이럴 일도 없잖아. 꾸물거리는 시간만 줄여도 되겠다. 아니면 누구 하나라도 먼저 내보내든지. 할 일도 없는데 왜 붙잡고 있는 거야? 책에 줄만 열심히 그으면 다야?’

온갖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은근히 열이 받은 김지훈이 식욕까지 잃었다. 이참에 아예 굶으라는지 응급실에서 아뻬가 의심되는 환자가 있다는 노티까지 받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신 나서 달려갔을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아! 정말 아뻬 밭이구나. 그나저나 이제 얼굴 본 지 나흘짼데, 벌써 이러면 세 달을 어떻게 버티지?’

“혁원아, 밥 먹고 응급실로 와.”

“선생님은 안 드세요?”

김지훈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혁원아, 환자가 있잖아. 아무리 아뻬라고 해도 빨리 준비해서 제때 하지 않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너도 알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밥부터 먹겠니.”

이 말은 통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함께 1층으로 내려간 이혁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꿋꿋하게 지하로 사라졌다. 식욕을 자극하는 매콤한 음식 냄새가 솔솔 퍼져 나오고 있었다.

‘치사한 자식.’

쩝쩝 입맛을 다시며 응급실에 들어간 김지훈이 말을 잃었다. 아뻬는 확실했다. 그런데 겁이 나다니,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응급실로 온 이혁원도 입을 쩍 벌렸다.

아뻬 환자를 노티하기 위해 수술 방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혀를 찼다. 예상대로 이제야 마지막 환자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55세 된 여자 환자로 사흘 전부터 시작된 급성 복통과 구역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복부 소견상…….”

2년차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들 간략하게 노티를 했다. 그런데 김지훈은 여전히 원칙대로 정확하게 보고를 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던 송동화 과장이 힐끗 홍재순을 보았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치프 때만큼 중요한 시기가 없었다. 더구나 40건 이상의 집도 경험이 있어야만 전문의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따라서 각 병원마다 일정 수 이상의 수술을 반드시 주어야 했다. 그러나 홍재순이 지금과 같은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수술을 줄 수 없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수술을 하면 사고 나기 십상이야. 하겠다는 의욕 정도는 보여야 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그나마 치질 수술에는 열의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홍재순의 태도를 볼 때 조금은 희한한 일이었지만, 치질 수술은 일반 외과 영역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전문적으로 항문과 관련된 수술만 하는 의사나 병원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전문의가 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입맛을 다시던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을 보다 말고 눈가를 좁혔다. 어쩌면 홍재순에게는 자극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순환 근무를 하는 탓에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4년차 때까지만 해도 홍재순이 이 정도라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최소한 1년차 전반기까지는 눈에 띄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변한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김지훈이 수술을 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느끼는 게 있을지도 몰라.’

학교 선배였지만 전공의 후배인 홍재순에게 마지막으로 거는 한 가닥 기대였다. 이대로 가 수술 집도 수를 채우지 못하면 홍재순은 전문의 시험 자격조차 얻지 못할 수 있었다. 무엇인가 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과장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단 전문의가 되고 나면 홍재순이 수술을 할지, 말지는 저절로 결정될 것이다. 의료사고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안다면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칼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 외과 전문의라고 해서 가정의처럼 개업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눈빛을 굳힌 송동화 과장이 뜻밖의 오더를 내렸다.

“한 시간 후에 환자 올려. 전처럼 미리 다 준비하고 수술 시작하고 있어.”

응? 귀가 번쩍 뜨일 소리였다.

구미 온 지 첫 주부터 수술을 하게 생겼다.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붕 떴다.

재빨리 스케줄을 내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 말고 눈가를 찌푸렸다.

‘이 환자는 정말 만만치 않은데 스승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시원하게 여셨을까, 아니면 상처 감염을 우려해 최대한 적게 여셨을까? 게다가 터졌을 가능성도 높잖아. 송동화 선생님께 환자 상황을 더 자세히 말씀드렸어야 했나?’

이혁원도 본 것은 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저런 환자는 수술하기 힘들지 않나요?”

“힘들지. 그래서 수술 전에 여러 경우 수를 생각하고, 어떻게 할지 미리 결정을 하는 게 좋아.”

난감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지금도 기회였다.

“혁원아,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굉장히 유용한 방법이거든. 그걸 누가 알려 줬는지 알아? 진짜 무지하게 타면서 배웠다.”

“어느 선생님인데요?”

“누구겠니. 나의 영원한 사부 이준영 선생님이시지. 정말 대단한 분이셔. 지금은 서울 병원 응급실에 계시지만 원래는 음성에 계셨어. 그렇게 실력이 좋으신데 왜 내려가셨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세상 일이 참 묘해. 하여튼 그 덕분에 굉장히 많이 배웠다.”

음성에서 보냈던 시간이 떠오른 김지훈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추억처럼 변한 기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마등처럼 스치는 옛일에 빠져들었다. 이준영 과장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 탓에 눈가를 좁힌 채 이를 악무는 이혁원을 보지 못했다. 여전히 김지훈의 눈길은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혁원아, 내일 저녁에 술 한잔하자.”

