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휴가 Ⅱ (1)
어쨌든 주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빤했다. 자려면 돈 다 주고 자거나, 아니면 말라는 말이었다. 휴가철에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이것저것 가릴 것 없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고경아가 살짝 팔을 잡아당겼다.
“아저씨, 어차피 이 시간에는 올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깎아 주세요. 사실 울진에 친척분이 계셔서 거기까지 가면 되는데, 이 사람이 너무 피곤해해서 들른 거예요.”
주인이 잠시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8만 원을 불렀다. 고경아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5만 원을 불렀다. 오늘 들렀던 여관들이 받았던 휴가철 시세보다 만 원 정도 쌌다.
고경아가 곤란하다는 주인과 옥신각신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6만 원에 합의를 봤다.
김지훈이 새삼 고경아를 다시 보았다.
‘야! 생각보다 당찬 면이 있네. 생활력이 강한 건가?’
“경아 씨, 그런데 정말 울진에 친척분이 사세요?”
“울진이요? 저도 이름만 들어 봤어요.”
대단하다. 어쨌든 고경아의 활약 덕분에 잠자리를 싸게 마련했다. 김지훈이었다면 두말하지 않고 10만 원을 냈을 것이다.
여관으로 오는 동안 회를 파는 좌판이 있는 것도 보았다. 몸은 상당히 피곤했지만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 어느 정도는 풀릴 것이다.
김지훈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고경아의 가방을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는 순간 몸이 저절로 굳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엠티 방이라더니 이건 열차 방이었다. 길어도 이렇게 길 수가 없었다. 욕실과 반대편에 놓인 TV까지 최소 칠팔 미터는 되어 보였다. 이불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방이 좁긴 한데, 이건 도대체 뭐냐!’
고경아가 멍하게 서 있는 김지훈을 재촉했다.
“난 잠깐 차에 있을 테니까 빨리 씻어요.”
세상일은 누구도 모른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부리나케 씻고 나온 김지훈이 좌판을 찾았다. 할머니 한 분이 빨간 대야 앞에 앉아 회를 팔고 있었다. 큰 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고 모두 자잘했다.
그냥 퉁 쳐서 남은 고기가 모두 8만 원이란다.
“예? 그런데 이게 한 접시가 넘게 나와요?”
“그럼 나오지. 딱 세꼬시로 먹기 좋은 것들이야.”
뼈째 먹는 세꼬시는 내키지 않았다. 회로 뜨네 마네 하며 한동안 고민하는 사이 고경아가 왔다.
11시가 훌쩍 넘었다. 참 오래도 씻었다. 바닷바람을 따라 퍼지는 고경아의 향긋한 체취에 피로가 사라지며 기분까지 좋아졌다.
고경아가 가격을 듣고는 바로 할머니와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만 원까지 내려갔다. 엄지를 치켜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싼지, 싼지는 모르지만 회는 꿀이었다.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겨자를 약간 섞은 간장에 회 한 점을 찍어 입에 넣으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것이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큰놈이 아니라 어린놈이라 그렇다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도 남았다. 회가 너무 맛있었던지 고경아도 무려 소주를 세 잔이나 비웠다.
그렇게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얼굴이 뻘게진 채 방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슬슬 눈치를 보았다. 이상하게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먼저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고경아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욕실 쪽에 이불을 깔아 준 고경아가 TV 앞에 자리를 폈다. 은근슬쩍 접근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방 한가운데에 이불 장벽까지 만들어졌다.
실제 거리는 대략 5미터. 그러나 체감 거리는 50미터!
눈물이 났다. 고경아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잘 자요, 지훈 씨.”
피곤한 몸으로 술까지 먹었다. 당연히 잠이 와야 했다. 그런데 눈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졌다.
단연코, 솔직히,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었다. 결코 엉큼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고경아의 숨소리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왜 이불 장벽을 넘고만 싶은 것일까?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가 한참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노는 날은 이상하게 일찍 깬다. 휴가 때는 더더욱 그렇다. 아침 일찍 눈을 뜬 김지훈이 고경아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임원항을 구경했다. 한적한 항구였지만 조그만 해수욕장도 있었고, 항구를 드나드는 배를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다시 출발을 했다. 도로 표지판에 호산이라는 곳이 쓰여 있었다.
