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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316화 (316/1,329)

제7화 구미 치프(Chief) 오색 (1)

회복실로 나온 김지훈이 천광호를 보았다. 환자의 바이탈을 비롯해 수술 후 점검해야 할 항목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나무랄 데가 없었다. 불현듯 응급실에서 소리를 지른 일이 생각났다.

‘에이! 화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척척 잘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김지훈이 소변이 잘 나오는지 확인하고 있는 천광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광호야, 소변 잘 나와?”

“예. 혈압은 백에 육십 정도에서 잡히고, 소변도 시간당 오십은 나오겠습니다.”

“응급실에서 초반에 잘 대처한 덕분이네. 광호야,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했다. 니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마음 풀고 환자 잘 봐.”

김지훈이 미안한 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천광호가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동안 별일 아닌 일에도 욕을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몸이 바쁜 탓에 시간이 지나면 소리를 지른 사람이나 욕을 먹은 사람이나 저절로 잊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선배는 처음이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뭐가 고마워?”

말 몇 마디로 혹시나 마음에 담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깨끗이 잊었다. 누군가 먼저 잘못을 인정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이혁원이 콧등을 찡그렸다. 성격 좋다는 선배는 많았다. 하지만 전공의가 돼 연차가 올라가면 갈수록 다들 조금씩은 권위적으로 변했다. 능력이나 실력과 비례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욱하는 모습도 그렇지만 후배에게 먼저 사과하는 것도 그랬다.

문득 일전에 비슷한 사고가 나 단체로 환자들이 들이닥쳤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가, 일반 외과 2년차 선생님이 오시고 나서야 정리가 됐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네. 일반 외과 2년차만 돼도 저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게다가 김지훈 선생님은 정말 빠르게 환자들을 해결하셨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도 없으시네. 일반 외과를 하셔서 그런 걸까?’

이혁원이 점점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환자를 따라 수술 방으로 올라왔다. 응급실에서 본 일반 외과 전공의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렸다.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를 불과 한 시간 만에 살려 낸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왜 일반 외과에 이토록 마음이 끌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일반 외과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어렸을 적 그렇게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버지라고조차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일반 외과 의사인 이준영 과장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행복하기만 했던 어느 날, 미국에 있는 친척 집에 놀러 갔을 때 할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척이나 자신을 사랑하고 귀여워해 주던 할머니였기에 충격이 컸다.

그런데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란 사람이 갑자기 가족을 버렸다. 무슨 사고인지 모르지만 수술한 환자가 사망했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그 아픔을 가족과 함께 나누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똑똑히 깨닫는 순간,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까지 앗아 갔다.

스스로 그렇게 믿었건만 정작 의대를 오고 말았다. 그것도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이다.

당연히 일반 외과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일반 외과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내가 같은 과를 한다고? 그럴 순 없어. 난 수술 따위는 하지 않고, 보란 듯이 어머니와 함께 정말 행복하게 살 거야. 지금에 와서 날 찾아온다고 해도 십 년이란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아. 난 지금이 아니라 그때 아버지가 필요했다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이 떠오른 이혁원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다른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데도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그때 김지훈이 이를 악물고 있는 이혁원의 등을 딱 때렸다.

“이혁원, 졸려?”

“예? 아닙니다, 선생님.”

“야! 이 자식 봐라. 눈가가 벌게진 거 보니까 하품까지 했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혁원아, 넌 감동도 안 오냐? 수술 안 했으면 지금쯤 사람이 죽었어요. 그걸 우리가 살린 거야. 응? 일반 외과 의사들이 말이야. 이걸 눈앞에서 봤는데 하품이 나와? 얼마나 졸렸으면 이까지 악물었네.”

크게 당황한 이혁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절대 아닙니다, 선생님.”

“절대 아니긴. 쯧! 광호야, 넌 오더 다 냈으면 빨리 올라가서 한 시간이라도 자. 아침에 수술 들어가야지?”

