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03화 (303/1,329)

제1화 휴가 Ⅰ (2)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순간 김지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빨간 후미 등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청주에서는 대전으로 내려가 중부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훨씬 빨랐을 것이다. 안 밀릴 만한 길을 모르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그러나 연인들에게는 이마저도 좋았다. 청주에 혹까지 떨어트려 놓고 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꼭 잡고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음이 완전히 들떠 피로를 느낄 사이도 없었다.

하지만 누차 강조했듯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호법을 지나 이천쯤 가자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밤하늘이 이상하게 어두컴컴했다.

김지훈이 달빛조차 사라진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비 오면 정말 곤란한데.”

고경아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길은 뚫려서 다행인데, 비가 오면 어쩌지?’

왜 불길한 예감은 꼭 맞는 걸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두두둑! 두두두둑!

그냥 비가 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차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돌려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연료 눈금 옆에 빨간 불까지 켜졌다.

“어? 기름이 떨어졌네.”

이렇게 비가 오는데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차가 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지훈은 물론 고경아까지 사색이 됐다.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말했다.

“경아 씨, 지도책 보고 휴게실이 얼마나 남았는지 찾아봐요. 가까운 데 있어야 하는데 큰일 났네.”

고경아가 어지러운 선만 가득한 지도책을 편 채 끙끙거렸다. 그래도 원주나 이천이라는 지명은 알고 있었던 덕에 영동고속도로를 찾아냈다. 그러고도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휴게실을 찾았는지 자신 있게 외쳤다.

“앞으로 삼사 센티 정도만 더 가면 돼요.”

“삼사 센티?”

어휴!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답답하기는커녕 예뻤다. 실수를 깨달은 고경아가 얼굴이 빨개진 채 웃는 모습은 더 예뻤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지 피식 웃은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예쁜 경아 씨를 고속도로에서 자게 할 수는 없지.’

실제 거리가 얼마인지 계산할 이유도 없었다. 빨간 불이 들어왔을 때는 빨리 기름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문막 톨게이트가 나왔다. 망설이지 않고 문막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비는 양동이로 붓는 것처럼 쏟아지고, 밤도 늦었다. 게다가 국도를 달려 더욱 운전이 힘든데, 문을 연 주유소까지 보이지 않았다. 잘못하면 꼼짝없이 길에서 발이 묶일 판이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김지훈이 눈을 크게 뜨고 불이 켜진 주유소 간판을 찾았다.

‘기름 떨어지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첫날부터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되는데. 제발! 주유소야! 나와라. 문 좀 열고 있어라.’

기름이 없다고 알려 주는 빨간 경고등이 유난히 빨갛게 보였다. 그때 멀리 환하게 불을 밝힌 주유소 간판이 보였다.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유소로 들어섰다.

“아저씨, 가득 넣어 주세요. 어휴! 하마터면 길에서 설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고속도로에서 빨간불이 탁 켜져서 이쪽 길로 들어왔는데, 문을 연 주유소가 없더라구요.”

“휴가철이라고 해도 이 시간에는 원래 국도로 차가 잘 안 다녀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더 없죠. 그런데 어디서 불이 들어왔기에 이렇게 불안해해요?”

“다행히 문막 들어오기 직전에 켜지더라구요.”

주유소 직원이 피식 웃었다. 마치 한심하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옆에 고경아가 있어 남자 체면은 살려 주려는지 나직하게 말했다.

“경고등 켜져도 삼사십 킬로는 더 가요. 그러니까 여유 있게 대처해도 돼요. 괜히 지금처럼 초조해하다가 사고만 난다니까. 하긴 초보자 때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긴 하죠.”

이런! 초보자 티가 확확 났다. 그래도 고경아가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쩝쩝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기름값을 냈다. 60리터도 다 안 들어갔는데 무려 2만 4천 원이나 나왔다.

“에이! 기름값 무지하게 비싸네.”

국도를 따라 고경아의 고향인 원주까지 달렸다. 여자들의 경우 길치가 제법 많은데 고경아는 의외로 환하게 길을 알고 있었다. 빗줄기까지 점점 약해져 운전도 수월했다.

다시 고속도로로 나가자 길이 뻥 뚫려 있었다. 기분 좋게 강릉을 향해 달렸다. 딱 원주에서 새말까지 20분 정도만 말이다.

