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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98화 (298/1,329)

제10화 기적 (2)

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언제부턴가 눈도 뜨지 않고 죽은 것처럼 누워만 있던 한대현이 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도 믿기 힘들었다. 극한 상황에 처했던 한 사람의 의지가 한대현에게 전해진 것이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한철수를 보았다. 한철수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한대현 씨.”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입을 열던 김지훈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말로도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이준영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한대현의 어깨를 잡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한철수가 병실 밖으로 따라 나왔다. 출혈에 관한 문제는 항상 병실 밖에서 나누었다.

“김지훈, 오늘 출혈량은 어때?”

“아직 확연한 변화는 없습니다만, 약간 줄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느낌뿐이야?”

김지훈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막연한 기대를 품었었는지 이준영 과장과 한철수의 눈가에 실망이 스쳤다.

하지만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변화였다. 세 사람의 가슴에 희망이라는 글자가 스며들고 있었다.

김지훈이 졸린 눈을 억지로 떠 가며 전과 다름없이 킵을 했다. 그때가 유일하게 한철수가 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한대현 앞에 앉아 논문을 뒤적이던 김지훈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며칠 버티지도 못했을 텐데, 저렇게 출혈을 하고도 버텨 주다니 참 대단하네. 삶의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아버님도 정말 대단하시고.’

한대현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비록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었지만, 앉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한대현이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졌는지 짐작이 갔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모니터 소리 속에서 작은 희망이 보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와 다시 힘을 낸 아들의 모습은 김지훈에게 더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한철수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한대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파인트의 전혈을 수혈한 지 만 하루가 거의 다 지났다. 지금쯤이면 창백해지며, 의식이 흐려져야 할 때였다. 그런데 아직도 얼굴에 홍조가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아들의 곁을 지킨 아버지가 이를 모를 수가 없었다.

‘대현아, 넌 누구보다도 강해. 이젠 훌훌 털고 일어나자.’

생존자는 한대현에게만 의지를 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한철수만이 아니라 희망을 잃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의지를 전했을지도 몰랐다.

한철수, 아니 아버지는 믿었다.

강한 삶의 의지가 반드시 육신의 무력함을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옆구리에 박힌 드레인을 잔뜩 감싼 거즈가 더 이상 붉게 물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조금 있으면 회진 시간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질 못했다.

‘오실 때가 됐는데.’

그때 갑자기 병동이 소란해졌다. 동시에 김지훈과 이준영 과장이 병실로 들어왔다. TV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13일 만에 또 한 명의 생존자가 구출됐다. 19살의 여리기만 한 여인이 살아 돌아왔다.

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기쁨에 넘쳐 환호할 일이었지만 도리어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힘을 내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김지훈이 드레싱을 하려다 말고 흠칫 놀랐다. 조금은 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점심때까지만 해도 전과 다름없는 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대현의 안색은 분명 마지막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을 떨리게 하는 일인가?

이준영 과장도 한대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복대를 풀고 거즈를 노출시켰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끝까지 벌겋게 피로 젖어 있어야 할 거즈가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한철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드레인을 감쌌던 거즈를 펼쳤다.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시뻘건 피도 그대로 보였다. 한철수가 실망한 기색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데 드레싱을 하는 김지훈은 물론 이준영 과장까지 거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지훈이 포셉으로 거즈를 한 장 한 장 펼쳤다.

“김지훈, 몇 장이야?”

“풀(full)로 젖은 건 일곱 장입니다.”

“일곱 장? 확실해?”

“예. 네 시간 동안 분명히 일곱 장 젖었습니다.”

한철수의 눈에는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지만 의사들의 눈은 달랐다. 평소의 절반이 조금 넘게 젖었을 뿐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좁히며 한대현을 보았다. 분명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은 속단하기 일렀다. 특히 누구보다도 간절할 한철수에게 성급한 기대를 줄 수는 없었다.

