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99화 (299/1,329)

제11화 다시 달리자 (1)

눈가가 벌게진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김지훈도 숙연한 마음에 그저 한철수만 바라보았다.

삼풍백화점의 비극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 두 명의 젊은이들이 극한의 환경을 버티고 살아 돌아왔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삶의 의지일 것이다.

한대현은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났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기적일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오전 10시 55분에 일어난 일로 도리어 기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20살에 불과한 여인이 17일 만에 살아 돌아왔다. 무려 38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죽음과 사투를 벌여 승리한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 가진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의학과 의사의 한계를 처절하게 느끼는 동안 배운 것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였다.

문득 누군가 구조 직후 냉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은 정말 냉커피가 가장 마시고 싶었을까?

그 시간, 이준영 과장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17일 만의 생환 소식이 들렸다. 그동안 애간장이 타는 슬픔을 견딘 부모의 울음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문득 한철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아버지였다. 만일 한철수라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한대현은 살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부모란 그런 존재였다. 자신들의 또 다른 생명인 자식을 위해서는 마지막 남은 단 한 방울의 피도 아까지 않을 존재였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난 왜 내 아들에게 아무 말도 못했을까?’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백 번을 빌어서라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10년 만에 만난 아들과 아내에게 단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지 분명하기에 두려웠을지도 몰랐다.

이혁원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10년이라는 시간이 쌓은 단단한 벽이었다.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더욱 높고 단단해졌을 것이다.

한철수를 보며 깨달았다. 아버지란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잊고 싶어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자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준영 과장의 눈가가 벌게졌다.

그때 무릎을 꿇고서라도 용서를 빌었어야 했다. 아내와 자식을 1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무엇이 두려워 주저했는지 알 수 없었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했다.

‘혁원아, 미안하다. 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소.’

4시간을 달렸다. 이혁원이 임상실습을 돌고 있는 구미 병원이 보였다. 정문을 통과해 한쪽에 차를 세운 이준영 과장이 운전대를 잡은 채 내리질 못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지. 혁원이가 날 만나 주기나 할까?’

왈칵 또 다른 두려움을 느낀 이준영 과장이 머리를 감싸 쥐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아들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미까지 달려온 이유는 오직 아들인 이혁원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였다.

이준영 과장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에서 내렸다.

그때 병원 건물 입구에서 가운을 입은 실습생들이 몰려나왔다. 이제 막 점심을 먹은 듯 각자 커피나 음료수를 들고는 환하게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전공의 한 명이 나타나자 자동적으로 허리를 굽히며 슬쩍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이혁원이었다.

누구도 모를 슬픔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을 이혁원이 웃고 있었다. 한참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을 시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혁원아, 고맙다. 네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마음이 놓이는구나.’

이준영 과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작정 달려온 길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지만 애초에 얼굴만 봐도 다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행여 자신을 볼까 봐 슬그머니 차 뒤로 돌아선 이준영 과장이 물끄러미 이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 큰 자식이었지만 힘껏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쩌면 지금은 자신의 마음을 알든 모르든,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지 몰랐다.

이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간신히 얼굴만 알아볼 거리였지만 분명 그랬다. 이혁원이 움찔거리는 것까지 똑똑히 보였다.

아버지가 용서를 빌기 위해 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준영 과장이 손을 올리다 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혁원이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이혁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슴이 아픈지 이준영 과장이 한참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이혁원이 사라진 건물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온갖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이혁원은 이제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할 나이였다. 아버지라고 불쑥 나타나 곤란한 지경에 빠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해할지도 몰랐다.

‘혁원아, 네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행복하구나. 미안하다. 아버지가 정말 잘못했다. 용서해 다오.’

먹먹하고 답답한 가슴을 안은 이준영 과장이 차에 올랐다. 무엇이 아쉬운지 한참 만에야 차가 출발했다.

이혁원이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에 든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고,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설마 날 보러 오신 겁니까?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어머니는 용서를 해도 전 못합니다. 다신 오지 마세요.’

이혁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분노와 증오 속에 슬픔과 아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보며 아픔을 느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혁원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난 용서 못해. 절대 용서해서는 안 돼.”

그런데 왜 눈물이 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플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혁원아, 너 거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리포트 안 써? 한 명이라도 빵꾸 내면 모조리 기합이란 거 알잖아. 빨리 와.”

친구의 목소리에 눈가를 훔친 이혁원이 돌아섰다.

“아이! 자식들! 그러게, 미리미리 써야지.”