“술이요? 당직 안 서세요?”

“오늘 광호 오프 보내고, 내가 내일 갈 생각이야. 이번 주도 1년차 교대라 주말까지 당직인데, 이쯤에서 한잔해 줘야지. 근데 혼자 먹을 수는 없잖아. 너도 우리 과를 도는 동안에는 식구니까 같이 먹자.”

이혁원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김지훈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식구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정겹게 들린 것이다. 의도를 가진 말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말이기에 가슴에 더 와 닿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환자가 올라왔다는 말에 김지훈이 서둘러 수술실로 향했다.

이혁원과 함께 수술 준비를 했다. 눈썰미가 꽤 있는지 어렵지 않게 쫓아왔다.

“혁원이 너 외과에 소질이 있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외과 해라. 꼭 우리 과 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하면 더 좋고. 단, 우리 과 하면 내가 너 확실하게 태워 줄게.”

“태우신다고요?”

“어? 내가 그랬어? 태우긴 뭘 태워. 가만있어 봐. 니가 1년차면… 내가 4년차 치프네. 아유! 귀여운 놈.”

김지훈이 얼렁뚱땅 말을 돌렸다.

수술 준비가 다 끝났을 때 천광호와 함께 들어온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을 보다 말고 흠칫 놀랐다.

환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살집이 풍성해도 너무 풍성한 중년 여자 환자였다.

과도한 복부 지방에 배가 두 겹으로 접힐 정도였다. 수술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경우보다 3배 이상은 더 길게 절개를 해야 하는 케이스였다.

“이 환자 왜 이렇게 뚱뚱해?”

“키가 백오십 정돈데, 구십오 킬로가 넘는답니다.”

송동화 과장이 입맛을 다셨다.

아뻬 수술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많은 원인은 아뻬가 터졌거나 위치가 안 좋을 때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경우가 바로 환자가 지나치게 뚱뚱할 때였다.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 데다 기구를 조작하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홍재순 선생이 자극을 좀 받으라고 주려고 했더니, 케이스가 너무하네. 이거 2년차가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본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렸다.

‘에이! 어쩐지.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씀드릴걸. 케이스도 안 좋은데 홍재순 선생님보다 수술을 먼저 줄 리가 없지. 욕심이었네.’

그래도 기대를 버리진 않았지만 불리하기만 한 결정타가 하나 더 있었다.

추측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 환자의 경우에는 반드시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김지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배가 이렇게 두꺼운데도 압통과 반사통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터졌을 가능성이 꽤 커 보입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케이스가 걸린 것이다.

‘쯧! 제대로 걸렸네. 터지지 않았다고 해도 힘들 판인데, 이걸 어떻게 하지? 다음에 주는 게 낫겠다.’

그때 마지막 환자의 마무리를 끝낸 홍재순이 수술실 문에 난 창문 너머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늘어진 눈으로 김지훈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2년차가 먼저 수술을 받는다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네.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기대할 구석이 남아 있다는 소릴까?’

송동화 과장이 다시 갈등에 휩싸였다.

학교부터 전공의 시절까지 이어진 홍재순과의 미묘한 관계와 구미에서의 트레이닝을 책임져야 하는 과장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상태로 간다면 홍재순은 일반 외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에게 수술을 준다면 정말 자극이 될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금경태 과장은 김지훈만이 아니라 홍재순에게도 신경을 쓰라고 했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홍재순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느린 손쯤이야 얼마든지 참고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지금은 열의가 필요해. 아랫년차가 실력이 더 좋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뭔가 하나라도 바뀌겠지. 만일 김지훈이 중간에 수술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니까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김지훈, 이 환자 수술하기 정말 어려운 케이스라는 건 알지? 3년차라고 해도 중간에 손을 들 수가 있는데 할 수 있겠어?”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뻬가 아무리 많고 기본적인 수술이라고 해도 이런 케이스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반드시 해 봐야 했다. 이미 어떻게 수술을 해야 할지 계획을 다 세웠고, 자신도 있었다.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이럴 때 주저하며 꽁무니를 빼면 스승인 이준영 과장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천광호가 아닌 송동화 과장이 퍼스트를 선다.

‘내 자신과 동료를 믿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에 송동화 과장이 잠시 김지훈을 보다 집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상일은 참 묘했다. 홍재순 덕에 김지훈이 2년차로서는 받기 힘든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창문 너머에 서 있던 홍재순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2년차 주제에 이런 환자를 수술하겠다고? 아뻬라고 무시하다가 쩔쩔매 봐. 니가 아무리 잘난 놈이라고 소문이 났어도, 그런 일이 한두 번만 더 반복되면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일 거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처참하게 하는지 알아?’

손이 느리다고 해서 보는 눈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어떤 수술이 하기 어려운지 더욱 잘 알 수도 있었다.

홍재순은 2년차인 김지훈이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수술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마치 어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결코 원치 않았던 좌절과 분노에 몸부림쳤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로도 억누를 수 없는 애증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메스를 들고 있었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

아픔이 스치던 홍재순의 눈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수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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