‘호산?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어디서 들었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겼다.
“경아 씨, 호산에 잠깐만 들릅시다.”
“왜요? 저기 뭐가 있어요?”
“호산에 학교 다닐 때 친했던 형이 개업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옛날부터 의사 되면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환자들 보면서 살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러더니 정말 인턴 마치고 군대 갔다 와서 바로 개업을 하더라구요. 그게 아마 여길 거예요.”
호산은 정말 작은 항구였다. 항구마다 어김없이 붙어 있는 해수욕장도 없었다. 항구까지 쭉 이어진 단 하나의 큰길을 따라가다 보니 ‘호산 의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대를 지키고 있던 나이가 제법 되어 보이는 간호조무사 한 명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예. 저… 어디가 아파서 온 게 아니라, 혹시 원장님 성함이 박순용인가요?”
“맞는데요. 무슨 일로 오셨죠?”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학교 후배예요. 혹시 원장님 좀 뵐 수 있을까요?”
잠시 후, 원장이 나왔다. 김지훈을 보자마자 입이 쫙 벌어졌다.
“어? 지훈아, 니가 여기 웬일이야?”
“형, 저 휴가예요. 마침 근처를 지나가다가 형이 호산에 개업했다는 말이 생각나더라구요. 혹시나 해서 들렀는데 정말 여기 계셨네요. 야! 이제 원장님이시네요.”
“자식! 들어와, 인마. 커피 한잔하자. 여기가 너무 멀어서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힘든 동넨데 잘됐다. 며칠 자고 가라. 혹시 낚시 좋아해?”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형, 같이 온 사람이 있어요.”
“같이? 누군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예. 저랑 사귀는 사람이에요.”
“뭐? 둘이서 휴가를 온 거야? 니 성격에 그냥 사귀는 건 아닐 테고, 결혼할 생각이야? 가만, 야! 넌 학교 때도 그러더니 여자를 밖에 세워 놓으면 어떻게 하니. 빨리 들어오시라고 해.”
원장실로 들어온 고경아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박순용입니다. 참 아름다우시네. 지훈이, 너 복 받았다. 제수씨, 잠깐만요.”
박순용이 반갑게 웃으며 직접 커피를 내왔다.
“어떻게 여기서 널 보냐. 좋다. 그리고 너 일반 외과 했다는 소리 들었다. 아주 뛰어나다는 칭찬이 자자해. 내가 그럴 줄은 알았는데, 여기까지 소문이 날 줄은 몰랐어.”
고경아가 김지훈보다 더 좋아했다.
한적한 동네답게 오전, 오후에 잠깐씩 바쁠 때 빼고는 환자가 거의 없었다.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환자 한 명이 왔다. 이마가 찢어진 환자였다. 단골 환자기 때문인지, 아니면 박순용의 성품이 그런지 오가는 말투가 참 정겨웠다.
“아버님, 조심 좀 하지. 이게 뭐야. 많이도 찢어졌네.”
“아이고! 어지러워서 그랬어. 얼마나 어지러운지 잠깐 깜빡했는데 이마가 찢어져 있더라구. 빨리 꿰매 줘. 지금도 어지러워 죽겠어.”
간호사에게 수처 준비를 하라고 하던 박순용이 가만히 환자를 보다 말고 뜻밖의 말을 했다.
“아버님, 참 재수도 좋네. 서울에서 아주 실력 있는 의사가 내 후밴데, 오늘 마침 여기에 왔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셔. 아주 그냥 흉 하나 생기지 않게 잘 꿰매 줄 거예요.”
머뭇거리는 김지훈의 등을 억지로 떠민 박순용이 니들 홀더를 건넸다. 마치 그동안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이제 수처는 자신이 넘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더구나 선배의 환자였다. 김지훈이 최선을 다해 꿰맸다.
마지막 처치를 마치고 나온 박순용이 감탄을 했다.
“야! 깔끔하네. 역시 김지훈이야. 가끔은 수련을 다시 할까 생각을 했었는데, 널 보니까 오늘은 그 생각이 더 심해지네. 가벼운 질환만 보지만, 그 와중에 잘 모르는 환자들이 종종 있거든. 여기는 상의할 사람도 없어서 불안하기도 해.”
