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다시 달리자 (3)
나름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지훈이 응급 수술을 마치고 나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분명 이준영 과장에게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이러신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좀처럼 얼굴을 펴질 못하시네.’
신경이 무지하게 쓰였지만 함부로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김지훈을 빼고는 누구도 이준영 과장의 변화를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미세한 변화였고, 일상적인 업무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김지훈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
그렇게 한 주가 가고, 마침내 한대현의 퇴원이 결정됐다.
참 많은 것을 배우게 한 환자였다. 미지의 질환을 앞에 둔 의사의 한계를 절감했고, 삶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도 가슴 깊이 깨달았다.
퇴원 준비를 하는 한철수를 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문득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장민수가 생각난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지내겠지. 이 환자도 무사히 퇴원을 해서 기쁘지만, 병원비가 많이 나왔을 텐데 걱정이네.’
한철수가 걱정이 가득한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얼굴이 안 좋으시네요. 혹시 우리 대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마침 한대현이 잠시 병실을 비운 참이었다. 병원비 문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무척 껄끄러운 문제였다. 어쩌면 한 집안의 가장인 한철수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혹시 도움이 될 일이라도 있을지 하는 생각에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버님, 병원비가 많이 나왔죠? 제가 좀 더 빨리 치료했으면 부담이 덜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한철수가 웃었다. 의외로 편안해 보였다.
“많이 나왔죠. 하지만 더 크고 소중한 걸 얻었어요. 그동안 집 한 채 장만해 보겠다고, 자식 용돈까지 줄여 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아들을 공사장으로 내몰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맞는 소리겠죠. 그런데 막상 대현이가 다치고 보니,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돈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허탈하면서도 후련한 한숨 소리가 터졌다.
“가족이 없으면 돈이고 집이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직은 직장이 있고, 내 몸도 건강하니까 열심히 일하면서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어요. 선생님들 덕분에 정말 소중한 제 아들과 함께 집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이었다. 오랜 시간 모은 돈이겠지만 아들의 목숨과 바꿨다면 정말 제대로 쓴 돈일 것이다. 한철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름답게 보였다.
한대현이 어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환자복 대신 청바지에 티를 입고 있었다. 아직은 비쩍 마른 상태였지만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젊음의 활기까지 느껴졌다.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선 한철수가 고맙다는 말만 했다.
“아버님, 도리어 제가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하여튼 다행이네요. 아드님이 퇴원을 한 덕분에 마음 놓고 휴가를 갈 수 있게 됐거든요. 까딱하면 못 갈 뻔했습니다. 대현 씨, 고마워요.”
한대현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짐을 싸 들고 스테이션으로 나가자 이준영 과장이 퇴근도 미루고 한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철수가 아들과 함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준영 과장도 함께 인사를 하며 한대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는 이혁민 교수가 잘 봐드릴 겁니다. 한 대현, 그때 혹시 시간 나면 내 얼굴 보러 와.”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가족들을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동안 들인 노력과 땀방울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짧은 헤어짐이었다. 하지만 병원과의 이별은 짧을수록 좋았다.
한대현이 퇴원한 날, 손일석과 최철한이 휴가를 갔다.
이준영 과장도 마음 놓고 휴가를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안색이 좋지 못했다. 몹시 피곤한 얼굴에 지친 기색까지 보였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체력이 못 따라오시는 건가? 최근에 너무 지쳐 보이시네. 큰 걱정거리가 있으신 것 같기도 하고. 후우! 스승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푹 쉬고 오십시오. 그리고 전처럼 활활 태워 주셔야 합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사정없이 탈 때가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별다른 말도 없이 수술을 마치고 나가는 이준영 과장을 볼 때마다 도리어 불안하고, 걱정만 앞섰었다.
‘제길! 타도 걱정, 안 타도 걱정이네.’
한동안 이준영 과장을 걱정하던 김지훈이 책을 펼쳤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주를 준비했다.
