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05화 (305/1,329)

제2화 휴가 Ⅱ (2)

일순 자괴감에 빠졌던 박순용이 애써 웃었다. 김지훈만이 아니라 고경아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후배이기도 했지만 손님이기도 했다.

“지훈아, 고맙다. 니 덕분에 환자 한 명 구했다.”

“에이! 형도, 고맙기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운도 실력이 있는 놈한테 따라오는 거야. 음! 난 오후에 진료를 해야 되니까 넌 제수씨하고 잠깐만 놀다 와. 저녁에 자연산 회에 소주 한잔하자. 제수씨, 그래도 괜찮을까요?”

고경아가 슬쩍 김지훈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솔직히 단둘이 있고 싶었지만, 김지훈이 정말 좋아하는 선배였기에 자신과 함께 들렀을 것이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

“고마워요. 솔직히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반갑고, 할 얘기도 많네요. 지훈아, 여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울진인데 직전에 불영사로 가는 길이 있어. 불영사 좋다. 구경하고,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산채 비빔밥 한 그릇만 먹고 와. 내가 먹어 본 중에 제일 맛있더라.”

임원에서는 호산이 지척이라 의외로 이제야 점심을 먹을 때였다. 이렇게 된 마당에 둘이만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형도 점심 드셔야 하잖아요. 근처에서 간단하게 같이 드시죠.”

“아니야. 난 간호사도 있고, 점심때밖에 못 오는 환자들이 있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김지훈은 휴가지만 박순용에게는 생업이었다.

저녁에 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불영사로 향했다. 이정표를 따라 불영사를 가리키는 길로 들어섰다. 경북도 꽤 오지가 많다는 말이 실감났다. 가파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주변은 온통 높고 험한 산뿐이었다.

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세우고 조선시대에 개축을 했다는 등의 안내문을 읽고 불영사로 향했다. 산과 물이 참 멋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불영사 역시 비구니 도량이라 그런지 정갈하면서도 고즈넉했다. 절 마당에 있는 연못과 채마밭이 인상적이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절이나 경치 구경은 잠시의 즐거움일 뿐이었다. 한 바퀴 휙 돌고 감탄사 두세 번쯤 터트리면 천하의 절경도 동네 뒷산처럼 밋밋해지기 마련이었다.

배가 등짝에 붙은 김지훈이 고경아를 재촉했다.

“순용이 형이 보기보다 맛을 아는 사람이니까 여기 분명히 맛있을 거예요. 빨리 나가서 밥부터 먹읍시다.”

관광 식당 중 한곳을 택해 산채 비빔밥 두 그릇을 시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불영사가 있는 천축산에서 채취했다는 산채를 빨간 고추장으로 척척 비비고 한입 가득 물었다.

오! 예술이다.

평소 비빔밥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김지훈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지금까지 먹어 보았던 어떤 비빔밥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딸려 나온 된장국까지 일품이었다. 결국 한 그릇을 더 시켜 뚝딱 해치웠다.

“지훈 씨, 예전에 비빔밥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근데 여긴 맛있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악어 먹성은 못 따라가지만, 싫어한다고 해도 남들 먹는 것만큼은 먹는다는 거 잘 알잖아요. 어? 이런! 휴가까지 와서 악어를 입에 담다니, 이놈의 입을 어떻게 하지?”

김지훈이 입을 꿰매는 시늉을 해 대자 고경아가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역시 여행은 맛있는 걸 먹어야 분위기가 사는 법이었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내친김에 성류굴로 향했다. 다시 울진 쪽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말고 식겁을 했다.

천 길 낭떠러지!

오른편으로 보이는 계곡 밑이 까마득했다.

“무지하게 높은 데다 길을 만들었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여긴 떨어지면 정말 뼈도 못 추리겠네.”

김지훈의 운전 실력을 믿는 걸까?

고경아는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창밖으로 고개까지 뺐다. 시원한 산바람에 에어컨을 틀 필요도 없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고경아를 보는 김지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물론 운전대를 꽉 잡은 채였다.

성류굴까지 보고 호산에 때맞춰 도착했다.

박순용과 함께 다시 임원으로 갔다. 길게 지어진 가건물에 회집들이 즐비했다. 단골집인지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고, 곧 자연산 회가 나왔다.

광어와 우럭, 그리고 도미!

이건 뭐 고추장에 찍어도, 간장에 찍어도,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소주가 막 넘어갔다.

운전도 박순용이 한 덕분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후에야 일어났다.