“정말 그게 문제겠네요. 그래도 119는 있죠? 입구에 소방서는 있던데.”
“그럼, 인마. 이 자식이 아주 호산을 깡촌으로 보네.”
“아이! 형, 그럴 리가 있어요.”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환자가 간다는 말을 했다. 박순용이 밖으로 나가 환자를 배웅했다. 작은 마을이기 때문이 아니라 박순용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습관적으로 따라 나간 김지훈이 미소를 짓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의 걷는 모습이 이상했다. 김지훈이 박순용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 저 환자 걷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요?”
“어지럽다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비틀거리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박순용이 김지훈의 어깨를 잡으며 의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형, 죄송해요. 잠깐 테스트 좀 할게요. 아버님, 잠시만요.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걸어와 보시겠어요?”
“어지러워 죽겠는데, 왜 그러셔?”
“혈압 좀 다시 재려고요. 일단 들어와 보세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한 의사였다. 환자가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자꾸 오른쪽으로만 쏠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안으로 들어왔다.
김지훈이 혈압을 직접 쟀다. 180에 90이었다.
“형, 이분 원래 혈압 약 먹나요?”
“응. 아까는 다쳐서 그런지 150까지 올라가긴 했는데, 평소에는 조절 잘되시는 분이야. 왜 이렇게 혈압이 올라갔지?”
고혈압을 앓고 있는 환자가 심한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단순히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만 몸이 쏠렸다. 지금은 혈압까지 치솟고 있었다.
“형, 뇌경색(중풍)일 수도 있겠어요. 아버님, 두 손으로 제 손가락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꽉 쥐어 보세요.”
왼손은 단단히 손가락을 잡고 있는 반면, 오른손은 힘이 빠져 손가락이 쉽게 빠졌다. 이것저것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며 다시 반복했다. 우측 팔다리의 힘이 약화된 것이 확실했다.
김지훈이 상당히 신중한 태도로 환자를 보자 박순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정말 뇌경색 같아?”
“오른쪽 힘이 확실하게 약해졌어요. 심한 어지러움에 혈압까지 치솟았고, 제가 듣기에는 말도 좀 어눌하게 하는 것 같아요. 일단 119 불러서 최대한 빨리 큰 병원으로 이송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박순용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김지훈이 말한 증세는 모두 뇌경색을 시사하는 소견이었다.
“알았어. 난 119에 연락할 테니까 필요한 처치 좀 해 줘.”
“지금 상황에서 다른 처치가 있나요. 이런 경우 혈압 조절은 하지 않으니까 수액만 하나 잡고 빨리 이송하는 게 최선이에요. 그런데 형, 막힌 혈관을 뚫을 수 있는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이 있어요?”
“강릉까지 가야지.”
“강릉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낮 시간이니까 빨리 도착할 거야. 시골이 그런 점에서는 문제가 크긴 하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
박순용이 급히 보호자들에게 연락을 했다.
작은 동네였던 덕분에 119가 도착한 직후 보호자까지 왔다. 환자 상황을 설명하자 당황한 보호자들이 눈만 멀뚱거렸다. 그러나 평소 많은 신뢰를 쌓았는지 곧 수긍을 했다.
신속하게 환자를 태운 앰뷸런스가 요란한 경광등 소리를 내며 강릉으로 향했다. 앰뷸런스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박순용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난 왜 뇌경색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의심하지도 못했지? 인턴 수련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겠지. 지훈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일반 외과를 한 덕에 신경외과 문제도 잘 잡아낸 건가?’
뇌경색은 증상 발현부터 치료까지의 시간이 환자의 예후를 결정했다. 한두 시간 내에 적절한 처치를 받는다면 생각 이상으로 훨씬 양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런 후유증이 남지 않기도 했다.
따라서 환자를 처음 본 의사의 정확한 판단이 무척 중요한 질환이었다. 그런데 박순용은 김지훈이 말하기 전까지는 뇌경색을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환자 한 명을 치명적인 상황에 빠트릴 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