금경태 과장의 수술 역시 배울 것이 엄청나게 많았다. 책과 수술 기록지를 다시 보며 이론적인 부분을 상기했다. 가운 속에서 잠자고 있던 수술 기구들을 오래간만에 꺼내 들고 양손을 쓰는 법을 연습했다. 생각난 김에 논문까지 끄적거렸다. 해야 할 일이 참 많기도 했다.
휴가를 간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월요일 아침부터 바빴다. 정신없이 병동 일을 끝내고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금경태 과장이 한창 복강경 수술을 하고 있었다.
Laparoscopic Cholecystectomy
(복강경을 이용한 담낭 절제술)
‘아직도 첫 라파로가 안 끝났네. 잘됐다.’
급성 충수 돌기 염을 아뻬라 약칭하는 것처럼, 복강경을 이용한 수술도 영어의 첫머리만 따와 흔히들 라파로라고 불렀다. 어쨌든 이제는 수술 과정이 꽤 눈에 익었다.
김지훈이 수술을 보여 주는 모니터 화면을 보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머릿속으로는 과정이 환하게 보였지만 손이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따라 하며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 애를 썼다.
설마 그 때문일까?
“김지훈, 오후 수술 들어와. 유석재, 넌 안 들어와도 돼. 세계 학회 논문 발표 준비나 도와.”
김지훈이 흠칫 놀라자, 휴가를 간 최철한 대신 퍼스트를 서던 유석재가 씨익 웃었다. 원래 김지훈을 아꼈던 선배이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얼굴이 편해 보였다.
이유가 있었다. 최근 금경태 과장의 태도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변했다. 이번 세계 학회에서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의 논문이 채택됐다.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명예였고, 아무리 과장이라고 해도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기분이 붕 떴을 것이다.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자신의 발표에만 신경을 썼을 금경태 과장이 이혁민 교수는 물론, 발표를 도울 유석재까지 배려했다. 그 덕에 전공의들의 마음까지 편안해진 것이다.
이유가 뭐가 됐든, 김지훈으로서는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오후 수술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환자가 올라오자마자 수술 준비를 했다. 비록 라파로는 아니었지만 개복 수술이라고 해도 배울 것은 무궁무진했다.
담낭 절제술이 무사히 끝났다.
김지훈이 웬만해서는 전공의들을 인정하지 않는 금경태 과장이 만족할 정도로 퍼스트를 완벽하게 섰다. 눈가를 좁히며 무언가 생각을 하던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더 괜찮아졌는걸. 그동안 2년차 중에서 제일 뛰어나다는 소리가 계속 들린 이유가 있었군. 이 정도면 충분히 신현수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할 수 있겠어. 이준영, 네가 김지훈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야.’
“김지훈, 다음 수술 집도해 봐.”
“예? 감사합니다, 과장님.”
김지훈의 목소리가 힘찼다.
수술실을 나가던 금경태 과장이 입가를 말며 웃었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역시 단순한 놈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정규 수술 몇 개 주면서 신경만 조금 쓰면 이준영에게 쏠린 마음이 금방 사라지겠군. 다음에 구미를 간단 말이지. 때마침 잘됐어. 송동화에게도 슬쩍 언질을 해야겠어.’
곧이어 탈장 수술이 이어졌다.
김지훈이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보였다. 2년차라 보기에는 상당히 익숙하고 매끄럽게 수술을 끝냈다.
금경태 과장이 입술을 내밀며 김지훈을 보았다.
‘역시 이준영의 손이 보여. 기분 나쁜 일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탐이 나다니 우습군. 좋아. 한 놈이라도 날 확실하게 따른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이준영, 이번에는 운이 좋아 환자가 살았지만, 다음에 그런 일이 또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수술을 모두 끝내고 회진을 돌던 금경태 과장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김지훈, 내일부터는 계속 퍼스트를 서.”
세계 학회가 2주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하며, 수술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유석재가 있는데 상당히 뜻밖이었다. 그렇게 되면 퍼스트는 고스란히 김지훈의 몫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정말 변한 것처럼 보였다.
