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마지막 한 주 (2)
월요일 아침, 회진을 올라온 금경태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회진을 기다리고 있는 김지훈을 보자 주말 집담회 때 본 수술 기록이 생각난 것이다. 주말은 몰라도 금요일은 분명 휴가 기간이었다.
‘휴가도 반납하고 수술을 들어갔단 말이지. 이놈이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신현수도 신경 쓰이는 판에 김지훈이 너까지 이래? 단순한 놈들은 이래서 골치가 아파. 쯧!’
2년차에게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삼 년 후를 내다보아야 할 때였다. 그때면 김지훈과 신현수는 전문의가 돼 있을 것이다. 군대 문제도 없어 바로 써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훌륭한 패가 될 수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은 그간 수많은 전공의들을 가르쳐 왔다. 이제는 관심만 갖고 보면 어떤 재목인지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지훈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향후 병원 내에서의 입지와 이준영 과장과의 문제까지 생각할 때, 김지훈을 비롯해 유능한 전공의들은 반드시 자신의 라인으로 해야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 태도 때문에 갈팡질팡할 수도 있겠군. 구미로 내려가기 전에 확실히 알아듣도록 해야겠어.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지. 제 앞길 제 스스로 막겠다는데, 뭘 어떻게 해 주겠어.’
이준영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는 더욱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게 놔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존재들이었다. 최근 신동석 이사장의 눈빛도 그렇고, 신현수까지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금경태 과장이 세세한 문제까지 신경을 바짝 쓰기 시작했다.
금경태 과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고는 각오를 다졌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한 주였다. 지난 주말 신현수와 함께 신 나게 탔다. 너무 신이 나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
마지막 주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 주는 의미가 남달랐다. 세계 학회까지 있는 주였다. 물론 세계 학회에 참석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금경태 과장의 소관이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큰 경험을 할 수도 있었다.
이는 전공의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논문 발표를 해야 하는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는 아예 정규 수술을 잡지도 않았다. 교수들에게도 그만큼 중요한 행사였고,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회진을 끝낸 금경태 과장이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교수 회진 끝나면 바로 의국으로 오라고 해.”
곧 이혁민 교수가 의국으로 들어오자, 금경태 과장이 심각한 얼굴로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물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오고 갔다. 이혁민 교수가 나간 직후 금경태 과장이 최철한을 찾았다.
“수, 목, 금 3일이야. 정신 바짝 차려. 우리가 맡은 일본 의사들이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삼사 년차는 모두 학회에 참석하게 하고, 2년차는 하루씩 돌아가면서 오라고 해. 아! 신현수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학회 기간 동안에는 나하고 함께 다닐 거야.”
“예, 알겠습니다.”
“흐음! 그리고 너희들 이번 주가 마지막이지?”
“예. 다음 주부터 전문의 시험 준비에 들어갑니다.”
구월이 되면 4년차들은 손을 놓는다. 전문의 시험 때까지 대략 4개월 정도 주어지지만 시험에 대비하기도 빡빡한 기간이었다.
물론 평소 얼마나 착실하게 일을 했느냐에 따라 누군가에는 넉넉할 수도 있었다. 시험의 상당 부분이 결국 수술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4년 내내 주중 발표나 토요 집담회에 집중했다면 시험 준비는 더욱 수월할 것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회식해야지?”
회식이라는 소리에 최철한이 다소 긴장하면서도 흥분된 기색을 보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금경태 과장은 4년차들이 손을 놓기 직전에 반드시 회식을 했다. 단순히 격려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4년차들을 모두 불렀을 것이다.
그동안 이때 하는 회식 자리에는 2년차 이상에서 1명씩, 단 3명만을 불렀다. 정확한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금경태 과장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전공의들이었다. 그것은 곧 행동 여하에 따라 병원의 스태프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세계 학회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지만, 다행히 내 발표가 금요일에 있으니까 내일 저녁에 간단히 하자. 유석재하고 신현수, 그리고 김지훈, 이렇게 셋만 불러. 많이 모여야 복잡하기만 하지, 뭐.”
최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지훈도 부르시는 겁니까?”
“그래. 김지훈도 두고 볼 만해. 그리고 내일 송동화도 올라올 거야. 그러니까 여섯 명 예약해. 작년에 갔던 데 알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금경태 과장이 외래로 내려갔다. 이번이 세 번째 참석인 최철한이 장소와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최철한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고, 참 답답하네.’
4년의 세월은 금경태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려 주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실제로 이삼 년차 때 회식에 참석했다고 해도 밉보이면 다음 해에는 부르지 않았다.
문제는 능력이나 성품만이 최우선 기준이 아니라,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까지 본다는 점이었다. 전공의 입장에서는 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은 지금도 스태프 임명에 관한 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구미의 송동화 과장이 대표적인 예였다.
최철한은 그런 면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러나 군대에 갔다 온 후 병원에 남고 싶었다. 알게 모르게 금경태 과장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것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긁은 것이다.
‘에이! 세상이 뭔지. 후우! 그런데 애초에 지훈이를 찍었던 게 아니었었나? 요새 지훈이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변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뜻밖인데.’
최철한이 알기로는 작년에 1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던 신현수가 유일한 예외였다. 그런데 또 예외가 생긴 것이다. 은근히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가까운 후배가 뛰어나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면으로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에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혀를 차며 전화기를 든 최철한이 유석재를 찾았다.
곧 유석재와 김지훈, 그리고 신현수가 차례차례 들어왔다. 내일 과장님 회식에 참석하라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김지훈을 보았다. 무언가 의아해하면서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왜들 그러세요.”
사실 누구도 금경태 과장의 특별한 회식을 입에 담지 않았다. 2년차 이상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되기도 하지만 자존심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동기 중 누군가가 어떤 의미로든 자신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유석재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쳤다.