한철수가 복도로 나오자마자 물었다.

“과장님, 우리 아들 어떻습니까?”

“일단 아드님 상태가 좋아지긴 했습니다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출혈량이 전보다 줄긴 했지만 일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신중하기만 한 대답에 한철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 추세로만 가면 듣고 싶었던 말을 꼭 들으실 겁니다. 아버님,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세요.’

잠시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병실에 홀로 남은 한대현이 13일 만에 구출된 여인을 보다 말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뛸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울음이 터지려 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빠졌던 한대현이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야. 빛도 없고, 함께할 사람도 없는 곳에서 13일을 버텼는데 나라고 못 버티겠어? 난 살 수 있어. 반드시 일어설 거야.’

살고 싶다는 바람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버지와 김지훈, 그리고 이준영 과장이 스쳐 지나갔다. 중환자실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어둠 속에 홀로 방치된 적은 없었다.

살 수 있다.

일어나 걸을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자 확신이었다.

한대현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아빠!”

힘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귀에는 분명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실로 들어온 한철수가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자식의 입이 열린 것이다.

“아빠! 나 물 먹고 싶어요.”

입을 연 것도 모자라 물까지 찾고 있었다. 한철수가 급히 복도로 달려 나와 김지훈을 불렀다.

“선생님, 우리 아들이 물을 먹고 싶답니다.”

한철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김지훈도, 이준영 과장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단순히 물 한 모금 마시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대현의 경우 배고픔이나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당장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한대현은 환자였고, 의사는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물은 사실상 식사와 다름이 없었다. 자칫 소화기에 부담이라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김지훈이 한대현의 바이탈을 체크하고는 신중하게 복부 청진을 했다. 그렇게도 듣기 힘들었던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드디어 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 조금만 더 좋아지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다른 어떤 환자보다 신중해야 돼.”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밤 드레싱과 내일 아침 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침대에 붙어 있는 금식 표지를 보았다. 그 표지를 떼는 날이야말로 한대현이 본격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하는 날이 될 것이다.

입안은 바짝 마르는데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직접 깨끗한 거즈에 물을 적시며 말했다.

“한대현 씨, 지금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거즈에 물을 묻혀서 입에 물고만 있어야 합니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절대 물을 직접 마셔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죠?”

“네, 선생님.”

한대현이 대답을 했다. 순간 흥분한 김지훈이 말까지 더듬을 뻔했다.

“아버님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환자분이 달라고 해도 절대 주시면 안 됩니다.”

한대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환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목소리에 담긴 희망과 떨림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오더를 내던 김지훈의 눈가가 벌게지고 말았다.

Sips of Water(물 섭취 가능).

수술을 한 환자들에게 첫 번째 내는 식사 스케줄이다.

단순히 물을 먹을 수 있다는 오더에 불과했지만, 한대현에게는 높고 가파른 산을 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첫 번째 오더를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드레싱을 하던 김지훈이 연거푸 길게 숨을 내쉬었다. 거즈를 적시는 피의 양이 확연히 줄고 있었다. 한대현의 눈에 서린 희망의 빛이 점점 더 진해졌다.

다음 날 검사 결과는 생각 외로 좋았다. 출혈로 인한 혈색소 수치는 아직 낮았지만 전과 다르게 상당히 올라와 있었다.

“선생님, 아버님께서 뽑은 전혈 두 파인트가 남아 있습니다. 한 번 더 수혈하겠습니다. 이 상태로만 가면 곧 물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회진을 끝낸 김지훈이 다시 한대현을 찾았다.

“일단 출혈이 확실히 멈춰야 물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까,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으면 안 돼요. 그리고 수혈 끝나고 나면 조금씩 운동해 봅시다. 단, 최대한 천천히 해야 합니다. 서두르지 말아요.”

다시 돌아온 삶의 의지는 한대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수혈이 끝나고 난 뒤, 한철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불과 두세 걸음을 걷고는 숨을 헐떡였지만, 한철수에게는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대현아,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자.”

