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구미 치프(Chief) 오색 (3)
치프가 일을 안 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의국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은 물론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도 상당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1년차가 일을 안 하는 게 낫지. 치프가 저러면 정말 사고 한번 제대로 날 텐데 큰일이네. 에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회진은 도는 거고, 야간 당직 때는 응급 수술도 내가 들어가잖아. 할 일이 늘은 건 오더 내는 것하고, 낮에 뜨는 응급 수술을 들어가는 것뿐이네. 내가 거의 치프처럼 일을 하면 아무 문제도 안 되잖아?’
생각해 보니 도리어 고마운 일이었다. 전체 환자의 치료를 책임진다는 것은 전공의에게 일이 아니라 자부심이었다. 홍재순은 그런 권리를 김지훈에게 준 것이다.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정갑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3년차 일을 대신한다고 해도 몸만 조금 더 피곤할 것이다. 그 정도로는 서울 병원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도리어 수술을 들어갈 기회만 더 많아지는 꼴이었다. 1년차가 더 고생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건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주면 되는 일이었다.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손바닥을 딱딱 쳤다.
곧 드레싱을 마친 천광호가 들어오자 아예 이혁원까지 불렀다. 김지훈이 의자에 등을 척 기대며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기분 한번 낼 타임이었다.
“광호야, 오더 내자. 혁원이 너는 잘 듣고.”
기분은 기분이고, 환자는 환자다. 더구나 그간 오더를 받으며 치프가 되면 꼭 고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일방적인 오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김지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부터 고쳤다.
“광호야, 이 환자 언제면 물부터 시작할 수 있겠어?”
“가스 아웃은 됐습니다.”
“그래서 돼, 안 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의아한 표정을 짓던 천광호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상처도 깨끗합니다. 코 줄 빼고 하루 정도 지켜본 후, 문제없으면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천광호의 의견에 따른 오더를 내렸다. 다른 환자들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오더를 내렸다.
때론 이혁원에게도 생각을 말해 보라고 했다. 물론 머리만 긁적였지만, 그 덕에 대개는 지루하기만 했던 시간이 즐거워졌다. 이것도 수련이고, 배움일 것이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가 강하게 느껴졌다. 구내식당은 이미 닫았을 테니 야식을 시켜 먹는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치프에게 의국비를 주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끼니를 놓치기 십상인 의국원들을 잘 먹이라는 의미가 가장 컸다. 그런데 의국비를 받았을 홍재순이 없으니 꼼짝 없이 자비로 먹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광호야, 저녁 뭐 먹을까?”
“아우! 배고파. 홍재순 선생님은 이미 드셨을 텐데 우리 돈으로 사 먹어야 하겠죠? 선생님이 사 주실 거죠?”
“그럼, 인마. 당연히 내가 사야지. 1년차한테 밥 얻어먹었다는 소문 퍼지면 피곤하다.”
오더를 내며 즐거웠던 분위기가 이어졌다. 농담이 오가며 온갖 메뉴가 다 나왔다.
물론 이혁원은 발언권 자체가 없었다. 어디 감히 학생 주제에 전공의들이 식사를 결정하는 대화에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주는 대로 먹을 일이었다.
“광호야, 짜장면 어때?”
“좋죠. 전 곱빼기요.”
“오케이! 짜장 곱빼기 세 개. 빨리 전화해 봐.”
시간이 꽤 늦었다. 아슬아슬하게 중국집에 주문을 했다. 다행이라며 우르르 숙소에 들어섰을 때 철가방이 보였다. 역시 배달의 민족이었다.
젓가락을 들던 김지훈이 찝찝한 기분에 홍재순의 숙소를 찾았다. 아무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홍재순이 자고 있었다. 조용히 뒤돌아서던 김지훈이 이마를 탁 쳤다.
오색 선배 홍재순.
다양한 뜻이 내포된 별명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책을 읽을 때의 습관 때문이었다. 책상에 펼쳐진 홍재순의 교과서에 오색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일단 샤프로 한 줄.
그 위에 노랑, 빨강, 파랑 형광펜으로 또 한 줄씩.
마지막으로 검은 볼펜.
이게 완성되면 같은 내용을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은 읽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손이 느린 것은 문제지만 공부 하나만큼은 정말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구! 이 정성이면 손도 빨라지고 일도 끝내주게 하겠네. 씨펄! 정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었구나.’
절로 욕이 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의국원을, 그것도 치프를 욕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꼴밖에 되지 않는 법이다.
반면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홍재순에게도 배울 것이 많았다.
손 녹슬지 않게 평소 열심히 연습하자.
