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11화 (311/1,329)

제5화 스승과 제자란! (1)

김지훈이 반색을 했다.

‘그럼 그렇지. 안 오실 스승님이 아니시지.’

“예, 선생님. 잘 들었습니다.”

“뭐 들었어?”

김지훈이 살짝 머뭇거렸다.

“간담도 부문 발표를 들었습니다.”

순간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간담도? 흥미로운 부문이지. 그쪽에 관심이 있어?”

“예. 솔직히 관심이 있습니다. 아직은 수술도 많이 못 봤지만 꽤 어렵고 복잡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도리어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위장관이나 대장 항문은 쉽고?”

“그건 아닙니다, 선생님. 다 어렵습니다.”

환하게 웃는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허경발 선생님을 보았다. 제자란 스승 앞에서 이래야 하는 법이었다. 항상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스승이건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모를 일이었다.

그 모습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허경발 선생님께 가시지 않고 왜 혼자 계시지? 얼굴도 별로 안 좋으시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마침 모두들 허경발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는 눈치였다. 학회 마지막 날이니 간단하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허경발 선생님과 같이 안 가시나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같이 가서 식사도 대접하고, 좋은 말씀도 듣고 싶지만 금경태가 있구나. 날 보면 분명 표정이 나빠질 텐데, 스승님 앞에서 제자들끼리 얼굴을 붉힐 수는 없는 일이지. 스승님의 마음을 더 이상 불편하게 할 수도 없고. 게다가 금경태가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걸 보게 되면 네게도 좋지 않아. 후우! 그때 내가 간담도를 택하지 말았어야 했나?’

모두가 모인 지금 허경발 선생님 앞에 당당히 선다면 자신이 완벽하게 복귀했음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제자로서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스승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있었다.

허경발 명예 교수가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 예민해지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예전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을 적대시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참지 못할 수도 있었다. 스승 앞에서 또다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김지훈은 더욱 마음에 걸렸다. 응급실 과장이라는 자리는 세부 전공으로 무엇을 택하든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는 위치였다. 만일 간담도라도 택한다면 금경태 과장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더구나 최근 금경태 과장이 김지훈에게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의도인지 빤하게 보였지만 김지훈에게는 분명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 앞으로 나선다면 제자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눈에 허경발-이준영-김지훈이라는 관계가 보이는 순간,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절대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 여기서는 내가 빠지는 게 맞아.’

그것이 바로 제자의 도리이자 스승에게 주어진 짐이었다.

묵묵히 허경발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어깨를 흔들었다.

“김지훈, 허경발 선생님께 인사도 드릴 겸 가서 함께 밥 먹어. 빨리 가라. 늦겠다.”

“선생님은요? 따로 드실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으로 돌아선 이준영 과장이 뚜벅뚜벅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지훈이 따라오고 있었다.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선생님도 식사하셔야죠.”

이준영 과장이 입을 열려다 말고 나직하게 혀를 찼다. 가란다고 갈 놈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스승과 함께 있을 때가 어렵기도 했지만 가장 즐거웠던 것 같았다.

‘이런 건 비슷하지 않아도 되는데.’

음성에서 마지막 날 식사를 함께했던 생각이 났다. 오늘 역시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같이 점심 먹자.”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나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스승이었다. 더구나 내일이면 서울을 떠나 구미로 가야 한다.

그런데 좋다고 웃던 김지훈이 재빨리 표정을 감췄다. 이준영 과장이 교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 허경발 선생님도 계시고 송재덕 선생님까지 올라오셨는데…….”

“먼저 인사드렸다. 가자.”

이준영 과장의 말투가 무뚝뚝해졌다. 김지훈의 입이 자동적으로 닫혔다.

학회장을 나와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준영 과장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단둘만의 자리였다. 의외로 어색한 상황에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에휴!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려니까 꽤 어색하네. 가뜩이나 말씀이 없으신데 대낮부터 술을 할 수도 없고, 왜 식사를 같이 안 하시는지 물을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다. 이참에 슬쩍 답이나 알려 달라고 할까?’

이준영 과장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는 줄 알고 바짝 귀를 기울였던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교수가 저놈 손에서 내 손이 보인다고 했나? 틀린 소리는 아니지. 게다가 나처럼 간담도에 흥미를 느끼다니, 내가 너하고 인연이 꽤 있는 모양이다. 스승님께는 정말 많은 실망을 안겨 드렸지만 제자에게까지 실망을 줄 수는 없지. 의사로서 부끄럽지만 않게 행동한다면 누구에게 배우든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곧 식사가 나왔다. 묵묵히 밥만 먹었다. 식성 좋은 김지훈도 왠지 이준영 과장이 풍기는 분위기에 공깃밥을 더 시킬 수가 없었다.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놈만 보고 있으면 자판기 커피가 먹고 싶어지네.’

식당에서 흔히 보는 커피 자판기였다.

“한 잔 마시자.”

“예, 선생님.”

달달하고 고소한 자판기 커피 향이 퍼졌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가며 한 모금을 마신 이준영 과장이 입을 열었다.