고난의 시간이 다시 시작됐다. 길인지 주차장인지 분간하기도 힘들게 차가 밀렸다. 혼자였다면 짜증이 나 미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고경아의 목소리와 손의 온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밤 12시가 넘었다. 근 12시간을 넘게 운전했다. 초보 운전인 김지훈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피곤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잠이 몰려왔다.

결국 어디쯤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서야 했다. 정말 휴가 첫날부터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아 씨, 도저히 안 되겠네. 잠깐 눈 좀 붙이고 갑시다.”

졸음운전만큼 위험한 것도 없었다. 고경희 때문에 운전도 너무 오래했다. 고경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폭은 넓은 갓길에 주차를 한 후, 눈을 감은 김지훈이 이내 코를 골았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다급하게 어깨를 흔드는 감촉에 눈을 떴다.

“지훈 씨, 왜 이렇게 안 일어나요? 빨리 휴게소로 가요.”

“어? 경아 씨, 왜요?”

“그냥 묻지 말고 빨리 가요, 빨리.”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행히 다시 길이 뚫려 쌩쌩 달리고 있었지만 고경아가 이를 악문 채 원망만 했다.

“그렇게 깨워도 눈을 못 뜨는 사람이 환자 볼 때는 어떻게 눈을 떴어요? 정말! 아! 빨리 좀 가요.”

고경아의 얼굴이 점점 뻘게졌다. 한참을 달리자 진부가 나왔다. 고경아가 거의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아랫배를 잡았다. 이유는 말도 안 하고 빨리빨리만 외쳤다.

열심히 밟아 댄 끝에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급히 차에서 내린 고경아가 화장실로 직행했다. 입도 열지 못했고, 발걸음까지 불안했다. 이제야 상황을 안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이마를 탁탁 쳤다.

‘어후! 미안해서 어쩌지.’

남자는 소변이 마려워도 꽤 버틴다. 하지만 여자에겐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해부학적 구조가 이유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급한 불을 끈 고경아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그러나 김지훈을 보자마자 도끼눈을 떴다. 민망한 마음에 밥부터 먹자고 했다가 호되게 혼났다.

“지금 밥 먹자는 소리가 나와요? 이 와중에도 지훈 씨는 밥 먹을 생각만 해요? 내 생각은 왜 안 해요? 어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몇 번이나 깨웠는데.”

그냥 길에서 해결하면 되지 않았겠냐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정말 그 말을 했다가는 초상이 날 일이었다. 입을 꽉 다문 김지훈이 고경아의 폭풍 공세를 묵묵히 견뎌 냈다.

한참 동안 눈을 흘기던 고경아가 이제야 분이 풀렸는지 김지훈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심지어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어느새 김지훈의 마음도 포근해졌다.

여자는 요물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럼 남자는 갈대?

“우리 밥부터 먹어요.”

“이젠 화가 풀린 거죠? 미안해요.”

고경아가 새침을 떨며 코웃음을 쳤다.

간단하게 우동으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지훈이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와! 대관령! 이게 길이야? 뭔 놈의 길을 이렇게 만들었어.’

흔히 아흔아홉구비라고 불리는 대관령을 초보가 넘자니 보통 긴장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경아가 그 마음도 모르는지 탄성을 터트렸다.

“지훈 씨, 바다예요. 어머! 이 길이 이렇게 예뻤나?”

바다고 뭐고 눈을 돌릴 수가 있어야 볼 일이었다. 그저 앞만 보고 급커브를 돌면서 남모를 식은땀만 흘려야 했다.

두 번째 날의 시작도 왠지 좋지 않았다.

경포대에 도착했지만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고경아와 오붓하게 모래사장에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막바지 휴가를 맞아 온 동네 사람이 다 왔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경아는 사람이 많아도 좋다고 했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참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잠시 바다를 보며 맥주 한 캔을 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원래 계획하지 않았던 동해행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할 새도 없었다. 김지훈이 경포대 입구에 서 있는 대형 관광 간판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로 가지? 북쪽? 아니, 남쪽?’

어디로 가든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김지훈의 눈에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무릉계곡!

무릉도원의 무릉이라는 단어를 따왔을 정도라면 경치가 좋다는 것은 확실했다.

“경아 씨, 계곡 갈까요? 무릉계곡 어때요.”

“무릉계곡이요? 지훈 씨가 알아서 하세요.”

‘지훈 씨, 난 어딜 가든 지훈 씨만 옆에 있으면 돼요.’