시간 될 때 공부하자.
윗년차가 농땡이를 부리면 아랫년차가 피곤하다.
기타 등등.
숙소로 돌아가던 김지훈이 피식 웃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무슨 바른 생활 사나이도 아니고. 가만? 저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일하기는 싫어한다니, 어딘가 좀 이상하네. 그럴 수도 있나? 에이! 모르겠다. 일단 나한테는 나쁜 일만은 아니니까 이대로 가면서 앞으로 부딪쳐 보면 알겠지. 어쨌든 치프 대리라! 그거 하나는 정말 좋네.’
짜장면을 한입 가득 문 천광호가 단무지를 집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 많아지면 백이면 백 표정부터 나빠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너무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직도 반년이나 더 1년차 생활을 해야 하는 천광호는 2년차의 입장조차 이해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거의 치프처럼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지 알 리가 만무했다.
짜장면을 너무 맛있게 먹은 모양이었다. 월요일 밤도 짜장면 곱빼기 값을 톡톡히 했다.
꼭 수술 환자가 없다고 해도 응급실은 항상 김지훈을 그리워하며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화요일 오전은 월요일과 확연히 달랐다.
보통 7시 반쯤 전공의 회진을 돌고, 과장 회진을 이어 돌면 구미 병원 2년차의 오전 일과는 끝이었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정규 수술이 끝날 때까지는 할 일도 없었고, 빈둥거린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원래는 그랬다는 것뿐이었다. 불과 하루 만에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생활이 달라졌다.
6시 반에 천광호와 함께 첫 회진을 돌았다. 곧이어 홍재순과 느릿한 회진을 돌고, 송동화 과장의 회진까지 돌았다. 간간이 치프 대신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제일 힘든 사람은 천광호였다. 드레싱을 해야 할 시간이 30분이나 당겨진 것이다. 꿀맛 같은 새벽의 단잠을 빼앗기고, 대신 덩달아 일찍 눈을 떠야 하는 환자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회진을 끝낸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렸다.
‘전생에 회진하고 무슨 원수가 졌나. 서울에서는 스승님이 계셔서 어쩔 수 없었지만, 어떻게 구미에서도 오전 오후로 기본 세 번씩을 돌아야 하냐. 그나저나 광호가 막판까지 고생을 하고 가네. 환자들이 잘 이해해 주어야 할 텐데.’
송동화 과장이 일과를 서둘렀다.
원래 화목은 하루 종일 외래 진료를 보는 날이기 때문에 정규 수술을 잡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위암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칫 수술 일정을 뒤로 미루면 대구로 갈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예약된 환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오후에 오라는 연락을 해 한시름을 돌렸다. 그런데 전공의들이 바뀌면서 뜻밖의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집도의도 어찌할 수가 없는 홍재순의 느린 손이었다.
경험이 많고 노련한 의사도 네다섯 시간은 걸리는 수술이었다. 송동화 과장의 공력으로는 6시간 이상을 잡아야 했다. 거기에 홍재순이 가세한다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수술 방으로 향하던 송동화 과장이 힐끗 김지훈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치프였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일반 외과 의사를 만들 수가 없었다. 명색이 스태프라면 누구라도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미련이 남네.’
그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회진을 돈 후, 잠깐 의국에 앉아 쉬던 김지훈이 이혁원을 불렀다. PK 교육까지 김지훈의 몫이었다.
“혁원아, 오늘 과제는 위암이다. 진단과 수술 및 치료 방법까지 공부하고, 내일까지 리포트 써서 제출해.”
“예, 선생님.”
1년차도, 인턴도 없었다.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1년차 일도 모자라 인턴이 해야 하는 일까지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병동 일을 하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응급실이었다.
“구미에서도 삐삐가 필요할 줄은 정말 몰랐네.”
이혁원과 함께 응급실로 내려가 환자를 본 후 남은 일을 마저 했다. 어느새 1시가 다 됐다. 그래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제야 위와 장을 연결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송동화 과장은 답답해 죽으려고 하고, 천광호와 인턴은 졸음을 못 이겨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홍재순만 멀쩡한 모습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수술이 길어지면 마취도 길어진다. 여러모로 환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홍재순의 느린 손을 보니 짜증이 나기보다 환자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 3시간은 더 걸리겠다. 그나마 이 환자는 고령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나이가 많거나 바이탈이 걸린 환자는 어떻게 할 셈이지? 정말 걱정된다.’
순간 섬뜩한 생각에 어깨를 부르르 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수술 방을 나왔다. 졸래졸래 뒤를 따르는 이혁원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혼자 밥 먹는 게 치사하다는 말은 해 가지고.’
