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다시 달리자 (2)
오래간만에 고경아와 마음 놓고 데이트를 했다.
명동에 갔다. 요란하게 울려 펴지는 음악 소리가 들리고,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지만, 이것 역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었다.
팔짱을 끼고 걸으며 길거리 음식을 먹고, 맥주도 한잔했다. 손수레를 가득 메운 장신구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활력이 느껴졌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경아 씨,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그래요. 아프고 힘든 일이 앞으로도 정말 많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축 처져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꼭 기억할 건 평생 동안 기억해야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하지 않아요?”
김지훈이 가만히 고경아를 보았다.
“지훈 씨, 왜 그래요? 내 말이 틀렸나요?”
“틀리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잊어야 하는 건 빨리 잊어야 한다. 정말 좋은 말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고경아가 입을 삐죽 내밀며 눈을 흘겼다.
“여기서 왜 또 술이 나와요? 그러다 자려고요?”
“에이! 그럴 리가. 내가 웬만하면 커피만 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모한테 들른 적이 너무 오래됐네. 이모도 경아 씨 엄청 보고 싶어 할 텐데, 그냥 가지 말까요?”
김지훈의 말에 고경아가 살짝 흔들렸다.
“그럼 딱 한 잔만 더 해요. 그 이상은 안 돼요. 약속.”
“우리 사이에 악속은 무슨. 오케이! 이모네로 갑시다. 골뱅이에 소주 딱 한……. 어? 택시!”
김지훈의 말이 교묘하게 끝났다. 고경아의 손을 잡고 후다닥 달려 택시를 탔다.
세상이 꼭 약속대로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
솔직히 너무 단조로워 재미는 없을 것이다.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하는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와 고경아를 보며 재빨리 소주를 입을 털어 넣고 한 잔을 새로 따랐다. 고경아가 힐끗 김지훈을 보며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또 술이 사라졌다.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며 잔을 들었다.
“이모, 오래간만인데 우리 셋이 건배는 해야죠.”
“그럼, 당연히 해야지. 우리 김지훈 선생님하고 경아의 행복을 위하여!”
“이모의 행복을 위하여!”
건배 한 번에 술 한 잔이었다. 눈 몇 번 깜박거리는 사이에 소주 한 병이 사라졌다. 주인아주머니가 함께 대작을 하는 통에 고경아가 내색도 못하고 웃기만 했다.
마침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고경아의 눈이 쫙 찢어지는 순간, 김지훈이 모른 척하며 속삭였다. 불타는 사랑을 위한 사전 작업을 벌일 시간이었다.
“경아 씨, 사랑해요. 고마워요.”
고경아의 눈에서 힘이 스르르 사라졌다.
“아휴! 미워 죽겠어.”
“사랑하니까 밉기도 하겠죠? 경아 씨, 휴가 언제 가요? 이번에는 정말 우리 둘이만 갑시다. 4박 5일 어때요?”
“4박 5일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고경아를 보며 김지훈이 능청스럽게 대답을 했다.
“4박 5일이 뭐 어때서. 드라마 대사긴 하지만, 나 못 믿어요? 어떻게 날 못 믿을 수 있지? 이건 배신인데.”
사람들이 들을까 봐 차마 말을 못하고 고경아가 한숨만 쉬었다. 남자는 다 늑대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런데 왜 솔깃한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경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김지훈도 헛기침을 하며 남은 잔을 비웠다.
“경아 씨, 시간도 늦었는데 가면서 얘기하죠. 이모, 잘 먹고 갑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잘 가. 둘이 너무 잘 어울려. 아주 신혼부부처럼 보이네. 설마 벌써 그런 건 아니지?”
포장마차 밖으로 쫓아 나온 아주머니가 너스레를 떨었다. 벌써 뭘 어쨌냐는 소리에 고경아가 얼굴을 붉히면서도 웃었다.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지만 손을 꼭 잡고 걸었다.
“휴가 나랑 같이 갈 건지 결정하면 날짜만 빨리 알려 줘요.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하죠. 그리고 날 꼭 믿을 수는 없어요. 내가 뭐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경아 씨를 사랑하기까지 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네.”
농담처럼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던 김지훈이 의사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느끼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술기운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힘들 때마다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고경아였다.
