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득인지? 실인지? (1)
송동화 과장에게 노티를 하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간 김지훈도 한숨을 쉬고 있었다. 벌써 오후 3시가 됐는데 이제야 배를 닫고 있었다.
헤모 수술 예정인 환자 3명이 모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들은 송동화 과장이 어깨를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김지훈, 홍재순 선생하고 같이 마무리해. 난 외래 때문에 먼저 나가야 되겠다.”
재빨리 손을 씻고 들어온 김지훈이 물끄러미 홍재순의 손을 보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처 한 바늘 하는데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천광호도 문제였다. 8시간짜리 수술 하나를 하는 것이 4시간짜리 수술 2개를 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기 마련이었다. 조금이라도 쉬어야 밤에 응급실을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4시는 돼야 수술이 끝날 것 같은데, 이 환자 오더 내고 병동 일에 드레싱까지 하려면 시간이 너무 빡빡하네. 괜히 말 또 나오느니 일찍 내보내는 게 낫겠다.’
“선생님, 병동 일도 남았고 이제 여기 있을 필요도 없는데, 광호는 내보내도 되지 않을까요?”
이제야 몇 바늘을 뜬 홍재순이 순간 인상을 썼다.
“왜, 시간이 늦어서? 니들은 그 정도도 해결 못해?”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솔직히 홍재순이 할 말이 아니었다. 별일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지훈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치프란 그런 존재였다.
결국 홍재순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30분이면 떡을 치고도 남을 과정이 1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멍청히 서서 실을 자른 것밖에 없었다. 어깨가 뻐근할 정도였다. 시간이 늦어 수술이 끝나자마자 천광호부터 올려 보냈다.
오더를 내고 환자가 깨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5시가 다 돼서야 병동으로 올라갔다. 천광호는 드레싱 중이었다. 후다닥 혼자 회진을 돌고 의국으로 들어갔다.
홍재순이 노란 형광펜으로 책에 쭉쭉 줄을 긋고 있었다. 이론과 실전의 균형이 안 맞아서 그렇지 정말 공부는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이 시간은 공부가 아니라 회진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김지훈이 갑갑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재순이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김지훈, 너 일 안 하니?”
“지금은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과장님 회진 올라오잖아. 근데 일이 없어?”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홍재순이 혀를 찼다.
“치프가 있는데 2년차가 의국에서 엉덩이를 붙여? 스테이션에서 대기해. 니가 아무리 잘났어도 넌 내 밑이야, 인마.”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었다. 물론 상하 관계이긴 하지만 선후배가 서로를 존중할 때 빛이 나는 법이었다.
순간 뭔가 가슴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 김지훈이 안색을 굳혔다.
‘아무리 치프라도 이건 아니지. 성격 이상한 정갑수가 아니라 그냥 정갑수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들이받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그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지훈, 인상 펴라.”
뒤통수에 꽂힌 말에 김지훈이 꾸벅 인사만 하고 나왔다.
일과가 끝날 때까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홍재순이 구내식당이 닫는 시간인 7시 반까지 오더를 내고는 사라졌다. 그것도 달랑 4명을 말이다.
식사 시간이 지났으면 밥을 챙겨 주는 것이 마땅했다. 김지훈이 급히 뒤를 따라갔다.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 문제였다.
“선생님, 우리 저녁은 어떻게 합니까?”
“알아서들 먹어.”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식사 시간을 뺏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가를 좁히며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만 쉬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피스(peace)!
정말 오래간만에 찾는 말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삭이며 의국에 들어간 김지훈이 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오늘 한 끼도 못 먹은 천광호와 인턴이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이혁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나까지 그러면 안 되지. 니들은 내가 챙긴다.’
어차피 돈을 쓸 시간도 거의 없고, 고경아를 만나지 않는 한 돈 들어갈 일도 없었다. 손바닥을 탁탁 치며 차트를 모은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광호야, 오늘은 김치찌개 먹을까?”
“어? 오늘도 우리끼리 먹으래요?”