“아닙니다, 선생님.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인가요.”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하긴, 우리가 뭐 언제 잘 거 다 자 가면서 일했나. 광호야, 난 환자가 이렇게 팍팍 치료가 되잖아? 그럼 피곤한지도 모르겠더라. 너도 그렇지?”

“그럼요, 선생님. 그게 일반 외과 의사 아닙니까?”

“그럼. 혁원이 이 자식은 수술까지 들어와 놓고 어떻게 그런 느낌을 모르지? 혁원아, 일반 외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버는 것보다 환자 살리는 걸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하기 힘들어.”

새벽 6시였다. 거의 밤을 꼴딱 샌 김지훈과 천광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런데 좋다고 웃기만 했다. 직업의식과 사명감을 넘어 일반 외과와 일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혁원이 나직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눈물을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기만 했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김지훈이 일반 외과 전공의가 아니었다면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

아침 7시.

과장 회진을 돌기 위해서는 지금쯤 전공의 회진을 돌아야 했다. 다행히 홍재순이 제시간에 나타났다. 그런데 지나치게 차트를 오래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워 보일 지경이었다.

“선생님, 과장님 오시기 전에 미리 회진 도셔야죠.”

“괜찮아. 어차피 1년차가 다 노티하잖아. 광호야, 주말에 수술한 환자까지 확실히 다 파악하고 있지? 일주일 남았다고 대충 일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오늘 수술할 환자만 보자.”

달랑 3명을 보고는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김지훈이 천광호에게 눈짓을 하고는 부랴부랴 혼자 회진을 돌았다.

‘어후! 인턴 선생에 혁원이까지 있는데, 뭐하자는 거야.’

투덜거리며 회진을 다 돌았을 무렵, 송동화 과장이 올라왔다. 홍재순이 꾸벅 인사를 하며 웃었다. 송동화 과장이 입맛을 다시며 몇 마디 나누고는 회진을 돌았다.

앞서 달려간 인턴이 문을 열었다. 천광호가 송동화 과장 옆에 바짝 붙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데 그 뒤에 있어야 할 홍재순이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송동화 과장이 눈살만 찌푸렸다.

불안한 가운데 회진이 끝났고, 곧 모두들 수술 방으로 내려갔다.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치프가 벼슬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과장도 뭐라고 하지 않는 판국이고, 입을 열 처지도 아니었다. 눈가를 찌푸리며 혀를 차던 김지훈이 병동에 있는 의국으로 들어가다 말고 씨익 웃었다.

역시 구미 병원이었다. 드디어 진정한 2년차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예상대로 이 시간에는 2년차가 할 일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간만의 여유와 평화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깊게 잠이 들었었는지 의외로 머릿속이 개운했다.

빈둥거리며 책장을 넘기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분명 마음껏 쉬어도 되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놈의 평화가 점점 어색해지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의외로 갑갑하네. 잠이나 더 잘까? 아니구나. 1시면 수술이 다 끝날 텐데 자고 있다가 걸리면 한 소리 먹겠지?’

놀면 뭐하나. 무엇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김지훈이 내일 수술할 환자 차트를 확인하다 말고 이혁원을 불렀다.

“혁원아, 이리 와 봐. 너 엘 튜브(L tube:코 줄)하고 폴리(소변 줄) 해 봤어?”

“예. 해 보긴 했습니다.”

“간단하지?”

“예. 생각보다 어렵진 않던데요.”

“어렵지가 않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랑 같이 가서 엘 튜브하고 폴리 좀 하자.”

이런 일은 인턴이나 1년차가 할 일이었다. 임상 실습생들도 한두 번만 해 보면 수월하게 할 술기였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김지훈이 이혁원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구미에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인 위암 수술이 예정된 환자였다.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환자분,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수술은 잘될 겁니다. 수술 전에 코 줄하고 소변 줄을 꼭 끼셔야 하는데, 이게 조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면 조금은 덜하실 겁니다.”

한동안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며 환자를 안심시킨 김지훈이 엘 튜브에 젤리를 잔뜩 묻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콧구멍 안으로 튜브를 넣었다.

