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주말? 이 정도는 가뿐하다 (3)
천광호는 물론 인턴과 이혁원까지 있는 자리였다. 다들 뭔가 찝찝한 듯 표정이 이상했다.
‘에이! 괜히 애들은 불러서 못 보일 것만 보였네. 이렇게 가다가는 분명 문제가 생길 텐데 어쩌지? 제길! 구미는 조금 편하기를 바랐는데, 그 정도도 욕심이었나?’
잔뜩 인상을 쓰며 잠시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손바닥을 탁탁 쳤다.
“홍재순 선생님이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일요일인데 쉬어야지. 각자 알아서 쉬고 환자 뜨면 보자. 혁원아, 넌 응급실에 있을 거지?”
“예, 선생님.”
“응급실은 응급실이고, 틈틈이 삼겹살도 열심히 구워라.”
눈은 웃고 있었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기분은 찝찝하기만 했다. 주중 오프가 하루 줄어서라기보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모습 때문이었다.
첫날인데 환자 파악도 안 했다. 그것도 과장이 없을 때는 환자를 책임져야 할 치프가 말이다.
할 말을 잃은 김지훈이 숙소로 돌아가서도 편안하게 쉬질 못했다. 숙소에 있을 줄 알았던 홍재순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잔다더니 어디를 간 것일까?
얼마 후, 일을 끝내고 온 천광호가 김지훈의 눈치만 보았다. 2년차의 얼굴이 좋질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에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연차라는 게 참 웃겨. 난 홍재순 선생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넌 나 때문에 편히 쉬지를 못하네.”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긴 뭐가 아냐. 잘 거면 자고, TV라도 보면서 쉴 거면 빨리 나와. 아니다. 기분도 안 좋은데 맥주나 한잔할까?”
천광호도 이제 1년차 후반기다. 이 정도 가벼운 즐거움은 누리고도 남을 시기였다. 더구나 주말이다.
“맥주요? 홍재순 선생님한테 걸리면 죽을 텐데요.”
“광호야, 나 1년차 아니다. 그리고 지금 방에 없어. 딱 한 캔씩만 빨리하자. 그 정도는 음료수잖아.”
천광호가 씨익 웃으며 재빨리 사라졌다.
환한 대낮에 소량의 알코올이 들어 있는 시원한 음료수를 마셨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참았다.
장하다! 김지훈!
다행히 밤이 늦도록 아뻬만 딱 하나 있었다. 케이스까지 좋아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
그렇다고 해도 홍재순이 없는 이상 달라질 것은 없었다. 송동화 과장의 안색이 몹시 좋지 못했다. 그나마 김지훈이 손을 착착 맞춰 수술이 잘 끝난 덕인지 웃기는 했다.
“회진은 돌았어?”
“예. 돌았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있는 환자는 없고, 내일 수술할 환자들 준비도 다 끝냈습니다.”
“너 말고, 홍재순 선생.”
“예? 아! 예. 도셨습니다.”
눈치가 빤하게 보이는 말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공연히 미안해진 김지훈이 숙소로 돌아가다 말고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투덜거렸다.
“무슨 비가 갑자기 이렇게 많이 와? 사고 좀 나겠네.”
무심코 한 말이 화근이 됐다. 불과 2시간도 안 돼 응급실이 난장판으로 변했다. 승용차 두 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데다 한쪽은 음주 운전이었다. 빗길에 제대로 사고가 난 것이다.
천광호에게 노티를 받자마자 뛰어 내려간 김지훈이 팔을 걷어붙였다. 전공의라고는 정형외과 1년차 하나였다. 성형외과와 흉부외과는 여전히 인턴이 맡고 있었다.
내과 계열은 단체 환자가 있을 수가 없었다. 반면 외과 계열은 흔히 있었고, 서로 문제가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누군가 한 명이 상황을 통제해야 빠르고 효율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연차가 가장 높거나, 혹은 일반 외과 전공의가 대부분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일반 외과에 최고 년차!
딱 김지훈이었다.
“광호야, 일단 환자부터 분류하자. 인턴 선생들은 바이탈 흔들리는 환자 있으면 바로 노티하고 상처부터 빨리 확인해.”
이런 상황에서는 경험이 많은 것이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바이탈을 확인한 후 환자들을 살피며 필요한 과를 지정하고 오더까지 냈다. 간호사가 바짝 뒤를 따라붙었다.