“응. 일이 있으신가 봐. 우리끼리 먹으면 마음도 편하고 더 좋지, 뭐. 빨리 오더 내고 가자.”
오더를 내자마자 2명의 전공의와 인턴, 그리고 PK 1명이 쏜살처럼 사라졌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밥을 먹고 다시 돌아왔다. 오더 내는 시간보다 더 적게 걸렸다. 물론 아직 적응이 안 된 이혁원은 울고 싶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식사를 하면 외과의들은 습관적으로 응급실부터 들렀다. 오늘따라 응급실이 유난히 한산했다. 그런데 환자 한 명이 문제였다. 김지훈이 나타나자 흉부 사진과 CT를 보며 인상을 쓰던 인턴이 급히 인사를 했다.
“응. 고생이 많네. 아이구! 웬 갈비뼈가 이렇게 많이 부러졌어? 기흉에 혈흉까지 발생했네.”
“예, 선생님. 때마침 오셨네요. 이 환자 바이탈이 좀 안 좋습니다. 사고 나면 거의 다 이렇게 심하게 다치는데 오토바이를 왜 타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두 발로 걷는 짐승하고 오토바이는 믿지 말라는 말이 있어. 혈압이 얼만데?”
“의식은 괜찮은데, 구십에 육십 정도 잡힙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흉부에 외상을 입은 환자의 혈압이 떨어질 정도라면 다른 손상이 있거나, 흉강 내 혈관 손상이 예상외로 심하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기흉까지 있으면 환자 상태가 갑자기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흉부외과 과장님께 노티했어?”
“지금 하려고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요새 튜브는 누가 박아?”
인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과장님이 박으시죠.”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았다.
“내가 노티할 테니까 환자 잘 보고 있어. 광호야, 올라가지 말고 저 환자 좀 봐. 아무래도 수상하다. 피도 좀 시켜.”
변상훈 과장과 연결이 됐다. 김지훈이 노티를 하자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지훈아, 환자 상태가 심각해?)
“아직은 버티고 있는데, 빨리 튜브 박고 중심 정맥을 잡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인턴 때 이미 흉부 도관을 삽입했던 김지훈이었다. 그런 김지훈이 이제는 2년차였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나 지금 출발할 테니까 튜브 박고 라인도 좀 잡아 줘.)
“예, 선생님.”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쓱 뒤를 돌아보자, 이미 중심 정맥을 잡을 도관과 흉부 도관까지 준비돼 있었다. 역시 응급실 간호사들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장갑을 끼자 다들 놀라고 말았다. 중심 정맥이 아니라 흉부 도관이 준비된 쪽에 선 것이다.
“쌤, 흉부 도관을 쌤이 넣으실 거예요?”
“예. 광호야, 이리 와. 빨리하자.”
“쌤, 변상훈 과장님한테 허락받으셨어요?”
당황한 간호사의 목소리까지 떨렸다.
“그럼, 우리 과 환자도 아닌데 당연히 받았지. 내 마음대로 막 하겠어요.”
오래간만에 하는 술기였지만 김지훈은 아주 익숙하게 흉부 도관을 삽입했다.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출혈량이 적지 않았다.
“빨리 라인 잡아서 수혈해야겠다.”
무심코 중심 정맥을 잡으려던 김지훈이 멈칫거렸다. 천광호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쇄골 하 정맥을 잡을 때 가장 큰 합병증은 바늘이 폐를 찔러 기흉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이미 기흉이 발생한 상태였다. 만에 하나 잘못 찔러도 바늘 자국 하나 더 나는 것뿐이었다. 회복이 느려질 이유가 없었다.
‘야! 이번 주가 마지막인데 딱 요때 이런 케이스가 왔네. 거기다 내가 반은 치프잖아. 운 좋은 자식.’
“광호야, 중심 정맥 잡아.”
김지훈이 마치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아직은 의식이 말짱한 환자가 앞에 있었다. 아무리 대학 병원이라고 해도 첫 번째 케이스가 되고 싶은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환자가 불안해하면 그것 역시 문제였다.