임원과 호산 사이의 7번 국도는 바다를 끼고 있었다. 낮에 본 바다와 밤바다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달빛을 받은 바다가 잔잔한 파도가 일 때마다 반짝였다. 조수석에 앉았던 김지훈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밤바다를 바라보던 고경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저 행복했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아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행복을 전하고도 남았다.

사흘째 밤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박순용은 마음 좋은 선배이자 암초였다.

“지훈아,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 진짜 할 얘기도 있고, 방도 세 개니까 딱 맞네.”

김지훈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고경아의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박순용의 뒤를 따랐다. 호산에 단 하나 있는 아파트에 박순용의 집이 있었다.

맥주 몇 잔 오간 후, 피곤에 지친 고경아가 편히 목욕도 하고 잘 수 있도록 박순용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지난 시절의 추억을 나누다 보니 박순용의 눈가도 벌겋게 물들었다.

“지훈아, 아까 그 환자 말이야. 뇌경색 맞더라. 그래도 제시간 안에 도착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래.”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후우! 너 아니었으면 중풍 환자 한 명 더 생긴 거겠지? 일반 외과 생활은 어때? 할 만해?”

김지훈이 박순용이 묻는 말에 아는 대로 대답을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지만 그만큼 많이 배우고, 여러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보는 과가 바로 일반 외과였다.

“역시 일반 외과네. 지훈아, 나도 일반 외과 할까? 지금 지원하고 준비하면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형이요? 왜 안 되겠어요. 형처럼 멋있고 좋은 사람들이 일반 외과를 하면 좋죠. 근데 형 병원은 어떻게 해요?”

“그게 문제긴 해. 약국이 있긴 하지만 병원을 닫으면 여기 분들은 모두 임원까지 가야 하거든. 내가 개업을 하니까 동네 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그래서 더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그런데 오늘 보니까 환자분들을 위해서라도 더 배우는 게 맞는 것 같다.”

왠지 박순용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이미 개원까지 한 의사들이 다시 전공의로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 때문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고된 일을 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너무 편안한 일상에 젖었기 때문이랄까?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김지훈이 건배를 연발하며 오래간만에 박순용을 취하게 했다. 그 와중에도 맛집을 건졌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절경을 보느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동네 뒷산을 보는 게 더 즐거운 법이다.

두런두런 오가던 말소리가 나직해졌다.

얼마 후, 김지훈이 눈을 번쩍 떴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사흘째 밤을 선배와 지새웠다. 고속도로와 포개진 이불에 이어, 인간 장벽이 고경아와의 사이를 막은 것이다.

‘으아아! 하늘은 손만 잡고 자는 것조차 허락을 안 한단 말인가? 난 많이 원하지도 않아. 그냥 옆에서 자기만 해도 좋단 말이야.’

솔직한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이것도 운명이었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면 기회는 또 올 것이다.

더구나 김지훈에게는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본능은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박순용이 잘 아는 식당에서 매운탕으로 해장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제 하룻밤만 더 자면 고경아와의 휴가도 끝이었다. 바다를 보며 서울로 향했다.

“그럭저럭 재밌었죠? 남은 이틀도 즐겁게 놀다 갑시다.”

“어디로 갈 건데요?”

“막막했는데 어젯밤에 순용이 형이 맛집을 알려 주더라구요. 일단 오늘은 대관령을 넘어서 진부에 도착한 후 맛있는 점심부터 먹죠.”

남경 막국수!

진부에 있는 유명한 식당이라고 했다.

막국수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웬만해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물어물어 식당을 찾았다. 점심때 도착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댔다.

과연 남경 막국수였다. 막국수가 원래 비빔이 아니라면 특별한 맛이 없기도 했지만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맛이었다. 궁금하면 직접 먹어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경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맛있네요. 다음 코스는요?”

역시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양평 서종리의 해 뜨는 집으로 갑시다. 그리고 거기서 일박을 하고, 내일 저녁에 서울로 입성!”

“뭐 하는 집인데요?”

“쏘가리 매운탕이 일품이라는데, 빠가사리도 맛있다네. 흙냄새가 하나도 안 나고, 백 프로 국산이래요.”

“민물고기도 수입을 해요?”

“중국산이 없는 데가 어디 있어요. 빠가사리는 몰라도 쏘가리는 무조건 살아 있는 걸 확인하든지, 아니면 크기가 작아야 한다네. 손바닥 크기를 훌쩍 넘는데 냉동이다. 그러면 일단 중국 놈들 거라는 의심부터 하라는 말씀.”

