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13화 (313/1,329)

제6화 주말? 이 정도는 가뿐하다 (1)

맑은 하늘을 보며 크게 기지개를 편 김지훈이 활짝 웃으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흥분이 됐다. 지훈이라고 불리고, 스승님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벅차고 기쁠 줄은 몰랐다.

부르릉!

엔진 소리가 경쾌하기만 했다.

병원을 나와 고경아의 집으로 가는 동안 휘파람만 나왔다. 예쁘게 차려입은 고경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재빨리 차에서 내린 김지훈이 조수석 문을 열며 허리를 굽혔다.

“타시죠, 경아 씨. 구미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어머! 문도 열어 주고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정도는 해야죠. 올라올 때 경아 씨 혼자 버스 타고 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프네.”

앞으로는 3주나 4주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따로 시간을 낼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서 구미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고경아가 옆에 앉자 기분이 붕 떴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도로를 따라 병원 앞을 지나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환하게 웃으며 고경아와 얘기를 하던 김지훈의 고개가 무엇엔가 홀린 듯 스르르 돌아갔다. 딱 들러붙는 면 티와 청바지를 입은 긴 생머리의 여인을 보고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글래머였고, 지나가던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 멋있네. 죽이네.’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리던 김지훈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왜 꼬집어?”

“지금 어딜 보는 거예요? 저 여자 봤죠.”

흠칫 놀란 김지훈이 손사래를 치며 순발력을 발휘했다.

“누구? 저기 저 청바지 입은 여자? 어휴! 내가 경아 씨를 놔두고 저 여자를 왜 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흥!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똑바로 얘기 안 하면 지금 바로 내릴 거예요. 저 여자 봤죠?”

정말 내릴 기세였다. 당황한 김지훈이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남자의 본능인 걸 어쩌란 말인가!

“아니, 그게, 그냥 저절로 돌아간다니까. 근데 아무 생각이 없어요. 좋다, 나쁘다 그런 것도 아니고, 사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도 않아요. 그냥 그… 뭐랄까? 뭐… 하여튼 그런 게 있다니까. 저 봐. 저 사람들도 다 저 여자 보잖아요.”

남자가 여자에 대해 이해 못하는 면이 많듯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먼저 꼬투리를 잡힌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근 한 시간에 걸쳐 살벌하게 혼났다. 급기야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들었다.

“구미 가서 한눈팔면 알죠? 그냥 죽여 버릴 거야.”

고경아의 두 눈에서 살인 광선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헉! 죽인다고? 그냥 지나가는 여자 한 번 본 것뿐인데?”

“그걸 어떻게 믿어요? 내가 갑자기 내려가서 확인할 거니까 조심해요. 다시는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지 않을 거죠?”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어르고 달랜 끝에 간신히 분위기를 되찾았다. 사실 휴게소에 들러 따뜻한 원두커피를 마신 덕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남자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사태를 수습한 김지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경아 씨, 이준영 선생님이 날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평소 지훈 씨를 무척 아끼시니까 그냥 ‘지훈아’ 그랬겠죠. 어머! 혹시 김지훈 선생이라고 부르셨어요? 맞죠? 내 말이 맞죠?”

어라?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한바탕 자랑을 풀어놓으려던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누가 들어도 별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이준영 과장과 자신 사이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와 감정을 알지 못하면 김지훈이나, 지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요? 이혁원이라는 후배가 있는데, 이준영 선생님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아.”

김지훈이 주절주절 설명을 했다. 고경아가 의외일 정도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눈가를 찌푸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지훈 씨, 또 아는 게 생기면 꼭 말해 줘요. 감이 확 오는 게 심상치가 않아요. 혹시 아버지와 아들?”

“에이! 설마 부자지간이겠어요? 그럼 벌써 알았지.”

“그걸 누가 알아요? 세상에 별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이런 일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예리하니까 두고 봐요.”

‘에휴! 드라마를 너무 본 거 아냐? 하긴 아버지하고 아들 사이라고 해서 관계가 꼭 좋다는 소리는 아니지. 흐음! 일주일 내에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

어쨌든 무슨 말을 나눠도 즐거웠다.

길이 밀려도, 고경아가 잔소리를 해 대도 함께 간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했다.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구미 터미널까지 갔다. 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서울행 버스가 서서히 출발 장소로 들어왔다. 아쉬운 작별의 순간이었다.

김지훈이 아쉬운 표정으로 버스에 오르려는 고경아에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경아 씨.”

살짝 붉어진 고경아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김지훈이 구미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제 2년차 후반기를 시작할 때였다.

구미 병원이 보였다. 순환 근무라고 해도 어느 병원이나 인력이 부족했기에 3년 내리 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런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장성기 과장님과 변상훈 과장님은 잘 계실까? 이용철 과장님도 잘 계시겠지? 간호사들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곳이었다.

숙소로 가던 김지훈이 병원을 한 바퀴 둘러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서울이나 천안 병원보다는 한결 규모가 작아서인지 정겹기만 했다.

오색 선배 홍재순은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음 주에 서도진과 교대를 할 천광호와 함께 환자 파악을 하고, 회진을 돌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작부터 왠지 불길했다.

‘천안에서 출발했으면 나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에서 뒹굴뒹굴 굴렀다. 일이 년차가 한방을 쓰기 때문에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심심하면 휴게실에 나가 TV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다른 과 3년차들이 나타나면 가볍게 인사를 하면 땡이었다. 다른 병원보다는 상대적으로 스트레스가 적었기에 서로 눈살을 찌푸릴 일도 없었다. 구미의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아! 좋다. 이게 바로 2년차지. 그나저나 응급 수술이라도 뜨면 어쩌려고 홍재순 선생님은 아직도 안 오시는 거야. 혹시 사고라도 났나?’