“저 환자는 사진 나오는 대로 정형외과에서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 환자는 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 천광호 선생에게 보라고 해요. 혁원아, 넌 저 환자 드레싱 좀 해.”
빠르게 7명의 환자를 모두 보았다.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조금은 불안해 보였지만 당장 급해 보이는 환자가 없었다. 엑스레이 결과가 줄줄이 나왔다.
“흉부외과 인턴 선생, 이 환자 수처부터 해.”
“간호사, 저 환자는 골절 이외에는 다른 문제가 없으니까 정형외과 선생에게 넘겨요. 그런데 신경외과 1년차는 왜 안 내려오는 거야? 다시 연락해요.”
“성형외과 인턴 선생은 어디 갔어? 이 환자 얼굴 빨리 수처하자. 이혁원,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커트(cut)라도 도와. 간호사, 복부 CT 아직 안 나왔어요?”
하나둘 환자들이 정리됐다. 난장판이었던 응급실이 점차 한숨을 돌리며 다소나마 여유를 찾았다. 간호사들이 김지훈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댔다.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정리가 됐네.”
“그러게 말이야. 저 샘,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때 천광호가 김지훈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이 환자 혈압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헤모뻬리(혈복강) 같습니다. 간호사, 중심 정맥 잡을 준비하고 폴리(Foley:소변 줄) 가져와요. 라인도 하나 더 잡읍시다.”
복부 손상이 의심됐던 환자였다. 내원 시에는 멀쩡했던 바이탈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천광호가 처치하는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방사선실로 달려갔다. 이제는 천광호를 믿을 수 있었고, 복부 CT를 가져올 간호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손이 달리는 것을 빤히 보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이제 막 현상이 된 필름을 본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비장이 깨졌네.”
시간이 곧 생명이었다. 급히 응급실로 돌아온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중심 정맥을 잡을 준비는 다 끝났는데, 정작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지훈 한 명뿐이었다. 환자의 혈압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화가 난 김지훈이 천광호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것도 안 배우고 그동안 뭐 했어? 구미에서 못 배우면 어디서 배울 거야? 잘 봐.”
김지훈이 우측 쇄골 밑으로 주행하는 쇄골 하 정맥에 굵은 도관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삽입했다.
간호사가 재빨리 피를 연결했다. 피를 짜라는 소리에 인턴과 이혁원이 달려들었다.
“광호야, 난 노티할 테니까 스케줄부터 빨리 준비해.”
“예, 선생님.”
스케줄을 작성하던 천광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많이 보아도 선배들이 케이스를 주지 않으면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물론 중심 정맥을 잡아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서는 케이스를 줄 생각조차 할 수 없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해 볼 수 있는 케이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답답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평을 할 때가 아니었다. 환자의 바이탈은 불안했고, 김지훈은 이미 노티를 끝냈는지 모니터를 보며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었다.
곧 노티를 받고 급히 달려 나온 송동화 과장이 보호자에게 설명을 한 후 눈가를 찌푸렸다.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진행해야 하는 환자였다. 이제 2년차 후반에 들어온 김지훈이 잘 따라올지 걱정이 된 것이다.
“김지훈, 비장 절제 수술에 들어가 봤지?”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그만큼 불안해한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송동화 과장도 자신의 전적인 책임 아래 집도를 한 기간이 불과 6개월밖에 안 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예. 들어가 봤습니다.”
도리어 김지훈이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며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김지훈, 저놈은 퍼스트를 서야 하는데 긴장도 안 하네. 제길! 나만 불안해하네. 게다가 치프까지 저 모양이니 이걸 어쩐다. 후배라면 소리라도 지르지.’
“간호사, 환자 준비되는 대로 수술 방으로 올립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지훈과 천광호가 사라졌다. 이혁원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막상 수술 방에 들어온 이혁원이 머뭇거렸다. 수술을 들어오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그때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혁원, 뭐 해? 이 환자는 시간이 생명이야. 빨리 옷 갈아입고 들어와.”
어느새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김지훈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이혁원이 급히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간신히 바이탈을 유지하고 있는 환자의 얼굴이 창백했다. 의사들은 물론 간호사들까지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새벽 4시였다.