별 시시껄렁한 얘기까지 나누며 양평으로 향했다. 무지무지하게 멀었다. 원주에서 홍천으로 빠져 양평까지 간 후, 서종리로 들어서도 한참을 가야 했다. 진부를 출발해 해 뜨는 집까지 도착하니 사방이 깜깜해지기 직전이었다.

그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침 바로 옆에서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보였다. 이름을 밝히기 힘든 모텔이었다. 불이 꺼진 창문이 꽤 보였다.

혼자 올라가 달랑 방 하나만 잡은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잡고 해 뜨는 집으로 향했다.

“경아 씨, 그런데 방이 하나밖에 없네요? 어쩌죠?”

“여기도 방이 없어요? 아휴! 어떻게 하지. 지훈 씨,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갑자기 배고픔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해 뜨는 집은 겉보기에 평범한 식당이었다. 다만, 주인이 직접 나와 펄쩍펄쩍 뛰는 쏘가리를 보여 준 후 매운탕을 끓였다. 꽃게와 민물 새우를 비롯해 갖은 해물과 야채로 육수를 내서 그런지, 민물고기 특유의 비린내나 흙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에 쏘가리의 쫄깃하고 단단한 육질이 주는 식감은 민물고기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이었다.

소주는 더 이상 술이 아니었다. 맑디맑은 물에 알코올 몇 방울이 우연히 섞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고경아도 석 잔이나 마셨을 것이다.

휴가 내내 밤마다 취했지만 마음이 편하고, 고경아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피곤이 사라지고 있었다.

길만 건너면 한강이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을 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분위기는 저절로 불타올랐다. 슬며시 주변을 살피던 김지훈이 고경아를 안았다.

버둥거리며 저항하던 고경아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으스러져라 고경아를 안은 김지훈의 숨결이 가빠졌다. 술기운만은 아니라는 것을 고경아가 모를 리 없었다. 여기에 불만 조금 더 지피면 결말은 빤했다.

“경아 씨, 나 다음 주에 구미 가면 언제 또 보죠? 4년차가 손을 놓아서 전공의가 세 명뿐이라 주말 오프도 몇 번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은 천안이네. 경아 씨, 나 경아 씨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살죠?”

“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해요.”

새침을 떨면서도 김지훈의 품에 꼭 안겼다.

“오프를 받는 대로 올라올게요. 경아 씨, 사랑해요.”

달콤한 말을 던지며 고경아를 잡아끌던 김지훈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눈만 말똥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매직이라서 옆에 올 생각도 하지 말라니요? 매직이 뭔데?”

“한 달에 한 번 여자만이 걸리는 마술이요.”

음! 이게 무슨 소릴까?

그러니까 그게 그런 뜻이었다.

김지훈이 탄식을 터트리다 말고 허탈하게 웃었다.

어우우우!

어디선가 구슬픈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고경희에게 당당히 4박 5일 동안 김지훈과 여행을 떠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고경아도 그놈의 매직을 믿고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여행을 즐겼을 것이다.

순간 묘한 감정이 든 김지훈이 고경아를 째려보았다.

“근데 이불은 왜 쌓았어요?”

“그럼 지훈 씨한테 자는 모습을 막 보이란 말이에요?”

“아니, 우리 사이에 그것도 못 보여 주나. 에휴! 참!”

“그게 아니라, 그냥 막 덤비면…….”

고경아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에 자꾸 웃음만 나왔다. 혼자 별 상상을 다 하며 아등바등 틈만 노렸던 것이 우습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경아의 말도, 얼굴도, 마음도 예쁘기만 했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잔잔한 강물이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두 사람을 감싸 주었다. 시원한 맥주와 향긋한 커피 냄새가 퍼졌다.

손만 잡고 잤다. 물론 입술도 잠시 접촉을 하긴 했다. 그 이상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 때문인지, 고경아의 잠든 얼굴 때문인지 김지훈이 밤새 뒤척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양수리로 건너갔다. 능내역 근처 시골 보리밥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봉주르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정훈철 가족을 만났다. 항상 친동생처럼 반겨 주는 정훈철과 한수임에게 고마웠고,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승희를 보며 깜짝 놀랐다.

“자주 좀 연락해, 인마.”

정훈철의 말에 머리만 긁적여야 했다.

휴가가 그렇게 끝을 보이고 있었다. 4박 5일 동안 함께 있었는데도 고경아를 집으로 들여보내는 게 쉽지 않았다. 집 앞에서 한참을 함께 보낸 후에야 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히힛! 그래도 입술까지는 프리 패스네. 그럼 다음은?’

긍정의 힘!

그건 어디에서나 위력적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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