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10화 (310/1,329)

제4화 대가들 (2)

술 냄새를 풍기며 수술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 수술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지훈이 술까지 마다하며, 어떻게든 배워야 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후우! 못 말리는 거냐, 아니면 배우겠다는 열정이야? 이런 날은 술 먹고 쉬어도 괜찮지 않아? 그럼 굳이 과장님에게 찍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잖아.’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배우려고 아등바등 매달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아닌 다른 교수들에게도 달리 행동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신현수로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평생을 가도 모를 일이었다.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가진 거라곤 단단한 몸뚱이 하나와 열정뿐인 김지훈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스승인 이준영 과장을 비롯한 몇몇 교수들이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쓸수록 도리어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그들이 믿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김지훈, 그 자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금경태 과장은 전공의들과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대부분 혼자 말을 하고 전공의들은 듣기만 했다. 마치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그 탓인지 김지훈에게는 지루한 시간일 뿐이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금경태 과장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난 날 믿고 따르는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반드시 키워 준다. 단, 내가 허락하는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지 않아야 나도 신뢰할 수가 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더 이상의 관계는 없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허락하는 선과 신뢰라는 말이 다르게 들렸다. 서로의 이득과 야심에 부합해야 한다는 말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콧바람을 일으키고 말았다.

‘스승과 제자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교수와 전공의라면, 서로에게 득이 되느냐를 따지는 것보다는 진심으로 베풀고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살면서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를 바라잖아.’

결국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물론 진지하게 듣는 척은 했다.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금경태 과장이 잠시 송동화 과장과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모두들 최대한 자세를 유지하며 조용히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금경태 과장이 일어났다. 김지훈도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제 송동화 과장만 가면 바로 응급실로 향할 참이었다. 그런데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을 불렀다.

“내일부터 학회니까 다들 준비할 것이 많을 텐데 우리도 가자. 그리고 지훈이 너는 잠시 나 좀 보고 가. 다음이 구미 텀이지?”

“예, 선생님.”

구미 근무 때문에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다.

“김지훈, 인턴 때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차야? 세월 참 빠르네. 근무야 따로 말하지 않아도 열심히 할 테니까 됐고. 다른 게 아니라 과장님이 신경을 많이 쓰시네.”

“과장님이요?”

“그래. 나한테 특별히 부탁을 하셨어. 구미 오면 수술 좀 많이 챙겨 주시라네. 슬며시 언질을 주신 것으로 봐서는 굳이 과장님한테 따로 감사하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근데 말이야.”

송동화 과장의 얼굴이 다소 심각해졌다. 뭔가 어색한지 잠시 김지훈을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음! 아니다. 그냥 니가 수술을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받으면 과장님 덕분이라는 것만 알아 둬. 너도 2년차니까 눈에 벗어나면 꽤 힘들어진다는 것쯤은 알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도 문제가 된다. 잘하자.”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생님이요? 왜요?”

“그러게. 내가 왜 힘들어질까? 같은 교수라도 서울이나 천안하고 구미는 차원이 달라. 에이구! 니가 뭘 알겠냐. 가자. 너도 학교에, 그것도 서울에 남고 싶으면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는 거 잊지 마. 그렇게 살아도 힘든 게 세상이다.”

한탄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을 던진 송동화 과장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왠지 어깨가 처져 보였다. 금경태 과장의 말대로라면 오늘 회식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힘이 넘쳐야 마땅한 일이었다. 확실한 라인이니 말이다.

병원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수술을 많이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보다 의문이 앞섰다.

‘내가 눈 밖에 벗어나면 송동화 선생님도 힘들어진다고? 서울이나 천안 병원으로 올라오는 게 힘들다는 말인 것 같은데. 어라?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걸림돌이라도 된다는 거야?’

설사 추측이 맞는다고 해도 금경태 과장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한낱 2년차의 행동과 송동화 과장의 인사이동 문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에 대한 금경태 과장의 얽히고설킨 감정을 알지 않고서는 평생을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늦게 응급 수술 하나가 떴다. 손일석이 양보를 할 놈이 아니었다. 금경태 과장이 아니더라도 써드를 설 수밖에 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수술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손일석, 넌 신 교수한테 뭘 배운 거야? 배우는 놈이 이 모양인데, 가르치는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뭐해?”

손일석의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지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김지훈이 귀를 바짝 열면서도 수술 부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퍼스트 자리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쯤 수술이 끝났다. 처참하게 무너진 손일석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탔다.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써드라고 안 태울 이준영 과장이 아니었다. 분명 오늘 수술에 답이 있었다.

***

다음 날, 세계 학회가 성대한 개막을 알렸다.

신현수는 이른 아침부터 금경태 과장과 학회장으로 갔다. 삼사 년차들 역시 당직을 빼고는 오전 일과를 마치자마자 모두들 학회장으로 달려갔다.

윗년차가 없으면 아랫년차는 그만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김지훈과 손일석에게는 간만에 찾아온 한가로움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논문이 불이 돼 발등에 떨어진 것이다.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신현수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다. 논문을 쓰며 끙끙대는 김지훈을 보며 책 하나를 툭 건넸다. 세계 학회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이 모두 실린 논문집이었다.