65세 남자 환자의 비장 절제술이 시작됐다. 마취와 개복은 환자의 혈압을 일시적으로 떨어트린다. 더구나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하기에 비장을 절제한 후 바이탈과 의식이 뚜렷하게 회복될 때까지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송동화 과장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내 손 잘 보고 제대로 따라와. 정신 바짝 차려.”
마취가 끝나자마자 복부 정중앙이 길게 절개됐다.
삐삐삐삐삐!
환자의 맥박이 빨라지고 있었다. 수술진의 심장도 덩달아 빨라졌다. 복막이 열리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삐삐삐삐삐! 삐삐삐삐삐!
다소나마 출혈을 막아 주던 복강 내 압력이 감소하자 심장박동을 알리는 모니터 소리가 더욱 빠르게 울렸다. 배 속에 가득 고여 있는 피가 빠르게 제거됐다.
피를 가득 머금은 탭이 바닥에 쌓였다. 석션기에 연결된 고무관이 출렁일 때마다 유리병에 시뻘건 액체가 쏟아졌다.
적당하게 데워진 생리식염수로 환자의 배 속을 씻어 냈다. 간과 위, 그리고 대장과 소장을 빠르게 확인했다.
“김지훈, 손상 부위 없지?”
“예. 없습니다.”
“비장 동맥부터 잡자.”
김지훈이 수술의 가장 기본인 수술 시야부터 확보했다. 집도의가 말하기 전에 퍼스트가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광호야, 확실하게 끌어. 이혁원 넌 힘 빼고.”
비장은 좌측 상복부 내에 있다. 따라서 왼편에 선 세컨은 복벽을 강하게 당기고, 우측에 선 써드는 적당히 풀어 줘야 수술 시야를 적절하게 확보할 수 있다.
번쩍 들린 복벽 밑으로 선홍색 피가 줄줄 새고 있는 비장이 보였다.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비장 절제가 시작됐다.
수술 중 바이탈은 마취과에서 책임진다. 세컨인 천광호 역시 자신의 할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매번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김지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동료들을 믿었다.
김지훈이 오직 송동화 과장의 손과 수술에만 집중했다.
비장과 연결된 조직을 잘랐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비장 동맥을 찾아 자르고 두 번 타이했다. 부동맥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비장을 들어냈다. 검붉은 색깔의 비장에서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척합니다. 물.”
배 속을 다시 깨끗하게 씻어 냈다. 다른 장기의 동반 손상 여부를 확인한 후 드레인을 박았다. 마지막으로 복벽을 닫았다.
삐! 삐! 삐! 삐! 삐!
심장박동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환자의 혈색은 불그스름했고, 소변 줄을 따라 소변이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장갑을 벗은 송동화 과장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반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끝났다는 생각과 동시에, 문득 수술을 하면서 김지훈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뭐야? 내가 지금 2년차하고 수술을 한 거야?’
정말 2년차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경험이 풍부하고 수술에 임하는 자세가 확실하지 않고는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퍼스트를 설 수는 없었다. 다른 이유가 더 있겠지만 금경태 과장이 눈독을 들이고도 남을 실력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눈가를 좁히며 김지훈을 보았다. 익숙한 손길로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김지훈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뛰어났다.
‘이 정도면 메이저 수술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뭘 어떻게 배운 거지? 이제 2년차에 신현수까지 있었는데, 김지훈에게만 집중적으로 수술을 줬을 리도 없잖아.’
이제 세 번째 수술에 불과했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놀라움을 떠나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지훈이 곁눈질을 하며 자꾸만 웃고 있었다.
“김지훈, 너 왜 웃어? 퍼스트 잘 섰다고 웃는 거야?”
“아닙니다, 선생님. 갑자기 인턴 때 생각이 나서요. 제가 사실 이혁민 선생님하고 선생님이 비장 절제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과를 하기로 결심했거든요. 그때 빨리 결정 안 하면 죽인다고 협박도 많이 하셨잖아요.”
벌써 2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막상 그 시절이 생각나자 송동화 과장도 웃고 말았다.
‘그래. 그때부터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 놈이었지.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후회돼?”
“어우! 절대 안 하죠. 선생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별게 다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래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송동화 과장이 손을 흔들며 수술실을 나갔다. 2년차에 대한 걱정은 확실히 덜었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