밤늦도록 소파에 누워 영화 한 편을 때리던 중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천광호였다.

아뻬가 의심된다는 소리에 김지훈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3년차 숙소를 찾았다. 휑했다.

‘송동화 선생님이 찾으면 뭐라고 하지? 그 덕에 오자마자 퍼스트로 시작해서 좋긴 한데, 큰일이네. 그나저나 송동화 선생님은 수술을 어떻게 하실까?’

김지훈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간호사들 중에는 아는 얼굴이 없었다. 중환자실이나 수술 방과 더불어 가장 격무에 시달리는 파트라 그럴 것이다.

김지훈의 스타일이 어떤지 아는 천광호가 정확하게 노티를 했다. 1년차 후반기라고 대충 했다가는 살벌하게 탈 수도 있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 이혁원, 너 이 시간에 웬일이야? 집에 안 갔어?”

주말까지 PK(임상 실습생)들에게 실습을 돌리는 과는 없었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 묻자 이혁원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대답을 했다.

“다음 주가 마지막이라서 조금 더 배우려고요.”

“그래? 자식! 어느 과 돌아?”

“예. 일반 외과 돕니다.”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안 그래도 이준영 과장과 어떤 관계인지 알아낼 참이었다. 더구나 이혁원은 일반 외과를 도는 것도 모자라 학생답지 않은 열의까지 갖고 있었다. 뭔가 아귀가 착착 맞는 것 같아 예감이 무척 좋았다.

“우리 과 돌아? 흐음! 그렇단 말이지. 광호야, 혁원이가 우리 과의 진실을 좀 아니?”

“에이! PK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지? 이제 PK지?”

이혁원을 보며 묘하게 웃은 김지훈이 신중하게 환자를 진찰했다. 아뻬의 밭이라고 소문이 난 구미 병원답게 전형적인 아뻬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2시였다.

김지훈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구미는 과장이 한 명인 관계로 시간이 애매모호하면 아침까지 수술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광호야, 요샌 몇 시부터 아침으로 수술을 미뤄?”

“새벽 4시는 넘어야 아침에 합니다.”

“그래? 그럼 스케줄부터 준비해.”

보호자에게 설명을 한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전화기를 잡았다. 천광호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 홍재순 선생님 아직 안 오셨어요?”

“안 오셨다. 연락도 없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겠지. 그렇다고 시간을 끌 수는 없으니까 일단 노티부터 하자.”

노티를 받은 송동화 과장이 홍재순이 아직 안 왔다는 말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송동화 과장에게 홍재순은 갑갑한 전공의였다. 일단 학교 선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장과 전공의 사이였다고 해도 전문의를 따고 나가면 다시 선후배 관계로 돌아간다. 그런 이유 때문에 수련 중에 있었던 일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홍재순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문제는 그런 일이 경력에 오점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 병원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송동화 과장으로서는 가급적 피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수술실로 바로 갈 테니까 수술 준비해.)

역시 송동화 과장의 목소리가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환자도 보지 않고 바로 수술을 한다고?

비록 아뻬였지만 환자에 대한 김지훈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일단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수술 스케줄을 작성하는 천광호를 보던 김지훈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마를 톡톡 치며 물었다.

“광호야, 인턴 선생은 무슨 과 하고 싶대?”

“마이너과 지원할 모양이던데요. 하여튼 외과 쪽은 확실히 아닙니다.”

“잘됐다. 수술 들어오지 말고 응급실 커버하라고 해. 혁원아, 수술 들어가자.”

이혁원이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다. 김지훈은 대답도 듣지 않고 응급실을 나간 후였다. 학교에서는 본과 4학년이 대장이지만, 전공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위치였다. 게다가 1년차도 아닌 2년차의 오더였다.

구미에서의 첫 번째 수술이 시작됐다. 1년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인 수술 방이 정겨웠다.

김지훈을 알아본 당직 간호사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실실 웃으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취과 전공의와 인사를 하고 아뻬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지겹도록 반복한 일이었지만 습관이 돼서 그런지 이제는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곧 환자가 올라오고, 때맞춰 송동화 과장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왔어? 오자마자 수술이구나. 아뻬 확실하지?”

“예, 확실합니다.”

수술 가운을 입던 송동화 과장이 힐끗 이혁원에게 눈길을 주었다. 평일도 아니고 주말에 PK가 수술에 들어온 것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인턴 선생은 어디 갔어? PK 선생 집에 안 보낸 거야?”

“아닙니다. 실습 끝나기 전에 최대한 많이 배우고 싶답니다. 그리고 응급실을 커버할 사람이 없어서 인턴 선생 대신 PK 선생을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래? 너 이름 뭐야?”

“이혁원입니다.”

“이혁원? 김지훈하고 비슷한 놈이 또 있었네. 시작하자.”

마침 마취가 끝났다. 모두들 자신의 자리에 섰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예. 하셔도 됩니다.”

송동화 과장이 메스를 받아 들며 김지훈을 보았다.

전공의 시절에 본 인턴 중 가장 열심히 일한 인턴을 꼽으라면 김지훈을 제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금경태 과장이 직접 거론할 정도면 전공의로서도 상당히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들리는 소리도 많던데 그만큼 뛰어나려나? 그래야 2년차겠지. 경험이란 놈을 어떻게 무시하겠어.’

아뻬는 일반 외과에서 가장 기본적인 수술이기에 김지훈의 기초를 가늠해 보기에는 충분했다. 비록 전문의가 된 지 2년째였고, 구미 병원의 과장으로 근무한 지 이제 6개월이 조금 지났지만, 그 정도 판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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