“어? 너 벌써 다 썼어?”

“그럼, 당연하지. 내가 너냐?”

“이런 제기랄! 넌 잠도 없냐? 요새 매일 술 마시고 돌아다녔으면서 언제 리포트를 다 썼어. 난 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잔뜩 걱정을 했는데 술이 고팠던 거구나. 에이! 완전히 속았네.”

이혁원이 웃었다. 어딘가 슬프고 아파 보였지만, 다들 리포트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차라리 그게 편할지도 몰랐다. 세상은 그렇게 즐겁기만 한 곳이 아니니 말이다.

한대현은 김지훈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한대현이 회복된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우리의 한계였을까? 아닐지도 몰라. 만일 누군가 치료법을 알고 있다면…….’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질병과 치료법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무지와 태만으로 인해 환자를 놓친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우리 과 환자에 관한 한 다른 의사들이 아는 것도 몰라서 환자를 놓쳐서는 안 돼. 배워야 해. 두 눈 똑바로 뜨고 최선을 다하자.’

금경태 과장의 수술에 더욱 집중하고, 지나가듯 던진 말에 담긴 의미를 되새겼다. 파트를 가리지 않고 교수들의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이제는 논문도 등한시할 수 없었다.

한대현이 좋아질수록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사이 이준영 과장이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정규 수술 시간에 수술을 했다. 담낭루 수술을 했던 환자의 담낭을 절제한 것이다. 같은 재수술이었지만 의미는 확연히 달랐다.

한대현은 온갖 불안 속에서 두 차례나 수술을 하고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이준영 과장의 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연스럽고도 힘차게 움직였다. 언제 보아도 부럽기만 한 손이었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의 안색이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심지어 태우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수술만 할 뿐이었다.

이제는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와 얼굴만 보아도 기분은 물론 컨디션까지 짐작할 수 있는 김지훈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수술을 끝낸 후 오더를 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해서 말씀이 없으셨던 게 아니야. 뭐지? 왜 저렇게 기분이 가라앉으셨을까?’

이마에 잔뜩 주름을 만들며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인상을 확 구겼다. 그동안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 얼마나 힘들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도 힘든 일이 야간 응급실 근무였다.

더구나 이준영 과장은 정규 수술을 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외과 의사였다. 사실 누구보다도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응급실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규 수술 시간에 수술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속 깊숙이 감춰 두었던 무엇인가를 건드렸을지도 몰랐다.

김지훈은 내심 그렇게 짐작을 했다.

‘밤에 근무하시는 것 때문에 그러시나? 하긴 다른 선생님들처럼 정규 일과대로 근무하지 못하는 게 속이 상하실 수도 있겠지. 실력이나 없으면 몰라. 솔직히 스승님보다 수술을 더 잘하는 분이 있기나 하나?’

이혁민 교수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었지만 멘토보다 스승이 먼저였다.

“에휴! 그런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죽겠네. 스승님, 제가 대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힘내십시오.”

혼자 중얼거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취과 4년차인 김진호였다.

“지훈아, 가만히 보면 너도 가끔 이상할 때가 있어.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다 말고 주먹까지 휘두르고 난리냐?”

“예? 선생님,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김진호가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으로 김지훈의 손을 가리켰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슬며시 폈다.

“제 손이 왜 이렇게 돼 있죠?”

“흐음! 점점 혀에 기름칠을 하고 있네. 치프 되면 볼 만하겠다. 손일석이 저리 가라겠어.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내년에 보자.”

“내년이요? 어? 그럼 전문의 따시면 바로 병원에 남는 걸로 확정되신 건가요?”

김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섰다.

“예전에는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멀뚱거렸을 놈이 바로 알아차려? 확실히 달라졌어. 일석이하고 너하고 입으로 싸우면 이젠 비슷하겠다.”

“에이! 제가 일석이를 어떻게 이겨요?”

“그것도 두고 보자.”

김진호가 나직하면서도 굵은 목소리로 웃었다.

문득 오래간만에 김진호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수술 방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예전처럼 웃고 농담까지 하고 있었다.

결코 삼풍백화점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가슴속에는 진한 슬픔과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하고 잊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있었다.

바로 11일, 13일, 17일 만에 살아 돌아온 이들이 준 감격이었다. 그들이 20살과 열아홉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가슴을 벅차게 하는 희망이었다.

이제는 다시 일상에 전념할 때였다. 김지훈도 서서히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어떤 슬픔과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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