한철수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한대현에게 웃음까지 보였다. 아픈 자식을 앞에 둔 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시간이 나는 대로 병실에 들르던 김지훈도 한대현이 걷는 것을 보았다. 우습게도 김지훈의 눈가가 벌게지고 있었다.

운동이 끝난 직후 드레싱을 했다. 복대를 열고 거즈를 여는 순간 한철수가 신음을 터트렸다. 한대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거즈가 한 장도 빠짐없이 온통 검은 피로 젖어 있었다.

한참 동안 피에 젖은 거즈를 보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이건 지금 나온 피가 아니에요. 그동안 배 속에 조금씩 고였던 피가 이제야 빠져나오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리어 웃어야 할 일입니다.”

출혈량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김지훈이 뻔질나게 병실을 드나들었다. 드레싱을 하며 출혈 여부를 계속 확인했다.

한대현은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회복을 보였다.

마침내 그렇게도 지겹게 거즈를 적셨던 피가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선생님, 더 이상 출혈이 보이지 않습니다. 복부 CT 시행해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졌다. 복부 CT를 촬영하는 자리까지 한철수가 따라왔다. 그동안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 현상돼 나오는 사진을 보던 김지훈이 부리나케 방사선과롤 향했다.

인턴 때 안면을 익혔던 방사선과 교수가 있었다.

“넌 어떻게 2년차가 돼서도 필름 들고 뛰어다녀?”

“그렇게 됐습니다, 선생님.”

“무슨 환잔데 직접 들고 왔어?”

김지훈의 설명을 들은 방사선과 교수가 눈을 부릅뜨고 CT를 보았다. 절제된 간 부분으로 대장이 치고 올라간 것 이외에는 특이 소견이 없었다. 배 속에 고인 피도 보이지 않았고, 남은 간도 정상적인 소견이었다.

“간이 부족한 것 빼고는 다 좋다. 환자 열심히 봤구나.”

방사선과 교수가 웃으며 김지훈의 등을 두드렸다.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이준영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CT를 확인한 후 회진을 돌았다.

마지막으로 한대현의 병실로 들어섰다. 이준영 과장이 차트를 확인하고 한대현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드레싱도 직접 갈아 주며 한대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한대현, 배고파?”

“네, 선생님. 그런 느낌이 좀 드는 것 같아요.”

“지금 한 말이 듣던 중 가장 길다.”

마지막 말에는 한대현이 웃기까지 했다.

“한대현, 정말 고맙다. 이렇게만 가자.”

이준영 과장의 말에 한철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마디 더 한 이준영 과장이 병실을 나오자, 따라 나온 한철수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과장님, 이젠 괜찮은 겁니까? 확실히 피가 멈춘 겁니까?”

이준영 과장이 콧소리를 내며 한철수를 보았다.

“이제는 확실히 멈췄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들이 이젠 사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버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아버님께서 아드님을 살리셨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김지훈 역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콧등만 찡그렸다. 한대현의 생명을 위협하던 원인 모를 출혈이 멈춘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이것 역시 기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빠 오는 숨을 간신히 진정시킨 한철수가 이준영 과장의 손을 잡았다. 한참을 말없이 눈가만 붉히다 말고 꺽꺽거렸다.

“감사합니다. 크윽!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신의 입을 막으며 빠져나오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던 한철수의 등이 굽었다.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갑자기 한철수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어흐흑! 으허허허!”

어느 누구 앞에서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던 감정이 피가 멈췄다는 말 한마디에 폭발했다. 그동안 참고 참으며, 가슴속에 꽉꽉 묻었던 두려움과 아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슬픔이 아니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병실 문이 열렸다.

“아빠!”

“대현아, 고맙다.”

아버지와 아들이 부둥켜안았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던 아들이 자신만을 기다리며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있던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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