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휴가 Ⅰ (1)
자! 이제 휴가 시작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고경아와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다. 흥에 들떠 신 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밤 8시였다. 아직 초저녁이었다. 그런데 준비할 것이 많다며 고경아가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냥 간단하게 가면 되지. 무슨 준비를 벌써부터 해요?”
“어머머! 지훈 씨는 아직도 한참 더 배워야 돼요.”
“뭘 더 배워야 하는데.”
김지훈의 말이 언제부턴가 짧아지고 있었다. 고경아가 슬쩍 눈을 흘기면서도 별말 없이 내일 아침 9시에 만나자고 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이제야 오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준비할 게 뭐가 있다고 벌써 들어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던 김지훈이 필요한 것을 준비했다. 정말 단 하나의 모자람도 없이 완벽했다.
돈과 지도책, 그리고 칫솔 하나!
차까지 있는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병원에 들어선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이준영 과장의 당직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최소한 스승에게 인사는 하고 휴가를 갈 일이었다.
노크를 하고 당직실에 들어서는 김지훈을 힐끗 쳐다본 이준영 과장이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여기 웬일이야? 휴가 아냐?”
“예.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잘 다녀와. 가 봐.”
김지훈이 슬며시 이준영 과장의 표정을 살폈다. 말투나 목소리는 확실히 예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직은 우울하고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전 주보다는 표정이 좋아지신 것 같긴 한데, 영 느낌이 안 좋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그냥 철판 깔고 물어볼까?’
김지훈이 머뭇거리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제야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돌리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혁원이도 저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혁원아, 아버지가 준 상처가 너무 크지만 잘 헤쳐 나갔으면 좋겠다. 날 용서했다고 엄마까지 절대 원망해서는 안 돼.’
아내와 자식은 달랐다. 아버지와 자식이었기에 훨씬 더 서로를 아프게 할지도 몰랐다. 고작 며칠 만에 사라질 수 있는 아픔도 아니었다. 어쩌면 증오와 원망 속에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김지훈을 볼 날도 2주밖에 남지 않았다. 휴가와 세계 학회를 빼면 사나흘에 불과할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꽤나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누구하고 수술을 하나? 지훈이만 전공의가 아닌데, 나도 참 문제네.’
자식만큼 정이 가는 놈이 바로 김지훈이었다.
피식 웃으며 돌아서던 이준영 과장이 콧등을 찡그렸다. 탁자 위에 놓인 냉커피 하나가 보였다. 참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후텁지근했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했고,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은근한 기대와 흥분을 느끼며 엑셀 앞에 서서 고경아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고경아가 낑낑대며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남들이 보면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줄 알 것 같았다. 게다가 혹 하나가 달랑달랑 붙어 있었다. 후다닥 달려간 김지훈이 가방을 받으며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경희야, 너 웬일이야?”
“어머? 불안해서 왔죠. 오빠를 어떻게 믿어요?”
설마 정직하게 다 털어놓았단 말인가?
고경아가 한숨을 쉬었다.
“경희가 친구 만나러 간다고 청주까지 데려다 달래요. 그리고 경희 허락 없으면 저 휴가 못 가요.”
대충 감이 왔다. 휴가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지 않으려면 고경희의 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4박 5일이었다. 한집에 사는데 딱히 핑계를 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후! 그냥 양수리 근처까지만 조심조심 다니려고 했는데 청주라니, 고속도로는 타 본 적이 없는데 큰일 났네.’
사나이 체면에 차까지 있는데 운전을 잘 못한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존심과 안전 사이에서 고민하던 김지훈이 젊은이의 무모함을 따랐다.
“경희야, 걱정하지 마. 데려다줄게.”
“오빠 덕에 편히 가겠네요.”
좋다고 차를 타는 고경희를 보며 김지훈이 각오를 다졌다. 운전이든 뭐든 조심해야 하는 만큼의 자신감이 없으면 문제가 생긴다. 어차피 버스는 떠났다. 부딪쳐 볼 일이었다.