“자식! 잘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과장님이 널 잘 보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게 조금 부담스러운 문젠데, 생각을 바꾸면 큰 득이 될 수도 있어. 선생님, 미리 설명을 좀 할게요. 지훈아, 이리 와 봐.”
김지훈을 따로 불러 옆에 앉힌 유석재가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우리 과 스태프 임명은 과장님이 전권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이번 회식에 불렀다는 말은 뽑아 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어떻게 보면 기회지. 단, 원하는 방향에서 많이 벗어나면 내년에는 안 부를 수도 있어.”
“원하는 방향이라니요?”
“응. 그게 좀 묘해. 실력만이 아니거든. 솔직히 실력만 있다고 해서 스태프가 될 수는 없긴 해. 그런데 과장님이 원하는 건 일종의 라인이야. 라인의 의미가 뭔지 알지? 최소한 과장님 이상으로 누군가를 존경한다거나 따르는 내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참 희한한 기준이야. 그치? 근데 그게 싫다고 회식에 안 갔다가는 문제가 정말 커질 거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해야 되나? 하여튼 이런 문제가 있으니까 알고는 가. 괜히 실수하지 말고.”
전공의로서는 듣기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말이었다.
김지훈이 잠시 고민을 했지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먼저 나서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서울도 이번 주가 마지막이니, 앞으로 최소 6개월 동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가야죠.”
“너도 요새 좀 변한 것 같다.”
“에이! 선생님, 저 변한 거 없어요. 전 정말 스승님으로라도 모시고 싶은 분이 따로 계시거든요.”
선배 중 유일하게 유석재에게만은 해도 될 말이었다.
“뭐? 스승님? 혹시 이혁민 선생님 말하는 거야?”
“거기까지는 말씀을 못 드리구요. 하여튼 과장님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년에는 안 부를 수도 있겠는데요.”
유석재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식, 되게 쉽게 말한다. 니 꿈은 어쩌고. 병원에 못 남아도 좋아? 운 때가 맞아도 과장님이 노(No) 하면 끝이다. 만일 다른 교수님이 과장이 된다고 해도 지금 부원장님인데 앞으로 파워가 더 세지지 않겠어?”
“어? 그럴 수도 있네요. 뭐, 그래도 전 상관 안 합니다. 꼭 병원에 남아야만 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라인이니 뭐니 그런 생각 하면서 일하고 싶지도 않고요.”
은근히 얼굴이 붉어진 유석재가 콧등을 찡그렸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든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것이고, 그게 세상사에는 맞는 처신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의 말을 들으며 뭔가 중요한 것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낀 것이다. 타협을 한 대가일지도 몰랐다.
김지훈도 싱숭생숭하긴 했다. 태도가 변한 것도 의아한 일인데, 몇 명만 참석하는 회식에 불렀다니 솔직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특별히 잘 보였던 일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찍을 때는 언제고, 이건 또 뭐야. 에이! 신경 쓰지 말자. 라인은 무슨 빌어먹을 라인이야. 아니지. 내 라인은 이미 정해졌지. 허경발 선생님과 스승님, 그리고 나. 좋다! 그런데 내가 막 이렇게 생각해도 되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몰랐다. 문득 허경발 선생님이 이준영 과장을 준영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준영 과장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제자를 칭하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그만큼 가깝고 살갑다는 말은 될 것이다. 스승이라고 여기는 이준영 과장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
정규 수술이 없는 탓에 1년차들이 병동 일을 모두 커버했다. 그 덕에 2년차들은 하루 종일 시간이 팡팡 남아돌았다. 다들 논문을 붙잡고 머리를 싸맸다. 세계 학회 때문에 몹시 바쁘다지만 논문을 잊을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김지훈도 초조한 얼굴로 논문을 다시 작성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머릿속이 자꾸 뒤엉켰다. 설상가상으로 밤이 되자 응급 수술까지 떴다. 아뻬였다.
신현수가 당연하다는 듯 수술실에 들어왔다.
“현수야, 오늘도 타겠지?”
“넌 퍼스트라도 서지.”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살벌하게 탄 주말의 악몽이 저절로 떠올랐다. 퍼스트나 자신은 그렇다고 쳐도, 써드를 선 신현수까지 태울 줄은 몰랐다. 세컨을 서던 서도진이 얼굴을 못 들 정도였다.
조금의 실수는 물론 잠시 한눈을 파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마치 완벽을 요구하는 사람 같았다. 당장 나가라는 말이 안 나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김지훈, 정신 안 차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마. 1년차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아?’
‘신현수, 그동안 넌 뭐 했어? 안 들어와도 되는 수술은 도대체 왜 따라 들어온 거야?’
대충 기억나는 말이었다. 그다음에 나온 말들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서로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 속에 환자가 올라왔다.
마취가 진행되기 직전,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이준영 과장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귀를 의심했다.
“김지훈, 수술 시작해. 신현수, 퍼스트 서.”
이준영 과장이 서도진에게 세컨을 서라는 고갯짓을 하며 써드 자리에 섰다. 다들 놀라고 말았다. 서도진은 아예 움직이지도 못했다. 응급실 과장이 써드를 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김지훈, 뭐 해? 수술 안 할 거야?”
“아닙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6개월 동안 서울 근무를 하며 처음으로 이준영 과장에게 수술을 받았다. 기뻐 팔짝 뛰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이번 수술은 단순한 아뻬가 아니라 그동안 배운 것에 대한 평가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을 해 어깨가 뻐근할 정도였다.
이준영 과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김지훈과 신현수를 보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송재덕 선생님의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겠군.’
자신만의 방식대로 가르쳐야 할 것을 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때론 파격과 자유로운 사고가 훨씬 유용할 때가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