김지훈의 눈짓에 천광호가 길게 숨을 내쉬며 환자의 우측 편에 섰다. 심장이 있는 좌측의 중심 정맥은 잡지 않는 것이 원칙적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심장에 무리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인상을 쓰며 슬며시 천광호를 왼편으로 끌어당겼다.
‘너 정신 안 차릴래?’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천광호의 얼굴이 벌게졌다.
왼쪽에 기흉과 혈흉이 발생한 환자였다. 이런 경우 당연히 손상을 받은 쪽인 좌측 쇄골 정맥을 잡아야 한다.
순간 당황한 천광호가 머뭇거리자 김지훈이 고갯짓을 했다.
‘뭐 해? 빨리해.’
천광호가 신중하게 좌측 쇄골 밑으로 굵은 바늘을 찔렀다. 쇄골을 따라 깊숙하게 들어간 바늘을 따라 검붉은 피가 역류됐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천광호가 도관을 집어넣었다. 첫 번째 케이스를 무난하게 해낸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의 눈빛이 좋지 못했다. 변상훈 과장이 나올 때까지 환자의 바이탈만 확인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절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변상훈 과장이 나왔다.
“어이구! 피가 제법 많이 나왔네. 지훈아, 그래도 아직은 지켜보는 게 좋겠지?”
“예, 선생님. 지금은 생각보다 출혈이 많지가 않네요.”
“오케이! 수고했다. 니 덕분에 오는 동안 마음이 아주 편했어. 다음에도 환자 봐줄 거지?”
“허락만 해 주시면 당연히 우리가 보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 너 지금 분명히 허락했다.”
변상훈 과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일이 늘어나는 것을 반기는 전공의는 없었다. 더구나 일반 외과는 응급실 때문에 구미에서 가장 바쁜 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김지훈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록 과는 달랐지만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었다. 환자에 관한 한 엄지를 치켜들 수밖에 없는 전공의가 바로 김지훈이었다.
변상훈 과장이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김지훈이 조용히 천광호를 불렀다. 당직실로 들어가며 인턴들을 모두 내보냈다.
“천광호, 너 중심 정맥 잡아 볼 생각이 있었어, 없었어?”
“있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 이게 고마워할 일이야? 당연한 거야, 인마. 그리고 할 생각이 있었다는 놈이 오른쪽을 잡으려고 해? 너 양쪽에 기흉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니가 욕심을 부리는 건 얼마든지 부려도 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환자야.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그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생각을 해야 될 거 아니야?”
큰 소리가 터졌다. 천광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실수는 다 봐주어도 환자에 관한 문제는 그냥 지나칠 김지훈이 아니었다.
“너 수술도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따위로 접근해? 넌 사람을 살려야 할 일반 외과 의사야. 환자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 무조건 환자부터 생각해. 알았어?”
“예.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아니라 환자한테 해야 할 말이야, 인마.”
버럭 소리를 지른 김지훈이 한참 동안 천광호를 노려보았다. 평소 화를 안 내는 사람이 한 번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더구나 환자와 관련된 실수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의사이기 때문이다.
천광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쯤이면 한동안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사실 평생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김지훈이 천광호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섰다.
“내가 화를 낸 건 싹 잊고 한 말만 기억해. 설마 일반 외과 의산데 마음에 꽁하고 묻어 두지는 않겠지? 광호야, 안 그래도 힘든데 나가자마자 바로 웃는 거다.”
별일에 다 일반 외과를 끌어들였다.
김지훈이 씨익 웃자 천광호도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직실 문을 열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혁원이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이다.
“너 여기서 뭐 해?”
“아닙니다, 선생님.”
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이혁원이 환자를 보고 있는 인턴에게 달려갔다. 입술을 꽉 다문 채였다.
김지훈의 말이 가슴에 푹 박혀 들고 있었다. 특히 일반 외과 의사라는 말이 더욱 깊게 박혔다. 그러나 이혁원의 입장에서는 분명 괴로운 일이었다. 가슴은 원하나 머리는 거부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