고경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됐다. 김지훈이 아쉬워하며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지훈 씨, 나도 항상 헤어질 시간이 되면 아쉽고 슬퍼요. 사실 지훈 씨는 연인으로서는 한참 부족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수술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들을 때마다 난 분명히 느껴요. 내가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지훈 씨가 좋아요. 그런 사람은 거짓으로 사랑을 하지는 않겠죠? 날 결코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고경아가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지훈 씨, 눈 감아 봐요.”
“예? 왜요? 뭐 깜짝 선물이라도 주려고?”
“빨리 감아 봐요.”
김지훈이 기대가 잔뜩 걸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 물론 몇 번이나 실눈을 떠 경고를 먹은 후였다.
“지훈 씨, 휴가는 며칠 내로 결정을 할게요. 그리고 그동안 너무 힘들었죠? 힘내세요. 제가 언제나 옆에 있을게요. 눈 뜨지 말아요.”
고경아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김지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서서히 느껴지는 촉촉한 입술의 감촉에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고경아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음! 아!”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런 소리가 터졌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김지훈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만세를 불렀다. 절로 노래가 나오고,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가슴까지 뜨거워졌다.
숙소로 올라가 침대에 누운 김지훈이 한동안 뒤척였다.
‘아! 참 달다.’
밤새 그 느낌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
어느새 서울에서의 마지막 달인 팔월이 왔다.
모두들 슬금슬금 휴가들을 갔다. 김지훈이 논문을 쓰다 말고 책상에 머리를 괸 채 입맛만 다셨다. 차트를 보던 손일석이 곁눈질을 했다.
“지훈아, 너 무슨 고민 있냐? 왜 아까부터 궁상을 떨고 앉아 있어. 한대현도 이젠 많이 좋아졌고, 논문도 꽤 썼네. 근데 뭐가 문제야? 숨 좀 쉬어라.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다.”
“고민이야 많지. 요새 이준영 선생님이 좀 이상해지셨거든. 가기다 휴가 때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네. 4박 5일 동안 잘 놀다 올 수 있는 곳 없냐?”
“이준영 선생님이 애냐? 일이 있으신가 보지. 휴가나 신경 써. 4박 5일이라. 그 정도면……. 으응? 너 지금 혹시 제수씨랑 같이 간다는 거야?”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히 해, 인마. 다 들리겠다. 쓸데없는 상상 하지 말고 갈 만한 곳이나 말해 봐.”
“이 자식 봐라. 언제 진도를 그렇게 뺐대. 에이! 언놈은 이렇게 잘나가는데, 애인 없는 놈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제길! 내가 여자 문제로 김지훈을 부러워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네. 근데 차도 없는 놈에게 무슨 선택이 있어? 그냥 한곳에 콕 박혀서 지내는 거지.”
“진도는 무슨. 순수한 마음으로 가는 거야, 인마. 너 같은 놈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구미나 천안 갈 때 엄청 불편한데, 겸사겸사 이번에 차를 사 버릴까?”
“어? 너 이 형의 또 다른 이름이 순진무구, 천진난만이라는 걸 그새 잊었어? 나 이거 환장하겠네. 누굴 카사노바로……. 가만, 지훈아. 차 사고 싶어?”
손일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고는 싶지. 근데 그놈의 돈이 문제 아니냐. 전공의 때야 병원에서 먹고 잔다지만, 전문의 되고 나면 다리 뻗고 잘 방이라도 있어야 되잖아. 단칸방에서 살 수도 없고.”
“아이고! 계획을 벌써 다 세우셨어요? 불쌍한 놈. 결혼하면 인생 끝이야. 마누라 눈치 봐야지, 애 키워야지. 마음 편하게 술 한잔하기도 힘들다는 거 몰라? 서두르지 마라.”
“어쭈? 누가 들으면 결혼해서 애까지 뒀는지 알겠다. 지랄을 해요.”
“꼭 경험을 해야지만 아는 놈은 하수 중의 하수야, 인마. 진정한 고수는 그 전에 간파를 하지. 자유는 소중한 거야. 그건 그렇고, 너 운전은 해 봤어?”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이 자식이, 누굴 물로 보나. 아르바이트할 때 무지하게 몰아 봤어, 인마. 그리고 난 일종 보통이야. 넌?”
“꼭 차도 없는 것들이 면허증 까자고 하더라. 잘됐네. 내 차 가져가. 엑셀인데 아직은 몰고 다닐 만해. 중고로 팔면 얼마라도 받을 텐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돈을 받겠냐. 그냥 줄 테니까 가져가. 어때?”