“환자분, 지금부터 코 안으로 이 줄을 넣을 겁니다. 제가 침 삼키라고 하면 꿀꺽 침을 삼키세요. 입이 마르면 시늉이라도 하시면 됩니다. 자! 들어갑니다. 침 꿀꺽! 한 번 더 꿀꺽!”

눈가를 잔뜩 찡그리며 켁켁거리던 환자가 열심히 침을 삼키는 시늉을 했다. 식도를 통과한 코 줄이 순식간에 위로 들어갔다. 재빨리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한 후, 코에 줄을 고정시킨 김지훈이 소변 줄 역시 직접 끼웠다.

“환자분, 고생하셨습니다.”

병실을 나온 김지훈이 물었다.

“혁원아, 이게 인턴 되면 매일 할 수도 있는 술기잖아. 잘 알아야 되겠지? 가장 중요한 게 뭐야?”

이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단한 술기에 환자가 다소 불편할 뿐 위험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책에 나온 대로 주의할 점을 말했다. 그런데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혁원아, 사실 이런 술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니가 곧 환자를 봐야 하는 의사가 된다는 거야. 정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환자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불편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돼. 난 말이야, 할 것만 딱 하고 환자에겐 딱딱한 의사는 좋은 의사가 아니라고 생각해.”

김지훈의 말을 듣던 이혁원이 입술을 모았다. 이런 말을 해 준 선배는 없었다. 실제로 김지훈은 환자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고, 코 줄을 끼는 방법은 같았지만 방식은 달랐다.

‘환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이런 간단한 술기를 해야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네.’

묵묵히 뒤를 따르던 이혁원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 다른 병원에서도 잘 배울 수 있을까요?”

“다른 병원에서 수련하고 싶어?”

“그냥 궁금해서요.”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병원이 다르다고 배울 걸 못 배우겠냐? 하지만 넌 좀 다를 수도 있어. 너 좋아하는 선배들이 많잖아. 단순히 지식만 가르쳐 주지는 않겠지. 아무리 똑똑하면 뭐하니. 사람이 예뻐야 많이 알려 주지. 하긴 나도 지금이니까 이렇게 웃으면서 알려 주긴 한다만, 너 인턴 되면 죽었다고 복창해야 될 거야. 나 무지하게 무서운 거 알지?”

“예.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래. 각오 단단히 해라. 인턴이 되는 순간 넌 의사야. 의사가 실수하면 환자한테 문제가 생겨. 그걸 막으려면 무지하게 태우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니가 무지하게 열심히 하든지. 오케이?”

스테이션에 들어선 김지훈이 위암 수술 환자의 차트를 집었다. 그러고는 이혁원과 내시경 소견부터 복부 CT는 물론 검사 결과까지 함께 확인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이혁원이 대답을 못할 때마다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다만, 끝에는 꼭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아직은 학생이니까 내가 웃고 있는 거야. 니가 인턴이었으면 벌써 죽었어. 일반 외과,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가 메이저라는 걸 잊지 마. 의사라면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돼.”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는 이혁원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다른 환자 차트를 하나 더 보는 사이, 시계가 어느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다 끝났을 때가 됐는데. 힘든 케이스가 걸렸나? 혁원아, 난 수술 방에 내려가 볼 테니까 먼저 밥 먹어.”

“선생님은 안 드세요?”

“아이! 이 자식이 정말. 일반 외과가 어떤 관지 아직도 모르네. 치프 선생님하고 광호가 아직 안 나왔는데 치사하게 혼자 어떻게 밥 먹어?”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사실 먹어도 된다. 다만, 이준영 과장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한 것을 떠나 이혁원이 마음에 들었다. 하기에 선배들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전 공작을 하는 것뿐이었다. 괜찮은 후배가 같은 과를 했으면 하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수술 방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이혁원이 졸래졸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혁원아, 넌 PK지, 아직은 일반 외과 의국원이 아니다. 빨리 가서 밥 먹고, 2시까지 병동으로 올라와.”

‘아직은’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잠시 망설이던 이혁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이런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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