아! 천만다행이었다. 고속도로가 아침부터 난리가 났다. 막판 휴가를 떠나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서울시에 있는 차들이 다 몰려나온 것 같았다. 게다가 버스 전용 차로가 생기면서 도로를 가득 메운 승용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가도 가도 여전히 서울이었다.
“아! 차 무지하게 많네. 고속도로에서는 팍팍 달려 줘야 하는데, 이래서 언제 청주까지 가지?”
“뒤늦게 휴가 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지훈 씨, 피곤해서 어떻게 해요.”
“피곤하긴. 내가 달리나? 차가 달리지.”
여유만만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다들 즐겁게 떠들며 웃었다. 톨게이트를 지나 천안 근처까지 갔을 때만 해도 그랬다.
오후 2시였다. 점점 말이 없어졌다. 하품하는 소리까지 났다.
“으아! 아직도 차가 저렇게 많네.”
완전히 지쳤다. 천하의 먹보인 김지훈에겐 배고픔이라는 참을 수 없는 고통까지 닥쳤다. 전용 차로로 씽씽 달리는 버스를 보며 입맛만 다셨다.
버스가 얼마나 편한 수단인지 왜 미처 몰랐을까?
부우웅! 끽! 부르릉! 끽!
천안을 넘어서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차량 행렬과 청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김지훈을 강한 유혹에 빠트렸다.
유일하게 차가 밀리지 않는 차선.
아무리 운전이 미숙해도 속도만 무서워하지 않으면 청주까지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까짓것 액셀은 밟으면 되는 거고, 벌금이 얼마라고 했더라. 십오만 원이었나. 이십만 원인가? 그냥 확 전용 차로로 달리고 걸리면 벌금을 물어? 아니지. 청주까지 가서 이걸 어떻게 다시 끼어들어?’
갈등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섰지만, 바짝 붙어 있는 차들 사이로 끼어들 자신이 서질 않았다.
잠시 주저하는 새 백미러로 버스 전용 차선을 달리는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경아 씨, 버스 전용 차로를 달리는 차가 있네요.”
“어머! 그거 불법 아니에요? TV에서 보니까 벌금도 엄청 비싸던데.”
“비싸죠. 에휴! 우리도 그냥 전용 차로로…….”
막 말을 이으려는 순간, 줄지어 밀려 있는 차들의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주먹을 쥔 손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러고는 누군가 신호라도 준 것처럼 동시에 가운뎃손가락을 쭉 폈다.
바아아앙! 휘이익!
바람을 일으키며 전용 차로 위반 차량이 휙 스쳐 나갔다.
운전석 창문이 끊임없이 열렸다. 가운뎃손가락의 향연이 벌어졌다.
“저 차 운전하는 사람, 정말 오래 살겠네.”
전용 차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결국 청주 톨게이트를 무려 오후 4시가 돼서야 통과했다. 김지훈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밀리던 고속도로가 청주를 지나면서 시원하게 뚫린 것이다.
‘아! 정말 이게 뭔 일일까?’
목적지는 청주 터미널이었다. 청주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지쳤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고경아가 감탄을 터트렸지만 함부로 고개를 돌릴 수 없는 김지훈에게는 누릴 수 없는 호사일 뿐이었다.
초행길이었다. 청주 터미널에 가까워질수록 차가 점점 많아졌다. 오토가 아니었다면 진땀을 흘리는 정도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어쨌든 터미널에 도착했고, 주차까지 마쳤다.
“어후! 길을 모르니까 운전하기 되게 힘들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라고 하던데, 교통질서를 영 안 지키네.”
애꿎은 청주 시민들을 탓한 김지훈이 어깨를 주무르는 척하며 슬며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고경아의 눈치를 보니 약간은 불안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김지훈의 말을 믿는 것 같기도 했다.
차에서 내린 고경희가 환하게 웃으며 친구와 만났다.