“야! 이게 대가들의 논문이란 말이지. 고맙다, 현수야.”

“수술 없었어?”

“오늘은 조용하네. 아 참! 현수야, 어제 수술 들어갔다가 느낀 건데, 아무래도 우리 생각이 맞는 것 같아. 눈치 보지 말고 각자 제 역할을 충실히 하라는 거지.”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을까?”

잠시 그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스승님 덕분에 현수하고 무지하게 말을 많이 하네. 어째 요 며칠 동안 한 말이 그동안 한 말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논문집을 펼쳤다. 목차를 쭉 살펴보다 말고 콧등을 찡그렸다. 이상하게 간담도 부문에 관한 논문들에 눈길이 갔다. 하필이면 노골적으로 이준영 과장을 배척하는 금경태 과장의 파트라니 난감한 일이었다.

사실 그동안 배우려는 목적만으로 금경태 과장의 수술을 보며 눈을 부릅뜬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준영 과장과 수술을 할 때가 가장 즐거웠지만, 정말 흥미롭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에이! 하필이면 간담도가 제일 끌리냐.”

투덜거리면서도 논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이 전화벨 소리에 씨익 웃었다. 예상대로 응급실이었다.

후다닥 응급실로 내려가 바로 신현수에게 연락을 했다.

‘스승님의 스타일상 이번에도 받겠지?’

기대한 대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들었다. 아직도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본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를 지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지훈에게는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상황이 이어졌다. 학회 때문에 주중 오프가 사라졌다. 이준영 과장과의 시간이 늘어난 대신 고경아와 서울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밤늦은 시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판기 커피 한잔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드디어 세계 학회가 어떤 대회인지 볼 수 있는 날인 금요일이 왔다. 미국, 유럽, 일본, 러시아, 동남아까지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의사들이 대거 몰려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도 각 부문별 발표가 오전까지 꽉 차 있었다.

로비에서 공짜로 주는 커피를 마시며 발표 목록을 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이혁민 교수와 금경태 과장이 모두 오늘 발표를 했다. 은근히 기대가 됐다.

‘야! 이혁민 선생님 발표는 꼭 들어야겠네. 남은 시간에는 뭘 들을까?’

그런데 이번 역시 간담도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정말 이상하네.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파트에 왜 이렇게 마음이 끌리지? 어휴! 간암과 췌장암 수술에 라파로(복강경 수술)의 최신지견이란 말이지. 일단 듣고 보자.’

발표장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국 의사까지 모두 영어로 발표를 했다. 물론 발표 내용은 이미 책자로 나와 있었고, 슬라이드 쇼까지 병행해 이해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질의응답 시간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중간에 금경태 과장의 논문 발표가 있었다. 신현수가 옆에 앉아 보조 진행을 맡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수많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만큼 관심을 끄는 주제였고, 금경태 과장은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야! 대단하다. 간담도 쪽에서는 손에 꼽는다더니, 외국에도 통하나 보네. 저 정도 실력을 쌓으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할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것 보니까, 현수 저 자식도 은근히 깡이 세.’

인간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학문적인 성취는 정말 부러우면서도 목표로 삼아야 할 일이었다. 당당하게 앉아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 신현수에게도 배울 점이 있었다.

열띤 발표와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발표가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연자들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중간에 잠깐 이혁민 교수의 발표를 들었다. 역시 큰 박수가 터졌다. 침착하고 논리 정연한 발표에 김지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우! 이게 바로 대가들의 모습인가?’

오후 1시가 다 돼 마지막 발표가 끝났다.

어두컴컴한 발표장 맨 뒤에 앉아 있던 김지훈이 힘차게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품고 간 학회장은 새로운 의욕과 열정에 휩싸이게 했다.

우르르 발표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따라 로비로 나왔다.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의사들이 넘쳐났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확 띄는 사람 몇몇이 있었다.

각 부문을 대표하는 의사들로, 피부색과 국적을 떠나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의사들이 몰려들어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우물 안 개구리?

세상은 정말 넓었고, 대단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들 모두 대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 바로 최고의 실력과 지성을 갖춘 대가들이었다. 욕심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중의 한 명이 돼 우뚝 서고 싶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허경발 명예 교수였다.

은퇴를 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의사들이 다가와 존경을 표했다. 일일이 응대를 하며 편안한 웃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역시 한국의 일반 외과를 대표하는 대가다운 모습이었다.

‘정말 겸손하시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인품이 따르지 못하면 대가라고 불릴 수가 없겠지?’

잠시 후, 금경태 과장이 신현수와 함께 다가왔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 그리고 송재덕 과장은 물론 처음 보는 얼굴들까지 보였다. 김지훈은 몰랐지만 그들 모두가 허경발이라는 이름 아래 키워 낸 제자들이었다.

‘교수님들도 다들 오셨네. 허경발 선생님께서 오셨는데 스승님은 왜 안 보이시지?’

당장 달려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함부로 낄 자리가 아니었다. 신현수를 빼고는 삼사 년차들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허경발 선생님을 본 탓에 이준영 과장이 왔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피곤하시다고 해도 분명히 오셨을 것 같은데.’

김지훈이 목을 길게 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누군가 등을 툭 쳤다.

“김지훈, 잘 들었어?”

이준영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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