회진이 끝나고 난 뒤, 유석재가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아무리 논문이 중요하다고 해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이며 유석재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도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니가 무슨 잘못이 있어. 에휴! 그놈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엉뚱한 데 신경 쓰지 말고 퍼스트나 잘 서, 인마. 그래도 과장님 눈빛이 좋아져서 정말 다행이다.”
어느새 마음을 푼 유석재가 환하게 웃었다.
언제나 고마운 선배였다.
드디어 그렇게도 고대했던 복강경 수술에서 퍼스트를 섰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걸쳐 무려 다섯 번이나 카메라를 잡았다. 참관을 할 때와는 달리 수술 과정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간에 응급으로 뜬 아뻬 두 건에 이어 정규 수술이었던 담낭절제술까지 받았다.
금경태 과장이 수술 방법은 물론, 담낭과 담도 주변의 해부학적 구조까지 알려 주었다. 무슨 바람인지 모르지만 목소리까지 부드러웠다. 어쨌든 그야말로 환상적이면서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의 연속이었다.
‘야! 이번 주는 정말 죽여주네. 같은 수술인데도 스승님하고 수술하는 방법이 미묘하게 달라. 다음번 수술을 할 때 스승님에게 꼭 물어봐야겠어.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런데 갑자기 내게 왜 이러는 걸까?’
김지훈이 힐끗 금경태 과장을 보면서도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에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더 즐거워해. 이깟 수술이 문제겠어? 네 인생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어. 단 내 뜻에 확실히 따라야겠지.’
금경태 과장이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김지훈은 배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변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장례식장과 자신에 관한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수술을 주고 표정이 좋다고 해서 본질까지 변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즐겁기만 한 한 주가 가고, 주말 집담회까지 끝났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활기찼다. 금경태 과장은 보란 듯이 넉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신현수가 알지 못할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금경태 과장의 변화는 정말 뜻밖이었다. 내심 논문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김지훈의 반응이 더 의외였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김지훈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결국, 휴가 갈 생각에 들떠 있던 김지훈을 붙잡았다.
“김지훈, 과장님한테 서운했던 감정이 완전히 없어진 거야? 무척 즐거워 보인다.”
“현수야, 왜 이렇게 심각해.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을 벌써 잊었어? 난 배우고 있고, 그게 즐거울 뿐이야. 과장님에 대한 감정을 앞세울 이유가 없잖아.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솔직히 지금은 관심 없어.”
“그러다 다시 널 찍으면.”
“찍히면 되지. 일 년 반 동안 딱 이번 한 주 갑자기 얼굴이 좋아진 거야. 밑져야 본전이잖아. 가뜩이나 요새 힘들고 안 좋은 일들이 많았는데, 이왕이면 즐겁게 살아야지.”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너 생각보다 무서운 놈이다.”
“무섭다고?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현수야, 세상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나 무섭다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거다. 아! 1년차들은 빼고. 그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잖아.”
신현수가 입맛을 다셨다.
세상일은 참 묘하면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도 이혁민 교수에게 살벌하게 타고 있었다. 손일석도 신기동 교수와 수술을 하고 나오면 등짝이 땀에 흠뻑 젖어 있을 정도였다. 바라던 일이었지만 솔직히 화가 나고,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조금 달랐다. 그동안 김지훈만큼 교수들에게 탄 전공의도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다고 해도 금경태 과장은 노골적으로 김지훈을 싫어하는 티를 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웃었다. 그때마다 웃음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지금도 웃고 있었다.
‘대체 널 이렇게 긍정적으로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거야? 찍히면 된다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야?’
신현수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며 재빨리 이준영 과장의 환자들을 보고 휴가를 갈 준비를 했다.
“현수야, 이준영 선생님 환자 잘 부탁한다.”
누구나 휴가 때는 다 그렇겠지만 유난히도 목소리가 활기찼다.
문득 2주 전 휴가를 갈 때가 생각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던 것 같았다. 시작부터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다.
Carpe diem!
갑자기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는 말이야. 나도 편하게 생각하자. 김지훈보다 훨씬 편한 상황인데, 뭐가 그렇게 아쉽고 두려웠던 걸까?’
신현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오프를 가라는 유석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이 쫙 찢어진 김지훈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