“오빠, 제 친구예요.”
장래 처제가 될 고경희의 친구였다. 무조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청주까지 7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은 가슴속에 고이 묻어야 했다.
고경아도 잘 아는 사이인지 여자들 특유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김지훈이 가장 원하고 있던 말을 했다.
“지훈 씨, 점심도 못 먹었는데 우리 밥 먹고 가요.”
“와!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근처에 맛있는 집이 있나?”
“속리산 입구에 백숙 잘하는 집이 있대요. 음성에서 정말 맛있게 먹어서 지금도 기억이 나요. 우리 백숙 먹으러 가요.”
“속리산 입구요?”
어라? 믿었던 고경아가 폭탄을 던졌다.
잠시 입을 열지 못하던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책에서 속리산을 찾았다. 대충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은 왔지만 내심 막막했다.
‘힘내자. 차까지 샀는데 국도를 두려워하면 안 되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아주 끝을 보자. 제길! 밥은 또 언제 먹냐. 이러다 어지러워서 쓰러지는 거 아냐?’
운전을 잘하려면 경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었다.
속리산을 향해 달렸다. 휴가를 떠난 것인지, 하루 종일 운전 연습을 하려고 나온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고경아가 빵과 우유를 사 와 심각한 고통은 조금 면했다.
오후 6시가 훌쩍 넘어 작은 계곡 옆에 자리한 백숙집에 도착했다. 배가 등짝에 붙은 김지훈이 가공할 식욕을 보였다. 닭 한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한 마리를 놓고 사이좋게 나눠 먹던 여인 셋이 입만 멍하니 벌렸다. 자신들이 남긴 닭까지 깔끔하게 해치운 김지훈이 딸려 나온 죽을 바닥이 보일 정도로 퍼먹고 있었다.
“오빠, 아까 빵 두 개하고 우유 하나 먹었잖아요? 그게 다 들어갈 배가 있어요?”
“경희야, 그건 간식이고 이건 저녁이잖아.”
꺽꺽거리며 배를 두드린 김지훈이 오늘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등 따습고 배가 불러야 사람은 행복한 모양이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질 수는 없었다.
“맥주 딱 한 잔만 합시다. 나머지는 알아서들 드세요.”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맥주를 마신 김지훈이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슬슬 눈이 감겼다. 여인들의 수다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지훈 씨, 일어나세요. 지훈 씨.”
고경아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여름밤이 찾아와 있었다. 현금으로 계산을 하고 다시 청주로 향했다. 야간 운전이었지만 차도 없는 데다 손일석과 밤에만 나와서 그런지 도리어 편안했다. 시간이 지나며 슬슬 어깨에 긴장도 조금은 풀리고 있었다.
고경희와 친구를 내려 준 후, 차에 앉아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을 했다. 청주까지 와서 그런지 양수리를 가고 깊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운전에 대한 성급한 자신감까지 붙었다.
‘내가 운전에 상당히 소질이 있었네. 좋아. 이 정도면.’
휴가의 정수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바다였다. 바다는 여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들뜬 여인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법이었다. 그러나 김지훈은 결코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남자의 본능을 비켜 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경아 씨, 바다 보러 갑시다.”
“바다요? 좋죠. 동해로 가요?”
고경아가 반색을 했다. 게다가 목소리가 너무 여유로웠다. 그 정도로 김지훈을 믿는 것일까? 속마음이 어떤지 모르지만 김지훈에게는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집이 원준데 동해 많이 가 보지 않았어요?”
“원주에서 바다까지 가려면 꽤 멀어요. 저도 몇 번 못 가 봤어요. 그리고 바다하면 서해보다는 동해죠. 지훈 씨,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가요. 동해로 출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좋아 어쩔 줄은 모르는 고경아를 보며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뭔가 일이 잘될 것 같은 예감이 충만했다. 출발도 좋았다. 신갈 근처까지 쌩쌩 잘도 달렸다.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