그러나 2년차의 공력에 말발도 있는 김지훈이었다.
“혁원아, 밥 먹을 때는 어떻게 하라고?”
“최대한 빨리 먹어야 합니다.”
“좋았어. 가자. 이것도 연습이야.”
굳이 일부러 빨리 먹을 필요는 없었다. 10분이면 식판 하나 정도는 저절로 비워졌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었지만 이혁원의 식판에는 아직도 음식이 꽤 남아 있었다.
김지훈이 배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이혁원이 아쉬운 눈으로 입 안 가득 밥을 물고는 뒤를 따랐다.
배가 부르면 따라오는 것이 졸음이었다.
이혁원의 눈을 피해 한 시간 정도 잠을 잔 김지훈이 수술 스케줄을 챙겼다. 내일은 치질 수술 세 건이 있었다. 정확한 병명인 헤모로이드(Hemorrhoid:치핵, 혹은 치질)였지만 흔히 헤모라고 줄여 불렀다.
스케줄을 내기 위해 수술 방으로 내려갔다. 마침 마취과 이용철 과장이 장성기 과장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당연히 변상훈 과장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 김지훈! 수술 방에 웬일이야? 아뻬 있어?”
아뻬가 얼마나 많은지 이용철 과장이 당연한 것처럼 물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일 수술 스케줄 내러 왔습니다.”
스케줄을 받아 든 이용철 과장이 웃었다.
“넌 어떻게 2년차가 돼서도 스케줄을 챙기냐? 아! 병동에 아무도 없겠구나. 너도 참 힘들게 산다.”
“사람이 없는데 이 정도는 제가 해야죠.”
“음! 좋은 자세야. 홍재순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왜 안 받을까? 티만 안 낼 뿐이었다.
변상훈 과장이 손짓을 하며 의자를 가리켰다.
“지훈아, 잠깐 앉아 봐. 송 과장이 의외로 마음이 약해서 내가 대신 말을 해 주는 게 낫겠다. 니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의국원이라는 게 그렇잖아. 모자란 거 서로 채워 주고, 불만이 좀 있어도 참아야지. 그래도 재순이가 치프에 선배잖아.”
“아닙니다, 선생님. 저 불만 없습니다.”
“그래. 그래도 그 덕에 수술 좀 들어가겠네. 너 수술 못해서 안달이 난 놈 아냐?”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저야 수술 많이 들어가면 좋죠.”
“자식! 삼 개월 동안 얼굴 찡그리지 말고 웃으면서 일해. 그게 다 너한테 복이 되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나가자 변상훈 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지훈이 저놈이야 치프를 상대하는 거지만, 송 과장은 속이 까맣게 썩겠어. 하필이면 구미에 오자마자 학교 선배가 치프로 오냐. 거기다 전공의 생활을 일 년 정도 함께했으니까 더 갑갑할 거야.”
장성기 과장이 혀를 찼다.
“재수지, 뭐. 송 과장도 일 년은 더 지나야 자기가 치프가 아니라 과장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거야. 저때는 입장이 애매모호하잖아. 어떤 때는 과장 같고, 어떤 때는 치프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하긴 우리도 똑같았지. 장 과장, 홍재순이 학교 다닐 때 느리기는 했어도 욕을 먹을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 그런데 저번 텀 애들한테 우연히 들었는데, 손이 엄청 느린 데다 성격까지 이상하다고 말들이 많더라구. 인턴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변상훈 과장의 말에 이용철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성격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나잇값을 못해요. 치프가 뭐라고 수술 방에서 송 과장한테 말하는 거 보니까 내가 다 성질이 나더라. 게다가 손이 저렇게 느려서야 써전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오죽하면 송 과장이 내게 하소연을 다 하겠어. 나중에 수술이나 하고 살 수 있을지 몰라.”
이용철 과장이 잔뜩 인상을 쓰며 그간 알고 있었던 일들과 송동화 과장에게 들은 사실까지 말했다. 변상훈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렇게 일할 거면 일반 외과는 왜 한 거야? 게다가 다른 병원에서도 그 정도였으면 미리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송 과장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서겠네.”
“나도 그러라고 했지. 근데 금 과장님이 또 사이에 있네.”
“금 과장님이? 정갑수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무슨 관계래?”
“나도 확실하게는 몰라. 송 과장도 그 문제는 확실하게 얘기를 안 하네.”
다들 동시에 한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이 아는 한 금경태 과장이 혹할 만큼 배경이 좋은 홍재순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