눈이 동그래질 말이었다.
“차를 가져가라고? 돈은 둘째 치고, 그럼 넌?”
“그놈의 똥차 때문에 새 차를 못 사고 있잖아. 우리 집 노인네가 절대 못 사게 하거든. 하지만 니가 샀다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하실 거야. 이걸 기회로 엑셀은 니가 가져가고, 나는 엑센트를 하나 장만하면 그거야말로 윈윈이지.”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차를 공짜로 받아. 그냥 싸게 팔아. 그게 서로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똥차야, 인마. 친구한테 그런 차를 어떻게 돈을 받고 팔아? 너 내 양심에 먹칠을 하라는 거야? 그냥 몇 달 타고 다니면서 액땜이나 하고, 새 차 사. 나중에 새 차 사고 나서 여기저기 긁고 다니지 말고.”
“그래도 인마, 그게 아니지.”
손일석과는 돈이 오갈 사이가 아니었지만, 이번은 술 한잔 사는 경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심을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손일석이 하루 종일 차 얘기를 했다.
“지훈아, 제발 나 새 차 좀 사게 도와줘라. 너도 내가 한 번 꽂히면 잠도 못 자는 거 잘 알잖아. 그러니까 절대 차 공짜로 주는 거 아니다.”
밤늦도록 실랑이를 벌였다. 일단 백만 원과 술 한 잔을 약속했다. 중고차 시세가 어떤지 몰라 일단 부른 것이다.
이번에는 손일석이 절대 돈은 못 받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때 아닌 설전을 벌였다.
결국 손일석의 제안을 수락한 후에야 합의를 봤다. 한 달 후까지 차가 퍼지지 않으면 돈을 받겠다는 조건이었다.
‘어째 불안한데. 정말 폐차 직전의 똥찬가?’
손일석이 김지훈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김지훈 선생, 순서가 바뀌었지만 거래가 성사됐으니까 물건을 보실까요. 가시죠.”
나는 듯이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회색빛 엑셀 한 대가 서 있었다. 밤 12시가 넘었고, 김지훈도 마침 오프였다. 슬쩍 시선을 마주친 김지훈이 차에 올랐다.
부릉부릉!
주행 거리가 5만 킬로가 넘었지만 시동 소리가 힘찼다. 흥분과 설렘으로 떨리던 심장이 엔진 소리를 따라 격렬하게 요동쳤다.
서서히 병원을 벗어나 도로를 달렸다. 불안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손일석이 비명을 질렀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야! 박을 뻔했잖아.”
“어어어! 깜박이 켜고 천천히! 으아아! 지훈아!”
“빨간 불이야. 서, 서! 너 아직 보험 안 들었어, 인마.”
김지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소리를 질렀다.
“일석아, 니 목소리가 너무 커서 사고가 나겠다. 조용히 좀 해, 자식아.”
오로지 정면만 주시하고 앞으로 달렸다. 손일석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리고, 목은 점점 뻣뻣해져 갔다.
불과 한 시간 만에 손일석에게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듣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린 손일석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너 놀러 갈 때 차 가지고 갈지 잘 생각해라. 어휴! 연애도 못해 보고 죽는 줄 알았네.”
“자식! 운전 잘했구만. 왜 이래?”
태연한 얼굴로 뒤돌아선 김지훈의 등짝이 흠뻑 젖어 있었다. 비틀비틀 죽을 뻔했다는 표정으로 뒤를 따라오는 손일석을 보며 웃고 말았다.
‘똥차라고? 고맙다, 인마. 내가 운전은 잘 못해도 똥찬지, 아닌지 정도는 안다. 중고 시세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네.’
다음 날 고경아와 바로 연락을 해 명의 변경을 부탁했다. 깜짝 놀란 고경아가 갑자기 왜 차를 사는지 물었다.
“휴가 가야죠.”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끝났다.
밤마다 시간이 나면 손일석과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차를 몰았다. 그래도 예전에 몇 번 몰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곧 제법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처음에는 기겁을 하던 손일석도 점점 말이 적어졌다. 물론 차에서 내릴 때마다 뻣뻣한 목을 주무르긴 했다. 어쨌든 김지훈으로서는 정말 다행이었다.
고경아도 대신 명의 변경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월차까지 내 가며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씨름한 끝에 엑셀을 김지훈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