“세계 학회에 와 보니까 어때?”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생각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조했고, 그리고 앞으로도 강조하고, 또 강조할 말이었다. 하지만 길게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훈이기 때문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화제를 돌렸다.

“김지훈, 세부 전공으로 간담도를 하고 싶어?”

김지훈이 신중하게 생각을 했다.

확실하게 마음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크게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준영 과장의 세부 전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물을 수가 없었다. 다른 교수들은 모두 자신의 세부 전공을 살리고 있었지만 이준영 과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묻기에는 너무 미묘한 문제였다. 간담도의 대가인 허경발 선생님의 제자라고 해서 같은 전공을 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장래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대답을 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상당히 끌립니다만, 솔직히 선생님께서 하신 세부 전공을 하고 싶습니다.”

“내 세부 전공을? 나 때문이라면 그건 기준이 아니야.”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준영 과장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마음속에만 있던 말과 생각을 꺼내야 할 상황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생 동안 선생님께 배우고 싶습니다. 제겐 선생님이 유일한 분이십니다.”

누군가에게 유일한 사람!

남녀 간에만 통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문득 가슴이 먹먹해진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했다.

이미 충분히 느꼈고, 알고 있었던 마음이었다. 넌 음성에서부터 이미 내 제자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때론 족쇄가 되어 더 넓은 곳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제 2년차인 김지훈은 더 많은 선생들을 보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배워야 할 시기였다.

‘지훈아, 넌 날개를 더 활짝 펴야 할 놈이야. 응급실은 일반 외과 영역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감정은 뒤로하고 단호해야 할 때였다. 진정 김지훈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지금 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것이 맞았다.

“김지훈,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넌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 무엇을 택하든, 그전에 먼저 네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수술을 배우고 익혀야 해. 어느 한 사람이 그걸 다 가르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내게만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아주 오래전, 스승인 허경발 선생님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는 스승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날 가르쳐 주셨지만, 난 그렇게 하질 못하는구나. 내가 십 년 동안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면 널 가르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지훈아.’

이준영 과장이 가슴속에 스며드는 아픔을 지그시 눌렀다.

스승인 허경발 선생님과 지금 자신의 처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금경태 과장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자신이 김지훈을 아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자의 앞길을 막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이준영 과장의 눈에 스치는 아픔을 보았다. 세부 전공은 아무 소용도 없는 곳이 응급실이었다. 간담도를 전공했다고 해도 김지훈을 가르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후우! 차라리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할걸. 왜 이렇게 생각을 짧게 했을까. 바보 같은 놈.’

이준영 과장이 눈빛을 굳혔다. 감정만으로 제자를 키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다. 더구나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다. 충분하게 얘기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랐다.

“김지훈,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아냈어?”

이준영 과장의 말을 곱씹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이제까지 곧잘 답을 찾아왔지만 이번만큼은 신현수와 나눈 말들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집도를 할 때는 오직 환자와 수술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자세하게 말해 봐.”

“이번 주 내내 수술을 하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시는지 계속 확인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역시 김지훈답구나. 잘 찾아냈어.’

“신현수도 같은 생각이야?”

“예. 일석이하고도 함께 말씀하신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맞다. 집도의는 환자에게 무한한 책임을 지어야 할 사람이야. 그래서 수술실에서는 오직 수술과 환자에게만 집중해야 해. 그런데 너는 내 눈치를 보느라 그걸 하지 못했어.”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찾아낸 것은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교수는 가르치고 전공의는 배우는 입장인데, 최소한의 확인도 하지 말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일 실수라도 하면 수술을 누가 했든 책임은 선생님께서 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다. 하지만 퍼스트와 세컨은 왜 있지? 아무런 지식도 없이 단순히 널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야. 함께 수술을 하는 동료들을 믿지 못하면 수술이 제대로 되겠어? 수술실에서 마주 섰으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해. 그래야만 만에 하나 네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잡을 수 있어.”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손 기술과 수술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아니라 집도의와 퍼스트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서 현수에게 퍼스트를 서게 하셨구나. 수술 팀을 믿고 오직 환자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데, 처음 하는 수술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선생님, 만일 처음 하는 수술인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넌 이미 경험을 했고, 그 방법까지 알고 있어. 자만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대신 네게 자신감을 준다는 생각은 안 들어? 신현수가 퍼스트만 서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신기동 교수의 대장 혈관 우회술과 이혁민 교수의 위 전 절제술에서 이미 보았다. 누군가 자만했거나, 또는 부족한 자신감을 채워 주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할 수술들이었다.

불현듯 이준영 과장과의 수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준영 과장은 분명 자신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술을 주기는커녕 퍼스트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난 현수를 믿고 있었나?’

아니었다. 그래서 써드를 서는 이준영 과장에게 수시로 눈길을 주었다. 신현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만일 이준영 과장이 없었다면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야 집도의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그만 실수도 환자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하기에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환자와 수술에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한다. 또한 동료들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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