차에서만 열 몇 시간을 넘게 보냈다. 운전하는 것만큼 힘들었을 고경아의 눈에 행복이 감돌았다. 팔짱을 낀 채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러나 김지훈에겐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제는 휴가다운 휴가를 즐겨야 할 때였다. 반드시 고경아를 감동시킬 만한 곳으로 가야 했다. 감동이 있어야 역사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김지훈은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본능적인 감각일 뿐이었다.

‘제발 이름값만 해 다오.’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백사장이 정말 아름다웠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어제부터 쭉 잡고 있었던 손인데도 이 순간은 정말 행복하기만 했다.

무릉계곡에 도착했다. 관리 사무소를 얼마 지나지 않아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무릉대반, 혹은 무릉반석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도 멋있었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이 장관이었다. 어젯밤 쏟아진 비로 불어난 물이 용울음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흐르고 있었다.

“와! 대단하네. 경아 씨, 정말 멋있죠?”

“난 무서워요. 저 물에 휩쓸리면 어떻게 해요.”

“뭘 그런 걸 걱정을 해요. 내가 당연히 구해 주지.”

“정말요? 에이! 설마.”

“어허! 이 사람이 날 뭘로 보고. 경아 씨, 난 그냥 믿으면 되는 사람이야. 왜 이래.”

고경아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는 안전한 곳을 따라 난 등산로를 걷던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누가 저렇게 바위에다가 글씨를 새겼대. 글자 크기도 엄청 크네. 자연을 사랑해야지 말이야. 한문에 한글까지 있는 걸 보니까 옛날 사람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네.”

그중에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한 명인 양사언의 석각과 매당 김시습의 시까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이었다. 고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네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30분 정도 올라가자 목적지가 보였다. 쌍폭 앞에 있는 간이 휴게소였다. 산이나 계곡을 타려고 온 휴가가 아닌 이상, 커피 한잔할 수 있는 이곳이 딱 적당한 곳이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씩 들고 휴게소 뒤편에 있는 쌍폭으로 향했다.

쩍 입이 벌어졌다.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두 개의 폭포가 엄청난 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지난밤에 그렇게도 고생을 하게 했던 폭우 덕이었다. 무릉계곡에 온 보람이 있었다.

“우와! 멋있다. 죽여주네.”

감탄을 터트리며 호들갑을 떨다 보니 슬슬 배 속이 아우성을 쳤다. 어느 관광지에나 다 있는 관광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시장이 반찬인데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다시 남행을 시작했다. 삼척에 있는 촛대바위를 구경했다. 무릉계곡에 이어 또 한 번의 성공이었다.

“생각보다 멋있는 데가 많네요. 여기도 좋죠?”

“정말 좋네요.”

촛대처럼 생긴 기이하고 절묘한 모양의 바위와 파도가 칠 때마다 바위를 타고 오르는 하얀 포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말로만!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동해에 왔으니까 일단 저녁은 회로 먹어 줘야지. 술도 먹어야 하니까 일단 오늘 밤 잘 곳부터 먼저 정하자. 어디로 가나. 그나저나 경아 씨가 술 좀 먹어야 되는데.’

김지훈이 슬쩍 고경아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적한 곳도 좋지만 밤에는 다소 번잡한 곳이 기분이 더 날 것이다. 국도를 따라 내려가며 해수욕장이 보이는 데로 들어갔다. 그런데 모텔은 물론 민박집에도 방이 없었다. 게다가 길이 또 밀리기 시작했다. 절로 비명이 터졌다.

“으아! 또 밀린다.”

결국 밤 10시가 넘어서야 생판 처음 보는 임원이라는 곳까지 내려왔다. 어깨가 뻐근하고, 허리까지 아팠다. 도대체 운전만 몇 시간을 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환자 킵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경아 씨, 일단 여기로 들어갑시다. 제길! 여기도 방이 없으면 어떻게 하죠?”

고경아가 말을 잃었다. 하루는 대충 씻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틀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김지훈 탓도 아니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임원 읍내로 들어간 김지훈이 열심히 여관을 찾았다.

방이 있단다. 귀가 번쩍 뜨일 말이었다. 그런데!

“있긴 있는데 엠티(MT) 방만 남았어. 어떻게 둘만 받아. 최소한 십만 원 이상은 받아야 하는 방이라구.”

엠티 방?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넓은 방이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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